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을 이제 뭐라 불러야 하나 <연산(燕山)혼차(昏虘)종사장위중의추대(宗社將危衆議推戴)>. 연산은 사리에 어두웠으며 마음이 모질어 나라가 위태롭게 되니 여럿이 의논하여 중종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 글은 중종실록 권1 원년 병인 9월 1일자 첫줄 말미에 있는 기록이다. 실록은 연산군을 일러 폭군이나 암군 용군 혼군이 아닌 혼차라는 단어로 규정짓는다. 어두울혼과 모질차가 합쳐진 단어다. 강호는 박근혜 대통령을 일러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뜻하는 혼군(昏君)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크게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그나마도 혼군의 자리에서 지난 3월10일 11시23분을 정점으로 파면이라는 이름으로 쫓겨났다.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이정미 재판관은 탄핵 인용도 탄핵 각하도 탄핵 기각도 아닌 꽤나 완곡한 표현인 “파면” 이라고 똑 부러지게 말했다. 이로써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이 부여해준 5년의 대통령 임기를 못 채우고 청와대를 나와 그가 살던 집으로 갔다. 강호는 그 집을 일러 사저(私邸)라는 표현을 쓰는데 쫓겨난 임금이 돌아간 집에 대한 택호로는 적절치 않다. 문제는 그가 청와대를 나서면서 한 가지를 빼놓고 갔다는 사실이다. 다름
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예보/ 임솔아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저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 일기예보, 오늘의 날씨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솔아의 첫 번째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이 출간 되었네요.
동아시아를 걷다-3 부산의 속살, 역사의 보고 동래이야기 부산 바다, 그리고 동래 80년대 ‘부산’과 ‘해운대’라는 단어는 청춘들을 들끓게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친구나 여자친구랑 비둘기 열차를 밤새 달려 푸른 바다를 찾는 것이 우리들의 ‘낭만’이었다. 아직도 사람들은 부산에 오면 해운대와 광안리에 발길이 머문다. 하지만 서울이 명동이 다가 아니듯 내륙 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회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으로 낯선 흥분을 달래줄 곳이 많다. 그렇게 부산의 오랜 전통의 향기가 머문 곳이 바로 동래이다. 임진왜란에서 가야 고분까지 동래는 역사코스와 온천코스 두 가지가 있다. 오늘은 역사의 발자취와 시장 떡볶이, 통닭까지 섭렵하는 역사순례길이다. 먼저 동래역 인근 지하철 4호선 수안 역에 내린다. 전철 역사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하철 역사 내 기념관이 있다. 임진왜란 역사관으로 순식간에 수천 명이 도륙당한 읍성과 아비규환 속에서도 부사와 노비까지 결사항전을 기념한 공간이다. 지하철 공사 당시, 엄청난 유물과 유골이 나왔다. 특히, 성 앞 해자(垓字)라 불리는 도랑에서 나온 유골과 유물은 충격적이다. 동래읍성과 전통시장 역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조금만 가
영화 : 케빈에 대하여 감독 : 린 램지 상영 : 2012.07.26 주연 : 틸다 스윈튼, 에즈라 밀러 선행은 힘들다. 그 누구도 멈추라고 하지 않으니 쉽게 중단하기도 힘들고,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숨기기도 힘들다. 반면 악행은 쉽다. 누군가 알면 오히려 곤란하기 때문에 홍보할 필요도 없다.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자신은 선행이라 생각하지만 결과는 악행으로 변질될 수 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주인공 케빈의 악행에 대한 이유는 영화에서 쉽게 찾을 수 없다. 여동생의 눈을 잃게 만들고, 살인까지 저지른다. 범행 이후 비난을 받는 것은 케빈이 아닌 그의 엄마였다. 영화는 케빈의 악행에 비해 매우 고요하다. 그리고 케빈의 엄마인 에바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은 아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아들의 존재가 자신의 사회생활을 중단시켰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서로가 맞지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왜 그랬냐”는 엄마의 말에 아들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모르겠어”라고 답한다. 엄마에게는 증오만 가득한 아들이지만, 아버지에게는 귀여운 아들이다. 이런 이중적 태도는 관객들에게 혼란을 준
<박소현의 삶의 낙서> 버스에서 학생들이 떠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참을만한 데시벨이었는데 점점 그 소리는 소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가 뭐라고 좀 야단을 쳤으면 하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옆에 아주머니도 서서히 얼굴을 찡그리기 시작했고, 내 앞에 나이 지긋한 어르신도 학생들을 힐끔거리며 혀를 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에 취해서 까르르 웃으며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나 시선을 살필 이유가 없었다. 버스 기사 아저씨의 훈계를 기대했지만 기사 아저씨의 표정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화장실 갈 여유도 없이 빡빡한 배차 시간에 지친 기사 아저씨는 막힌 도로만 야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도 버스 안에 소음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막힌 도로를 뚫고 버스가 한 정류장에 멈추자 할머니 한분이 힘겹게 버스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순간 앞뒤로 돌아보며 시끄럽게 떠들던 학생들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할머니에게 서로 자리를 양보하겠다며 일어서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리둥절해 하시며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으셨다. 할머니는 학생이 양보한 자리에 앉으시며 “아이구 학생
최은진의 BOOK소리 97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것, 우리가 시간으로 하는 일 지루하고도 유쾌한 시간의 철학 ◎ 저자 : 뤼디거 자프란스키 / 출판사 : 은행나무 / 정가 : 13,000원 ‘시간은 기묘한 것이지. 그냥 흘러가는 데로 살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나 돌연 우리는 시간만은 느끼네’ 호프만슈탈은 <장미의 기사>에서 ‘시간’을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는 거부할 수 없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일상 생활에서 시간을 집중해서 느끼며 사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시간은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인다. 그러나, 정말 아무것도 아닐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누구도 나에게 시간이 무엇인지 묻지 않을 때는 시간이 무엇인지 아는 것 같은데, 정작 묻는 이에게 설명을 하려면,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철학과 함께 독문학, 예술사를 두루 섭렵한 저자는 다양한 접근으로 시간의 본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책은 ‘지루함이라는 시간’, ‘새 출발의 시간’, ‘근심의 시간’, ‘사회화한 시간’, ‘고유한 시간’, ‘충족된 시간과 영원’ 등 총 10장에 걸쳐 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시계로 재는 시간이 아닌, 시간의 작용이
# 태아는 엄마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공유 엄마의 심장을 출발한 혈액은 엄마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을 다 돌고 다시 심장으로 돌아간다. 이때 혈액은 엄마 몸속에 있는 태아를 비껴가지 않는다. 태아의 온몸을 함께 돌면서 신선한 산소와 영양분과 호르몬 등 각종 물질을 전해준다. 탯줄로 연결된 태아는 엄마와 생물학적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그렇다면 엄마의 마음은 어떻게 전해질까. 엄마의 마음도 혈액이 순환할 때 함께 전해지는 걸까. 엄마의 마음은 혈액 속에 있는 걸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음이 심장에 있다고 말했고, 뇌 과학자들은 두뇌에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음은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 최근 양자물리 학자들의 설명이다. 양자물리학적 입장에서 볼 때 최소 미립자인 양자의 단계에서 우리의 몸과 정신의 구별은 무의미하다. 육체와 정신이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한 아이가 다리 절단 수술 후에 없어진 내다리가 아프다면서 다시 응급실을 찾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거에는 이와 같은 현상을 딱히 설명할 도리가 없어 팬텀 현상이라고 했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적 연구가 진척된 오늘날에는 사고 당시의통증을 온
대한민국 헌법의 명령, 박근혜 대통령 탄핵 기원전 606년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노나라 선공 3년 봄(선공삼년춘 宣公三年春)3월쯤 일이다. 초나라 장왕이 육혼 땅에 사는 오랑캐 융을 치고(초자벌륙혼지융楚子伐陸渾之戎), 마침내 낙수까지 쳐들어가(수지우락遂至于雒) 주나라 왕실의 경내에서 군대로 하여금 시위(示威)를 하게 했다(관병우주강(觀兵于周疆). 이에 놀란 주나라 정왕은 대부 왕손만을 보내어 초나라 장왕을 위로하게 하였는데(정왕사왕손만로초자定王使王孫滿勞楚子)초 장왕은 주나라의 보배인 솥(정鼎)의 크기와 무게를 묻는다(초자문정지대소경중언楚子問鼎之大小輕重焉). 대부왕손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대왈對曰). 솥의 크기와 무게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덕에 달려 있는 것이지 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재덕불재정在德不在鼎). 옛날 하 나라의 천자가 훌륭한 덕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석하지방유덕야昔夏之方有德也)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도 자기들의 산천이나 기이한 물건의 형상을 그려서 바쳤습니다(원방도물遠方圖物). 그런데 하나라의 마지막 임금 걸왕은 악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걸유혼덕桀有昏德) 솥은 상<은>나라로 옮겨가서(정천우상鼎遷于商) 6
탄핵은 시민혁명의 승리다. 2017년 봄,시민 혁명이 승리했다. 국민들은 4·19혁명과 6·10항쟁을 통해 지켜온 민주주의를 평화의 상징인 촛불로 지켜냈다. 촛불은 분명 민중의 함성이었다. 때론 용서와 화해의 몸짓이자 준엄한 경고의 횃불이었다. 하지만 절대 권력의 오만과 무능은 끝내 국민을 배신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헌법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헌정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봄을 시샘하던 꽃샘추위가 극성이던 지난 3월10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인의 전원일치로 대통령 박근혜의 파면을 결정했다. 탄핵심판 장면이 언론을 통해 생중계되자 전 국민의 시선이 쏠렸다. 탄핵 결정의 순간은시민 혁명의 승리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역사의 비극적 순간이었다. 대통령 탄핵은 박근혜 개인의 불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국민 전체의 불행인 것이다. 탄핵 당위성에 국민들이 공감하고 박수를 보내면서도 우울한 이유다. 탄핵 과정에서 불거진 권력층 주변부 인사들의 추악한 면모는 한국사회의 병폐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특별수사검사의 활약이 나름 높이 평가를 받았지만, 친박 및 보수 세력들은 헌재 재판관을 비롯한
여수 서효인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 도시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다시는 못 올 것이라 생각하니 비가 오기 시작했고, 비를 머금은 공장에서 푸른 연기가 쉬지 않고 공중으로 흩어졌다 흰 빨래는 내어놓질 못했다 너의 얼굴을 생각 바깥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나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있었다 이 도시를 둘러싼 바다와 바다가 풍기는 살냄새 무서웠다 버스가 축축한 아스팔트를 감고 돌았다 버스의 진동에 따라 눈을 감고 거의 다 깨버린 잠을 붙잡았다 도착 이후에 끝을 말할 것이다 도시의 복판에 이르러 바다가 내보내는 냄새에 눈을 떴다 멀리 공장이 보이고 그 아래에 시커먼 빨래가 있고 끝이라 생각한 곳에서 다시 바다가 나타나고 길이 나타나고 여수였다 너의 얼굴이 완성되고 있었다 이 도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네 얼굴을 닮아버린 해안은 세계를 통틀어 여기뿐이므로 표정이 울상인 너를 사랑하게 된 날이 있었다 무서운 사랑이 시작되었다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는 질문과 대답처럼 이 시국에도, 봄은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