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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규 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박철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 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지난 인생을 복습하고, 미래를 꿈꾸게 되는 연초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재는 늘 당면 과제를 마주하고 있지요. 시인에게는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내가 건네준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굵은 비를 만나 병맥주를 마시고 맙니다. 비는 왜 “쑥국쑥국 쑥국새처럼” 그치지 않았을까요. 다음에는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병맥주와 나무가 전해준 행복도 잠시,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맙니다. 약속처럼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이후 분위기는 짐작하시겠지요. 순간 시인은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과 마주합니다. “어느 한쪽, /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우리는 아직 삶을 긍정하고 있는 걸까요. 시 한 폭에 쑥국새, 비, 나무, 아내, 아이, 시인의 현재가 담겨있습니다. “아직 멀고 먼” 저마다의 당면 과제를 안고.


이은규 시인 yudite23@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