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0 흰색과 분홍의 차이 송재학 겨울 노루귀 안에 몇 개의 방이 준비되어 있음을 아는지 흰색은 햇빛을 따라간 질서이지만 그 무채색마저 분홍과의 망설임에 속한다 분홍은 흰색을 벗어나려는 격렬함이다 노루귀는 흰 꽃잎에 무거운 추를 달았던 것, 분홍이 아니라도 무엇인가 노루귀를 건드렸다면 노루귀는 몇 세대를 거듭해서 다른 꽃을 피웠을 것이다 더욱이 분홍이라니! 분홍은 병(病)의 깊이, 분홍은 육체가 생기기 시작한 겨울숲이 울고 있는 흔적, 분홍은 또다른 감각에 도달하고픈 노루귀의 비밀이다. ................................................................................................................................................. 노루귀, 꽃이 핀 후에 잎이 나오는데, 그 모습이 노루의 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랍니다. 꽃말은 믿음. 시인은 노루귀를 통해 흰색과 분홍에 대한 믿음을 전하고 있어요. 시인의 산문「사물은 보여 지거나 만져지거나 냄새를 통해 나와 비슷해진다」에서 발견한 문장들 입니다. “내가 노루귀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9 겨울 편지 안도현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 시인으로부터 겨울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펼쳐보니 푸른 댓잎과 흰 눈의 풍경이 그려져 있네요. 펑펑 눈 내리는 사이 ‘나’는 무엇을 했을까요. 술을 마셨답니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요. 담백하기 그지없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거기와 여기라는 말 사이에는 허공만이 자리하겠지요. 그 허공이 겨울 편지의 지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8 외계(外界) 김경주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畵家)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 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色)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 화가가 있습니다.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의 이야기인데요. “바람만을 그리는” 예술가의 고뇌를 쉽게 짐작할 수 없겠지요.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답니다. 숨겨놓은 마음들을 허공에 그려 넣듯. 당연하게도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7 토요일 오후 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 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6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 여기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떠올려보면 어릴 적 우리는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철봉 오래 매달리기는 더 이상 자랑이 아닙니다. 또한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4 이과두주 유홍준 희뿌연 산 언덕에는 흰 눈이 내리고요 얼어 죽을까봐 얼어 죽을까봐 나무들은 서로를 끌어안고요 동치미 국물 동치미 국물을 마시며 슬픈 이과두주 마시는 밤 또 무슨 헛것을 보았는지 저 새카만 개새끼는 짖구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저 하얀 들판에는 검은 새들이 내리고요 짬뽕국물도 없이 시뻘건 후회도 없이 내리는 눈발 사이로 흘러가는 푸른 달 틈으로 적막하고 나하고 마주 앉아 이과두주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 독한 것을 담아 마시는 밤 이 조그만 것에도 독한 것이 담기는 밤 ................................................................................................................................................. 오늘은 이과두주(二鍋頭酒) 이야기. 두 번 솥에서 걸렀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답니다. 투명한 증류주, 겨울밤과 잘 어울리는 술. 증류된 슬픔도 같은 빛이겠지요. 눈까지 내린다면, 세상이 일순 환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만치 서로를 끌어안은 나무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3 첫새벽 한강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감은 머리칼 정수리까지 얼음 번지는 영하의 바람, 바람에 바친다 내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를 어둠들 술렁이며 포도(鋪道)를 덮친다 한 번도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한 텃새들 여태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었을 때 밟는다, 가파른 골목 바람 안고 걸으면 일제히 외등이 꺼지는 시간 살얼음이 가장 단단한 시간 박명(薄明) 비껴 내리는 곳마다 빛나려 애쓰는 조각, 조각들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소리를 ................................................................................................................................................. 새해, 아껴두었던 ‘첫 새벽’을 그대에게 선물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정갈한 절망”으로 귀결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망은 “맑게 씻은 귀와 코와 혀”의 전언일 거라 믿고 있습니다. 간절해서 간절한 질문, “제 가슴털에 부리를 묻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2 제주도 허만하 멀리 짐승 발자국 하나 없는 흰 설원 한가운데서 정면으로 목쉰 바람소리 향하여 서 있는 한 그루 나목의 꿈 안에 5월의 숲 연두색 반짝임이 있듯, 빛나는 은백색 갈치 길이 끝에 너울지는 검푸른 겨울 바다가 있다. ................................................................................................................................................. 그대에게, 세상의 모든 겨울 바다를 선물합니다. 나목 한 그루가 설원을 마주하고 서 있네요. 짐승의 발자국도 다녀가지 않은 설원을 말이지요. 약속처럼 바람이 불어오는데, 과연 정면으로 목이 쉰다는 건 얼마만큼의 울음을 담보로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한 그루 나목이 홀로 우뚝합니다. 꿈이라는 단어와 결을 함께 하는 연두색은 언제나 눈부시지요. 돌돌, 수액으로 돌고 있을 연두색. 그 색에서 피어오르는 건 식물의 살냄새가 알맞겠지요. 잠시 살펴보면, 허만하 시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나는 논리의 뼈대로만 이루어지는 연설과 모놀로그의 허황함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1 자기소개 다니카와 슌타로 저는 키 작은 대머리 노인입니다 벌써 반세기 이상 명사 동사 조사 형용사 물음표 등 말들에 시달리면서 살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저는 목수 연장 같은 게 싫지 않습니다 또 작은 나무를 포함해서 나무를 무척 좋아하는데 그것들의 명칭을 외우는 일은 서툽니다 저는 지나간 날짜에 별로 관심이 없으며 권위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팔뜨기이고 난시고 노인입니다 집에는 불단(佛壇)도 신위(神位)도 없지만 방 안에 직결되는 커다란 우편함이 있습니다 저에게 수면은 일종의 쾌락입니다 꿈을 꾸어도 눈만 뜨면 잊어버립니다 여기서 쓴 것은 다 사실인데 이런 식으로 말로 표현하면 왠지 수상하네요 따로 사는 자식 두 명 손자 손녀 네 명 개나 고양이는 없습니다 여름은 거의 티셔츠 차림으로 지냅니다 제가 쓰는 말은 값이 매겨질 때가 있습니다 .................................................................................................................................................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0 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을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을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고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9 신뢰 김승일 기계가 되고 싶다고 했지? 기계가 되는 법을 너는 몰랐지? 아직 몰라 답답하고 안타깝게도 우린 아직 기계 되는 법을 모르고 기계들은 네가 된다 본질적으론, 기계들이 네가 되면 기계가 너고 기계인 너는 오늘 되고 싶은 게 되어 있고 너는 이제 만족했을까? 입력하면 기계들은 믿는 것이다 믿기지가 않을 텐데 망설임 없이 기계에게 입력했다 너는 부자야 기계가 대답했다 나는 부자야 누가 내게 물어봤다 너는 부자야? 기계처럼 대답했다 나는 부자야 기계처럼 대답해도 나는 부자가 아니구나 만약 내가 진짜 부자면…믿을 수가 없을 거다 너무 좋아서 (…) ................................................................................................................................................. 우리는 더 이상 ‘신뢰’라는 말을 ‘신뢰’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시의 첫 구절은 질문으로 시작되는데요. 나와 너는 기계가 되고 싶지만 방법을 몰라 속수무책입니다. 그러는 사이, 기계들이 먼저 네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8 비인간적인 김현 밤이 떠돌아 왔습니다. 인간은 헐벗은 몸 어둡고 웅크린 인간의 욕조 속으로 들어갑니다. 처음 물이 닿은 인간의 발가락 끝부터 쑥빛 비늘이 쑥쑥 돋습니다. 인간은 오랜만에 미끈거리는 감촉에 젖습니다. 인간은 두 다리보다 지느러미에 맞는 생물이야. 인간은 되뇝니다. 인간의 침대에 걸터앉아서 인간은 목을 늘립니다. 늘어진 목과 머리는 여럿이 나눠먹을 수 있는 인간의 밥상을 두리번거리며 불어터진 먼지를 쓸고 인간의 욕실까지 흘러갑니다. 흘러온 얼굴이 인간의 지느러미를 따라 움직입니다. 인간은 아가미로 숨 쉬고 숨죽입니다. 인간의 호흡을 잃었구나, 인간. 인간의 표정이 백랍처럼 빛납니다. 인간의 목덜미가 납빛으로 찢어집니다. 점점 희미해지는 어린 인간이 찢어지는 인간 곁으로 와 앉습니다. 어린 인간은 자라나는 혀를 불규칙적으로 잘라내며 모처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발명하려고 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말을 하지 않아도 돼! 늘어난 인간은 더듬거리고, 사라지는 인간의 혀들은 꿈틀거리고, 변신한 인간은 한결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갖고, 멈춰있습니다. 욕조의 수면이 밤의 수면까지 밀려갑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