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5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박 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꾹 쑥꾹 쑥꾹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 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 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꾹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 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 지난 인생을 복습하고, 미래를 꿈꾸게 되는 연초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재는 늘 당면 과제를 마주하고 있지요. 시인에게는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내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4 묵죽(墨竹) 손택수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에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을 친다 아침해가 나자 질척이는 먹물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 눈 속에 잠들어 있던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고 어린 나는 창들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싸륵 눈 녹는 소리를 듣는다 대나무 허리가 우지끈 부러지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씩만, 눈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계신 곳에도 ‘숫눈’이 내리는지요.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을 바라봅니다. ‘다른 것이 섞이거나 더럽혀지지 않은, 본디 생긴 그대로’를 뜻하는 ‘숫-’. 세상에 드문 ‘숫-’은 이제 ‘숭고’하기까지 한데요. 장에 나가시는 “소쿠리 장수 할머니”의 삶처럼 말이지요. 이미 ‘숭고’인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묵죽(墨竹)을” 칩니다. 그 소슬함에 “질척이는 먹물”마저 “눈 속으로 스며들어 짙은 농담을 이루고”요. 마침 “댓이파리/ 발자국들도 무리지어 얇은 종이 위로 돋아나”면 이제 다른 도리는 없습니다. “창들에 베껴 그린 그림 한 장 끼워놓고/ 싸륵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3 볼록볼록 신현정 과연 이 시각 안내견을 앞장세워 맹인 하나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각 이 길을 발 디딜 때마다 해가 볼록볼록 달이 볼록볼록 별들이 볼록볼록 그리고 꽃송아리들이 볼록볼록 올라오는 보도블록으로 교체해주셨으면 하고 존경하는 시장님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빵도 한 번쯤은 밟고 지나가게 해주셨으면 하고 시장님. 당신께 드리고픈 새해 ‘새마음’. 언제나 ‘길’은 ‘나아감’을 떠올리게 하지요. 우리가 마주하게 될 풍경이 여기 있습니다. “이 시각 안내견을 앞장세워// 맹인 하나 어김없이 지나가는 이 시각 이 길을” 바라보아요. 만약 “발 디딜 때마다 해가 볼록볼록// 달이 볼록볼록// 별들이 볼록볼록” 떠오른다면 어떨까요. 마침내 “꽃송아리들”까지 “볼록볼록 올라오는// 보도블록”이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길’을 나서는 일이 두렵지 않을 거예요. 시장님, 아니 그보다 높으신 이름들이여!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빵도 한 번쯤은 밟고 지나가게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리나요. ‘마음의 사회학’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사회의 표정은 곧 구성원들의 ‘마음’이기 때문이지요.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빵”냄새의 시간을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2 내 집 천상병 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 터지게 외친다. 들려다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 나는 결혼식을 몇 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천상의 하나님은 미소로 들을 게다. 불란서의 아르튀르 랭보 시인은 영국의 런던에서 짤막한 신문광고를 냈다. 누가 나를 남쪽 나라로 데려가지 않겠는가. 어떤 선장이 이것을 보고, 쾌히 상선에 실어 남쪽 나라로 실어주었다. 그러니 거인처럼 부르짖는다. 집은 보물이다. 전 세계가 허물어져도 내 집은 남겠다…… 새해 잘 여셨는지요. 오늘은 시로 쓰는 ‘집’ 이야기 입니다. ‘운명 공동체’라는 말 참 따뜻하지요. 국가-사회-가족을 ‘운명 공동체’라고 부를 때, 운명을 함께한다는 말의 무게는 달라집니다. 연일 보도되는 2014년 부동산 전망과 ‘내 집’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요. 시인은 묻습니다. “누가 나에게 집을 사주지 않겠는가?” 담담한 듯 실은 “하늘을 우러러 목 터지게 외”치고 있지요. 그 외침이 하도나 간절해서 “세계가 끝날 때까지”라는 시점이 아득하기만 합니다. 꼭 남쪽 나라가 아니어도, 방 한 칸 없이 살다간 시인이 아니어도, 요즘의
이은규시인의 시로 쓰는 편지 1 국수 백석 (……)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새해가 밝았습니다. 시로 쓰는 첫 편지는 백석의 ‘국수’ 이야기 입니다. 시절이 하 수상한데 웬 국수인가 물으신다면 어찌할까요. 이럴 때 일수록 국수 나눠먹는 풍경에 대해 조곤조곤 들려드리고 싶어집니다. 춥고 지치고 배고플 때 국수 한 그릇과 마주하게 되면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마음이 먼저 말하지요. 그 순간만큼은 진수성찬보다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이 반갑지 않겠습니까. 겨울밤 “쩔쩔 끓는 아르궅(‘아랫목’의 평안 방언)”에서 들려오는 후루룩 후루룩 소리, 그 맛있는 풍경. 하 수상한 시절일수록, “조용한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