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철시인의 초부리시첩4 용인, 그 위대한 여정-포토 히스토리 100년 상설전시를 4월 초파일 정원에 모란꽃이 부처님 색시처럼 곱게 피어나자 사진을 찍어뒀다. 환한 햇살 바람에 엷은 비단 치맛자락을 휘날리던 큼직한 모란꽃을. 듬성듬성 눈이 덮인 초부리 야산 자락에 흰 눈의 정령처럼 우뚝 서 있는 자작나무 군락을 찍었다. 막 떠오르는 햇살에 하늘을 향한 자작나무 자디 잔 가지들이 빛살이 되어 찍혔다. 몇 십 년 전 신혼여행 때 명승지에서 사진만 찍어대던 부부들을 봤다.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다며 풍광 감상보다는 사진 찍기에만 다들 몰두하고 있었다. 어찌 사진이 그때그때의 생생한 느낌을 대신하게 할 수야 있겠느냐며 그런 사람들을 속물로 여겨왔었는데 여기 용인 초부리에 정착하고부턴 계절 계절 놓칠 수 없는, 영영 아까운 풍광들을 나도 어느새 사진에 담아두게 됐다. ◇대성전 졸업식 1900년대 초 사진을 처음 접한 지구촌 오지의 원주민들은 대체로 카메라 앞에 서기를 죽기보다 싫어한다. 카메라가 자신의 목숨과 혼을 그대로 빼간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피사체의 정령이 그대로 담긴다는 게 사진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심정이다. 어디 정령뿐이겠는가. 찍고 바라보는 이
경기도어린이집연합회(이하 경어련회장 최창한)는 지난 8일 수원 라마다 프라자 호텔에서 2015 을미년을 맞아 보육계 인사들을 비롯한 유관기관, 관계 공무원 등 2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신년 인사회를 개최했다. 이날 신년 하례식에는 경기도청 여성가족국 박정란 국장이 참석, 국무총리 표창 및 보건복지부장관상 전수와 축사를 했다. 또한 경기도의회 강득구 의장을 비롯해 도의원 및 31개 시군구 의원들과 유관기관 대표자들이 함께했다. 용인지회에서는 중앙 회장단과 분과장이 참석했고, 시립수지어린이집 전수경 원장이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최창한 회장은 그간 시군별로 장기간동안 보육부서에서 근무하며, 노고를 아끼지 않았던 공무원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기도 했다. 박경린 기자 yongindu@hanmail.net
수원 영통 시온여성병원이 2015년 1월 1일 보건복지부로부터 산부인과전문병원으로 지정 받았다. 전문병원이란 보건복지부에서 전국병원을 대상으로 의료의 질 , 의료서비스 수준, 환자구성비율 등의 총 7개 항목에 대하여 서류심사와 현장조사, 전문병원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전문병원으로 지정하는 제도이다. 산부인과 전문병원은 전국에 총 16개 병원이 지정받았으며, 수원,용인,화성 지역에서는 시온여성병원이 유일하게 지정 받았다. 시온여성병원은 올해 산부인과 전문병원으로 지정 받았을 뿐 아니라 지난 2013년 8월에는 의료기관인증까지 획득했다. 이를 통해 시온여성병원은 진료수준, 의료서비스와 환자 안전관리 측면에서 우수함을 정부로부터 공식 입증 받았다. 수원 영통 시온여성병원은 2004년부터 현재까지 유니세프 지정 모유수유 우수병원으로 아기에게 친근한 병원이다. 모유수유를 제일 많이 하는 병원, 모자동실을 운영하는 병원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연분만율이 높고 수원지역에서 분만건수가 가장 많은 병원으로 환자 만족도가 높은 병원이다. 시온여성병원 이승철 병원장은 앞으로 전문화된 진료와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 할 것이며 무엇보다 환자중심의 진료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고기리 세한도 -삶의 변화를 느낄 때 처음 이사 와서는 적응하지 못했다. 한 이틀 펜션에 머물러 온 것 같았다. 그것이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생존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수도가 고장 나자 화장실은 물론 취사까지 모두 멈춰 버렸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든지 도망을 가든지다. 여기는 경비실도 없고 관리사무실도 없다. 내가 경비원이고 내가 관리인이다. 퇴원하고 한동안 요양을 할 줄 알았던 기대는 낯선 집에 적응하느라 흘러가고 있었다. 눈이 펑펑 쏟아졌다. 고기리는 온통 하얀 눈밭이 됐다. 이런 촌구석에서 눈을 떴을 때 그 묘한 감동과 불안이 교차한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당 두 번 다니는 마을버스가 끊어졌다. 말 그대로 고립이다. 전에는 TV에서나 보던 풍경이 당장 내 일이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전화로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들르기로 했던 전시장도 사정상 못 나가게 되었다 연락하고는 카메라를 메고 집을 나선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그대로 쌓여 장딴지까지 빠진다. 도심형 사진가는 이런 아웃도어,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집 밖에 나오니 그 풍경이 펼쳐진다. 앞마당에서 이리저리 뛰는 쫑이가 애처롭게 날 바라본다. 목줄을 풀어주니 저
오룡의 역사 타파(67) 조선의 벽서와 괘서, 그리고 대한민국 대자보와 찌라시 1547년 9월 18일 양재에 붉은 글씨의 대자보가 붙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여주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말한다. 윤씨는 동생인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장악하고,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벽서에 등장하는 이기는 윤원형과 손잡고 젊은 사림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윤원형 일파는 벽서를 권력 강화의 기회로 이용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벽서 사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외척과 일부 훈구세력들은 을사사화 때 쫓아내지 못한 선비들을 숙청하고, 20년 동안 독점적 권력을 유지했다. 국가의 기강은 무너졌고, 유랑민은 속출했으며 민심은 흉흉했다. 고리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3년 동안 왕조를 조롱했다. *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는 대자보가 넘쳐났다. 1980년 광주에 대해 왜곡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땡전 뉴스에 맞선, 미처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대신 전하는 대안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자보
오룡의 역사타파(66) 조선의 특권층 조기교육 - 인격을 앞세운 통치를 위해서 였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경제력이다. 이것은 인격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가진 무기도 본질적으로는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골적으로 경제력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들이 경제력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그들은 지적인격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자신들의 통치에 순종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받은 조기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쓰셨고, 세 살 때는 다과를 받으시자 목숨 수(壽) 자나 복 복(福)자 찍은 것만 잡수시고 () 또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자와 넉넉할 부(富)자가 나오자, 치(侈)자를 손으로 짚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이것이 사치다라고 하셨다. 조기교육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에서도 실시되었다. 특권층 가문의 조기교육도 오늘날의 조기교육을 뺨치는 수준이었다. 고종 때 나온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오룡의 역사 타파(65) 백성 버리고 도망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 그는 강화도에서 행복했을까? 1231년 몽골의 기병이 북계를 휩쓸었다. 안정기를 누리던 고려의 무신 정권은 맞서 싸우기보다 피난을 선택했다. 교정도감 최우에게 강화도 피난을 권한 사람은 풍덕군(지금의 개풍군)의 승천부 부사 윤린이었다. 윤린의 말을 들은 최우는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고종에게 강화로의 천도를 강요한다. 1232년 7월 6일, 강화도 피난길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드디어 천도하니 때마침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졌다.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벼슬아치와 양가(良家)의 부녀들도 신발을 벗고 갈 지경이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피난의 아비규환을 뚫고 강화로 온 사람들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방치된 본토의 백성들은 30여 년간 몽골의 말발굽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강화로 도망간 왕과 무신들을 위해 세금을 바쳤다. 몽골은 수시로 쳐들어 왔으니 삶과 죽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강화의 원주민들은 어떠했을까? 피난 온 개경 사람들은 다수가 권력자이거나 관련
박숙현의 태교칼럼 태교는 국가와 지자체에서 보급해야 얼마 전 용인에서 있었던 태교음악회에 나이 지긋한 여성단체 임원들을 초청했더니 강당을 가득 메운 임신부들을 보며 매우 놀라워했다. 그들은 음악회를 함께 해보자는 제안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들 세대에는 태교라는 말이 낯설었을 것이다. 혼자서만 임신했냐는 시어머니의 말에 주눅이 들어 배 불러오는 것조차 부담스러웠었지 우리 사회가 여전히 태교 보급에 미온적인 것은 여성지도층 인사들의 쓰라린 기억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젊은 시어머니 세대가 등장하면서 빠른 속도로 태교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필자가 태교 교실을 운영할 때 태명이 딸기였던 임신부가 시부모님으로부터 축하 카드를 받았다며 행복해 했다. 물론 예전보다야 태교에 대한 인식이 확산된 게 사실이지만,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아직도 태교를 제대로 못하는 임신부들이 수두룩하다. 태교는 태아를 위해 좋은 것을 해주고, 나쁜 것으로부터 보호하는 일상적인 행위다. 그런데 이런 상식조차 모르는 임신부들이 많아 안타깝다. 특히 다문화 가족과 미혼모들의 태교 문제는 국가 차원의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태교에 무지한 국가
오룡의 역사 타파(64) 온달은 영웅이 아니다 - 이 땅을 지켜낸 진정한 바보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온달에 대해 사관 김부식은 왜 '바보'라고 기록했을까. 온달은 왜 '바보'라고 불리워진 것일까. 현대사의 전직 대통령에게도 '바보'란 표현이 쓰인 것을 보면 실제 바보는 아닐 것이다. 온달이 바보인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 열전 제5권에 명확한 이유가 나온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한없이 착했지만 웃음이 날 정도로 못생겼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동냥을 해서 효도를 다하는 그를 국가는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유명 인사였다.온달을 찾아 온 공주가 황당한(?) 프러포즈를 하자 이는 어린 여자가 하기에 마땅한 행동이 아니니, 필시 너는 사람
오룡의 역사 타파(63) 찬란했던 백제의 한성 시대를 마감하게 만든 개로왕의 토목공사 나라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宮室)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蛇城, 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검단산) 북쪽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개로왕의 풍납토성 보수공사 관련 기록이다. 개로왕(재위 455~475년)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백제왕이다. 개로왕의 비극인 동시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백제 몰락의 시초였다. 적자재정으로 궁핍해진 백제는 군대의 유지조차 힘들어 졌고, 백성의 징발도 어렵게 된다. 남진정책의 기회를 노리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 군대를 보내 불과 7일만에 한성을 함락 시킨다. 개로왕은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게 붙들렸다. 이 고구려 장군들은 말에서 내려 개로왕에게 절한 뒤에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서는 아차산(풍납토성 건너편, 천호대교 북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