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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획물

오룡의 역사 타파(79)

오룡의 역사 타파(79)

잊혀져 가는 남북국 시대의 북국, 대조영의 나라 발해
우리는 지금, 역사를 잊은 민족이 되고 있다.

‘진정 나에겐 단한가지 내가 소망하는게 있어 / 갈려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가 있을까 / 망설일 시간에 우리를 잃어요’ 라고 서태지는 ‘발해를 꿈꾸며’를 노래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5년에도 발해는 여전히 남의 땅이다. 남북국 시대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로 바뀐 중등 교과서의 목차를 보면 발해는 더 멀어져만 가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지리부도에 나오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 사이의 발해만은 낯설지 않은데 역사 부도에서의 발해 역사는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은 668년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을 하남 지방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요동과 만주의 옛 고구려 영토는 무주공산과 다름없었다. 고구려인이 거의 없는 만주는 다수의 말갈인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발해 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대조영은 그 무리를 이끌고 영주로 이사하였다.(····) 대조영은 드디어 그 무리를 이끌고 동쪽 계루의 옛 땅으로 들어가 동모산을 거점으로 성을 쌓고····’라고 기록한 구당서의 기록에 보면 당의 포로가 도망쳐 세운 발해에 대한 고민이 묻어난다.
진(震)국이라는 국호를 인정하기 싫었던 당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 발해군이라는 이름은 요동 일대에 여러개 존재하는 지방을 부르는 보통명사였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성씨가 ‘대’씨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대종영의 아버지는 걸걸중상이고 말갈족을 이끌었던 걸사비우를 보면 이두문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의 사출도에서 기원하고 있는 윷놀이의 ‘도·개·걸·윷·모’에서 ‘걸’은 ‘클’을 의미한다. 즉 크다는 의미의 한자어인 대(大)로 해석되어 걸걸중상이 대중상이 되고, 아들은 대조영이란 이름으로 중국의 기록에 남은 것은 아닐까.
759년 발해 문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국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하자 일본은 견당사의 영향으로 발해라고 사용하던 명칭을 고려라고 표기했다. 3대 문왕시기의 발해는 자신들이 고려(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속일본기의 759년 10월 기록을 보면 일본에 도착한 발해 사신 양승경과 고남신은 고려 사신이라 표기했다.
8세기에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발해가 당과 일본과의 교류는 계속했으나 신라와는 교류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 신라가 보기에 발해는 국가로 인정할 수 없는 괴뢰국이거나 변방 세력으로 무시해 버렸을 수도 있다. 종주국인 당이 국가로 인정하지 않은 발해를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기 어려웠을 것이다.(냉전시대 남북한의 상황도 유사하지 않은가.)
875년 빈공과에서 발해의 오소도가 신라의 이동보다 높은 점수를 얻어 수석의 영광을 차지하자 최치원은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치욕스럽게 여겼다는 신당서의 기록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쓰려 했다면, 고려로 망명해 온 발해 유민 십여만 명을 통해서 능히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통탄 했다. 규장각 검서관으로 일하던 그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서들을 참고하여 1784년 발해 역사를 편찬하며 남북국 시대라고 정의했다.
‘발해사’가 아닌 ‘발해고’라고 적어야 했던 유득공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속절없이 당할 지도 모르는 우리들은...
아직도 발해를 꿈꾸고 있는가?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