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0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과거’라고 할 수 없는 세월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딸 대신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습니다.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면 좋겠지만 딸내미의 차가운 원룸 바닥이네요. 딸이 “몸을 바꾸자고” 제안하지만 그에 대한 아버지의 답.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이 구절은 영원한 독백의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조상 대대로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딸은 “부리는 걸 배”우고 있는 있습니다. 배움은 배움인데, 이상하게도 “그 애”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서늘한 예감. 누군가의 지난 세월은 생생한데, 누군가의 기억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저 별과 은행나무만이 기억하고 있을 노래라니.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는 딸의 안부가 도착하고,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는 답장은 촌스럽기보다 어쩐지 먹먹하지요. 어색하게 오고가는 “숙박비 얼마”는 이제 “마지막 농사”라는 이름만큼 쓸쓸합니다.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딸아이는 아버지가 아닌 ‘아빠’를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빠 잘 가”, 대답도 못하고 돌아서는 한 사람의 뒷모습.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