▲ 우리는 지금 불안한 밤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리더를 더욱 믿고 맡기며 따라야한다.한치 앞도 예측하기 힘든 세상들,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국민모두를 지혜롭고 따뜻하게 인도해주길 희망해본다
▲ 5면 만평
아산 정주영이 가장 많이 사용한 언어는 해봤어? 해봤냐고.라는 말이란다. 이 말을 역사학자 토인비식으로 말하면 '도전과 응전' 쯤 될 것이고 투지와 깡으로 종결된다.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에서 로버트레드포드의 대사처럼 인생은 투지와 깡이다. 계속시도 하라는 이 말은 다름 아닌 논어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산 정주영은 논어의 가르침을 따르기 보다는 대학을 더 선호했다. 그는 평생 대학의 가르침대로 살았고 대학의 가르침대로 죽어갔다. 물론 그가 마지막 노년의 죽음에 임박해서 성경책을 본 것을 제외하면 그의 평생은 대학의 가르침,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귀결된다. 아산 정주영은 9세 때 서당에서 대학을 뗀다. 우문인지 모르나 이것이 그가 배운 학문의 전부란다. 7세 때 논어를 읽은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나 8세 때 춘추를 읽었다는 중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비견해도 결코 밀리지 않는 학문편력기이다. 아산은 맨몸으로 현대 그룹이라는 부를 이룬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런 그가 뭐가 부족해서 대통령이 못됐을까. 대통령 출마는 했는데 당선이 못 된 것이다. 예수의 재가제자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해석을 내 놓는다. 모든 권력은 위에서 내려온다. 이를 두고 1927년
- 누가 그를 조선의 국모라고 불렀나!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로 공전의 기록을 세운 명성황후. 극적인 죽음, 일국의 왕비가 침전에서 외국의 낭인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실은 드라마적인 요소를 지녔다. 역사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우리에게 준 충격은 가혹하다. 드라마와 뮤지컬의 성공으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한 인물로 복권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기도 했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며, 일제의 잔재라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명성황후 민자영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1866년(고종 3) 두 살 아래 고종과 혼인한다. 세도정치에 민감했던 흥선군 이하응의 선택은 분명했다. 여덟 살에 부친을 잃은 중전 민씨는 인현왕후의 후손으로 뼈대 있는 가문에다 어린 시절부터 『춘추』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간택의 중전민씨가 입궁 7년 만에 조선 최초의 살아있는 대원군을 축출하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은 중전 민씨가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정치적 반려자 또는 그 이상의 정책 결정권자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였다.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경전철에 대한 불신의 꼬리표를 떼어버리자 용인경량전철 개통은 용인시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의미있는 사건 중 하나다. 94만 용인시민 모두가 축하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기자 역시 시민의 한사람으로 축하하는 바이다. 물론 개통과 동시에 운행 적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많지만, 이미 주사위가 던져졌으니 활성화 방안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경전철을 보면서 느낀 것은 역사의 수레바퀴는 역시 굴러간다는 생각이다. 용인시는 분당선 연장선인 지하철을 빼면 사실상 두 번째 기차인 셈이다. 물론 과거에는 화석을 태워 시커먼 연기를 뿜으며 달렸던 협괴열차에 불과했지만, 이젠 운전사 없이 혼자 돌아다니는 최첨단 경량전철이 도입된 것이다. 잠시 과거로 되돌아가보면 수여선이 사라진지 벌써 40여년. 수여선은 일제 강점기에 이 땅의 수탈을 목적으로 만들어 졌다. 일제는 여주와 이천 등지에서 수탈한 쌀과 석탄을 수여선 열차를 통해 수원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수인선을 이용해 인천으로 옮겼고, 인천항에서는 선박으로 일본 본토까지 가져갔다. 1930년에 개통해서 1973년까지 운행됐던 수여선. 일제 수탈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음에도 해방이후엔 지역민들의 삶의 애환과 희망
도심속에서 싱그런 봄속을 달린 2013년 용인마라톤 대회에 용인시 최대 인라인 동호회소속 회원들이 참석, 자원봉사를 해 주목을 받았다. 그 주인공은 용인INP(인라인과 사람들 Inline People회장 양태석)소속 10여명의 회원. 이들은 지난 27일 수지레스피아에서 5000여명의 마라토너와 시민들이 참가해 열린 이 대회 패트롤 자격으로 한몫했다. 이 패트롤은 5㎞, 10㎞, 하프를 달리는 마라토너들과 함께 주로를 달리며 근육통증과 피로감을 호소하는 마라토너들을 현장에서 도와주는 역할이다. 이들은 가방에 각종 약품을 갖고 주로를 달리며 간호하기때문에 이동 간이 응급사다. 용인시민들과 함께 한 마라톤 대회에 마라토너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더욱이 이같이 커다란 시 행사에 우리 동호회가 조그마한 역할을 할 수있다는 것이 참 기뻤습니다 이날 이춘미(닉네임 수지)씨는 10㎞구간에 패트롤로 참가한뒤 주자들과 결승점에 도착한 소감을 피력했다. 한편 이 동호회는 지난 2008년부터 시민누구나 참여, 수지체육공원, 수지레스피아, 탄천 등에서 일주일에 2번이상 꾸준히 모임을 갖고 있다./특별취재반
굿푸드/까치골 양곱창(대표 이은화) 특허 받은 양념노하우 손님 매료 맨손 맛 고집하는 타고난 부지런함 양곱창의 전설을 들어보셨나요? 누구나 한 번쯤 어려운 시절을 겪습니다.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주위에선 저를 오뚝이라 칭합니다. 부지런한 천성, 손맛을 살리기 위해 맨손 조리를 고집하는 까치골 양곱창이 어느새 전설이 됐습니다. 분당 서현동에서 대박 삼겹살집을 운영하던 이은화 대표는 1년여 만에 집주인 아들에게 대박 집을 내주고 새로운 가게를 물색했다. 물색을 시작한지 4개월여가 흐른 지난 1998년 어느 날, 3일 연속 초록색 집이 현몽했으며 물색 중인 이 대표 앞에 꿈에서와 똑같은 집이 나타났다. 바로 분당 구미동 186-1, 당시의 팬텀빌딩(현 동성프라자)이다. 쉬는 날이었지만 계약을 도와준 21세기부동산 강철호 사장과는 지금도 만날 때마다 반갑다. 당시 곱창과 직접 만든 두부는 날개 돋친 듯 인기를 끌었고 몰아치는 소나기 손님으로 이 대표는 주체할 수 없는 나날을 보냈다. 호사다마라나? 당시 몰아친 광우병, 구제역, 조류독감 등 치명적인 유행병은 이 대표를 절망의 위기까지 몰아갔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선 이 대표를 주위에선 오뚝이라 칭했다.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31 고독한 사람 최영철 말수가 뜸한 사람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교분이 두터운 사람이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궁합이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 사이를 아무나 함부로 비집고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다 정말이지 어쩔 도리가 없어 잠시라도 멀어지면 심심하고 보고 싶어서 입술이 파리해지는 사람이다 잠시 떨어져 헛바람이 둘 사이를 지나가면 금방 침이 말라 죽을지도 모를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손발과 팔다리의 취미가 고독인 사람이다 소싯적 취미란에 아무 의심 없이 고독이라고 쓴 적이 있는 사람이다 손발과 팔다리가 제 일에 바빠 조금만 흩어져도 눈앞이 캄캄해지는 사람이다 팔다리가 한통속으로 무슨 일을 도모할까 봐 걱정이 태산인 사람이다 보고픈 이도 없고 찾아 나서거나 악수할 이도 하나 없는 사람이다 온 힘을 풀고 손과 발을 허공에 늘어뜨린 채 홀로 묵상하는 척하는 사람이다. 고독은 스스로 얻는 병이다. 생의 저울 위에 올라선 제 무게에 비해 고독은 얼마나 가벼운 것인가. 가볍게 살지 못하는 자들은 삶의 무게 때문에 한없이 가라앉을 뿐이다. 말이 많고 적음이 가볍거나 무거운 것의 기준은 아닐 것이다. 인간은 고독한 동물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군
▲용인 만평
여자는 시댁 밖에서 태어나 자라서 시댁 안으로 들어가 살면서 삶을 접는 존재다. 친정에서 엄마를 보고 엄마의 삶을 배운다. 친정엄마를 보면 그 딸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엄마를 보고 자라지 못한 딸이 가장 불쌍한 딸이다. 보고 자라지 못했을 때 가해지는 형벌 같은 말.『본데없이 자란 것』시집온 며느리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말은 없다. 시집살이의 성패는 친정엄마의 존재유무에서 결판난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고래로 집안의 흥망과 영고와 성쇠는 며느리의 들고남에 있다. 이혼이 대세인 요즘시대에 뭔 고리타분한 소리냐지만 뼈대 있는 집안은 그렇지 않다. 시집을 간다는 것은 작게는 한남자의 아내, 크게는 가문의 며느리가 됨이다. 스스로를 가문과 사랑하는 이에게 구속당하는 것. 혼자 몸으로 자유롭게 살다가 누군가에게 매이는 것을 기꺼이 감내 할 수만 있다면 시집은 갈만한 곳이다. 시집은 여자가 친정을 떠나서 가야할 첫 집이며 마지막 집이다. 시집은 배우는 곳이 아니라 사는 곳이다. 이를 시집살이라 한다. 질서는 시부모님에서 비롯되는데 차라리 벽을 탈게 라는 말에서 보듯이 시집살이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일 게다. 아담의 처 이브가 구백 살
한국 최초의 신부를 기억하라! 김대건을 말하다. 역사교과서에 한줄로 정리된 인물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다. 그런데 김대건에 대해서는 가장 불명확한 것은 그의 출신 신분이다. 워낙 비밀스럽게 종교활동을 했기 때문일까. 25년의 짧은 생을 살았기 때문일까? 그의 집안이 양반이었는지 평민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가 추구한 것은 신분을 초월한 평등과 사랑을 구현하는 것이었으니. 1821년(순조 21) 김대건은 김제준(이냐시오)과 고(高)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이 살던 곳은 내포 지방 솔뫼로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진후는 천주교를 믿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14년 사망했다.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되었다. 할아버지 김진후의 아들 중 셋째 종한은 1816년에 참수되고, 종한의 딸은 1839년에 참수당하고, 이 딸의 사위는 1824년에 옥사했다. 또 작은할아버지인 선후의 손자 제교, 할아버지 김진후의 넷째아들 희연의 아들 제항은 1866년에 공주의 충청감영에서 처형되고, 김대건의 또 다른 숙부 제철의 아들 진식은 1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