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딜리아니
삶은 어떤 의미에서 누구나 홀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풍경 속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이어지는 고유한 빛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폐허를 지나가지요. “나는 이 세상엔 맞지 아니하므로/ 병들어 있으므로/ 머지 않아 죽을 거야/ 끝없는 평야가 되어/ 뭉게 구름이 되어/ 양떼를 몰고 가는 소년이 되어서/ 죽을거야 ”(김종삼,「그날이 오면」부분) 라는 시가 공중의 새떼처럼 이상한 슬픔으로 흐릅니다. 시인의 비극적 세계인식이 죽음을 암시하지만, 그것은 평야, 구름, 소년 같은 평화로운 이미지와 만나 영생의 길을 가고자 하는 시인의 꿈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생의 소멸인 동시에 해방이며, 죽음이 있다는 그곳을 향해 불구의 영혼을 이끌고 가는 시인의 사유가 나타나 있습니다. 저녁이 흘러가는 방향을 쫓다가 떠나간 별빛들을 생각하는 밤하늘에는 죽은 새의 고요가 흐릅니다. 문득, 고독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모딜리아니의 긴 손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의 손에서 흘러나온 한 인간의 푸른 허무를 우리는 보게 되지요. 가난과 술과 병에 걸려 허덕이던 그의 삶은 우리를 날카로운 종이에 베인 듯 아리게 합니다. 한없는 고독 속에 요절한 모딜리아니의 방랑을 따라 가다보면《장콕도의 초상》을 만납니다. 극작가이기도 한 장콕도 시인은 모닐리아니를 위해 세 시간 넘게 포즈를 취했다고 합니다. 그는 “내 귀는 소라 껍질/ 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장콕도,「귀」전문)는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한 단 두 줄의 유명한 시를 남겼습니다.
화가는 시인의 예민한 특징을 깨진 유리처럼 섬세하게 포착하여 그려나갑니다. 모딜리아니는 선의 우아함을 잃은 적이 없다고 하지요. 그는 얼굴을 길쭉하게 늘여놓기도 하고, 불균형을 드러나게 강조하기도 하면서 시인의 초상을 그려냅니다. 또한 목을 길게 늘여놓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인간의 비애에 초점을 맞춥니다.《장콕도의 초상》속에서 화가가 주목한 것은 섬세하고 신경질적인 손에 있었다고 하지요. 눈을 뜨면 언제나 벼랑을 살던 모딜리아니이지만, 인간에 대해 뜨겁고 깊은 애정을 화폭에 담아냈다고 합니다. 그는 남프랑스 칸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전 지금 행복 합니다”라고 씁니다. 절실한 영혼의 무늬가 번민과 열정의 옷을 입고 지금 우리에게 푸른 잉크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섬세하고, 예민하고, 세계와의 불화를 담아 낸 면에 있어서 장콕토가 시를 그리는 화가라면. 모딜리아니는 그림을 쓰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가만히 읊조려 보세요. “전 지금 행복 합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처럼 세계가 한없이 길게 늘어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