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을 주는 시 한 편-111
血書
채상우
가지 않았다 묵호에 가지 않았다 주문진에 가지 않았다 모슬포에 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햇빛 그러나 가지 않았다 아르헨티나에 쿠바에 유고슬라비아에 가지 않았다 내 의지는 확고하다 창문을 휙 긋고 떨어지는 새처럼 무진은 남한에도 있고 북한에도 있지만 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지 않았다 약현성당에 가지 않았다 개심사에 가지 않았다 길안에 가지 않았다 길안은 내 고향에서 삼십 리 떨어진 동네 평생 가지 않았다 담배를 사러 가지도 않았고 술을 사러 가지도 않았다 아직은 그리하여 가지 않았다 파리에선 여전히 혁명 중인가 광주에선 몇 구의 시체들이 또 버려지고 있는가 게르니카는 아직 그려지지 않았다 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 다시 그러나 가지 않았다 애인은 지금 열심히 애무 중일 테지만 가지 않았다 앵초나무에 꽃이 피려 한다 이제 최선이 되려 한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레바논에 사이공에 판지셰르 계곡에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았다 못 견디겠네 그러나 가지 않았다 그날 그때 명동에 신촌에 종각에 미도파백화점 앞에 꽃잎 꽃잎들 가지 않았다 그날 오전 열 시 민자당사에 구치소에 그날 새벽 미문화원 앞에, 가지, 않았……다… 그날 아침 그날 저녁 그날 밤 그곳에…… 꽃잎, 꽃잎, 꽃잎들 아직 있다 거기에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가지 않았다 오로지 가지 않았다 가지 않고 있다 가지 않는다 한평생 아프리카를 떠나지 않는 잭카스 펭귄은 펭귄인가 아닌가
끝끝내
*김추자, 「꽃잎」.
투사들은 연사가 되어 세상 속으로 떠났고, 바보들만 남아서 아무데도 가지 않고 먹물 든 손만 자책하고 있구나. 설탕 2스푼 같은, 약간의 사랑이 가미된 감미로운 혁명만 살아남아서 투쟁과 문학의 오브제가 되었구나. 사랑은, 혁명은 그리고 또 다른 권력이 되어버린 공부하는 투사들은 이제 어디에나 있구나. 체 게바라가 상품이 되어 불티나게 팔리더니 덩달아 혁명도 이미지가 되어 목걸이에 티셔츠에 노트에 모자에 부착돼 팔려가는구나. 끌려가는 전봉준, 팔려가는 게바라. 꽃병을 던지던 잭카스 상우 펭귄은 ‘끝끝내’ 어디에도 가지 않고 물 위에 떨어진 꽃잎처럼 지금도 제 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는데, 어디에도 가지 않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던 아이들은 오랜 칩거를 마치고 돌아와 설탕 2스푼이 가미된 선언을 하고 투사가 되었구나. 말 못하는 바보들은 또 어김없이 끌려가 들러리를 서는구나. 아무데도 간 적 없는, 그러나 어디에나 있었던 폼 안 나는 사람들만 뒤에서 들러리를 서는구나. 여전히 못 생긴 소나무만 선산을 지키는구나.
박후기 시인(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