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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7 |토요일 오후 |오탁번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7


토요일 오후

오탁번



토요일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함께
베란다의 행운목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일 세상사람 저마다 눈을 뜨고
아주 바쁘고 부산스럽게 몸치장 예쁘게 하네
하루일 하루공부 다 끝내고 중고생 관람가
못된 장면은 가위질한 그저 알맞게 재미난 영화
팝콘이나 먹으며 구경하러 가는 것일까
한주일의 일과 추억을 파라솔 접듯 조그맣게 접어서
가볍게 들고 한강 시민 공원으로 나가는 것일까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
베란다의 행운목이 펼쳐 주는 손바닥만큼씩한 행복
토요일 오후의 우리 집은 온통 행복뿐이네
세 살 난 여름에 나와 함께 목욕하면서 딸은
이게 구슬이나? 내 불알을 만지작거리며 물장난하고
아니 구슬이 아니고 불알이다 나는 세상을 똑바로
가르쳤는데 구멍가게에 가서 진짜 구슬을 보고는
아빠 이게 불알이나? 하고 물었을 때
세상은 모두 바쁘게 돌아가고 슬픈 일도 많았지만
나와 딸아이 앞에는 언제나 무진장의 토요일 오후
모두다 예쁘게 몸치장을 하면서 춤추고 있었네
구슬이나? 불알이나? 딸의 어릴 적 질문법에 대하여
아빠가 시를 하나 써야겠다니까 여중 2학년은
아니 아니 아빠 저를 망신시킬 작정이세요?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토요일 오후
모의고사를 열 문제나 틀리고도 행복하기만 한
강남구에서 제일 예쁜 내 딸아 아이구 예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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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딸이 함께하는 풍경입니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의 행운목에서 피어오르는 행운. 딸은 외출을 위한 몸치장에 여념이 없고요. 그걸 바라보는 아빠는 예의 ‘아빠 미소’를 짓습니다. 이렇게 시 속의 우리 집은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합니다. 문득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시작되는데요. 바로 딸이 세살 무렵의 일이지요. 펼쳐지는 이야기는 누구든 ‘아빠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오탁번 시인은 시집『시집보내다』 ‘시인의 말’에 썼습니다. “되돌아보면 아득하게도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 술래잡기하는 아이처럼 되똥되똥 뛰어가다가 넘어지는 나의 시여. 모두 다 고맙다.” 모두 다 고맙다고 말했지만, 오늘의 시에 특별한 고마움이 담겨있지 않을까요. “매일 물을 뿌려 주어야 싱싱한 잎을 자랑하는/베란다의 행운목”처럼, 매일 사랑을 받으며 건강히 자란 딸이 “문법도 경어법도 딱 맞게 말하는” 여중생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세상 모든 존재는 “아이구 예쁜 것!”일지도.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