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역
한정우
너 천리로 가는 지름길을 알고 있니
오백 년 늙은 느티나무 아래 작은 집이 있었어
나는 매일 밤 느티나무에 불을 질렀고
지친 오백 년 사랑은 소진됐어
불 탄 빈터만 남은 천리땅
아무도 찾지 않는 죽은 느티나무 자리에 천리역이 생겼으면 해
삼월의 눈송이가 기차 소리처럼 멀리 날리고
죽은 가지에 걸린 방패연은 밤새 붕붕거렸어
천리 밖이 어두워지면 간혹,
빈터를 표류하는 간이역이 보이고
좇아가면 다시 빈터로 사라지는 바람역
간 적 없는 과거를 횡단하여 오고 어디에도 없는 미래를 달려서
개찰구를 빠져나와 또 정신없이 달렸어
천리를 버리고 멀리멀리
나는 지금 너무 멀리까지 와 있어
선로를 따라 휘어지는 천리행 기차를 잡지 못하고
등에 업은 느티나무 묘목을 달래며
얼마나 더 기다려야 천리역에 닿을지
천리 밖에서만 보이는 천리, 천리역
한정우 시인
강원도 춘천 출생
2019년 제2회 남구만신인문학상 수상
2023년 첫 시집 『우아한 일기장』 펴냄
(아르코 문학나눔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