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7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이제니
옥수수 수프를 먹는 아침
탁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고
의자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의자가 필요하고
그릇이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그릇이 필요하고
누군가가 필요하고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하고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고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 몇 개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졌고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는 겁니다
(…)
알갱이 알갱이 당신이 알갱이를 볼 수 있는 건
알갱이를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옥수수 알갱이는 노란색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그리운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
.................................................................................................................................................
입추, 가을에 들다. 우리 따뜻한 수프 한 그릇 어때요. 시적 주체가 속삭입니다. 수프를 먹으려면 “이왕이면 둥글고 따뜻한 탁자”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의자와 그릇도 필요하지요. 실은 그보다 “따뜻한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수프 속에 둥둥둥 떠 있”는 “알갱이마다 생각나는 얼굴”이 있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죽었고 사라졌고 지워”진 존재들. “이제는 없으니까 알갱이를 먹”으며 애써 기억하는 이름들이겠지요. 그런데 왜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허기는 깊어지는 걸까요. 문득, 이제는 없는 존재들을 “볼 수 있는 건”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겠지요. 이 순간 “둥글고 따뜻한 알갱이 알갱이 알갱이”라는 구절은 고요한 음악에 가까워요. 따뜻한 음식을 앞에 두고 생각나는 사람, 그러나 같이 마주할 수 없는 얼굴이여. “어쩌면 언제든 볼 수 있다고 믿고 싶은/조금은 그리운” 이름이여 안녕, 안녕.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