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애는 시간의 처음과 끝을 되풀이하는 수레바퀴다. 지금 또 다시 시간의 끝을 맞이하고 있지만, 끝은 바로 처음의 출발점이요 종착역이다. 고로 처음과 끝은 같은 것이니 어느 것에 무게를 더 둔다한들 무슨 상관이랴. 매년 연말이면 언론사에서는 한 해 동안의 빅뉴스를 선정한다. 매일 처음과 끝을 반복한 기억속의 시간들을 끄집어내 이미 잊혀 졌을지도 모를, 아니 잊고 싶어 하는 사건들까지 속속 끌어내는 일이다. 전 세계와 우리나라 뉴스, 그리고 지역 뉴스까지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파노라마처럼 스쳐갈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역사와 시간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마지막 남은 잎 새를 보고 슬퍼하거나 존재의 이유 또는 인생의 무력함에 몸을 떠는 사유의 동물이 인간이다. 마지막 잎 새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순회임을 모르는 바 아닐진대. 지나간 시간들을 백지위에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무엇을 그릴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릴 것이 없다. 그렇다고 다가올 시간 역시 마땅히 그릴 것이 없으니 이를 어쩔까. 무상무념(無想無念). 몸도 마음도 비워야 건강하거늘, 정작 우리는 채우지 못해 발버둥치는 소유의 노예가 되어 온갖 영육의 질병
용인신문이 창간 17주년과 지령 800호 기념으로 용인시의 문화예술정책 방향을 진단한다는 주제로 지역 전문가들을 초청해 토론회를 가졌다. 가장 뜨거웠던 이슈는 가칭 용인문화재단 설립에 대한 필요성 여부였다. 급속한 도시화 등에 힘입어 지난 10여 년간 지역문화예술계 역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고, 시민들의 욕구 또한 갈수록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단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된 이유를 분석하면, 가장 큰 이유는 현 문화예술 행정시스템으로는 지역 문예진흥이 역부족이란 점이다. 물론 다른 지자체에서 보여준 문화재단의 폐해 때문에 여전히 부정적인 시각도 적지 않았다. 기구의 독립성 확보와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실질적 도움이 안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수많은 지자체들이 예술행정에 민간참여를 늘리고 있고, 일정 부분은 민간에게 넘기는 게 시대적인 추세라고 한다. 따라서 용인지역에서도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문화재단이나 지역문화예술위원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다만 민간의 역량을 어떤 방법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실제 용인시도 각종 공연시설이 늘어나면서 다른 지자체들처럼 문화예술분야에 비공무원들이 수혈되고 있다. 하
풀뿌리 민주주의의 바로미터인 지방자치제. 과연 이 땅의 주민자치가 올바로 실시되고 있을까. 우리나라 지방자치제는 격변기에 태어났기 때문인지 반세기가 지났어도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폐지론까지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자치제는 1948년 제정된 초대 헌법부터 명문화된 제도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불안정한 사회분위기를 내세워 첫발도 떼지 못한 지방자치법을 개정, 보류시켰다. 첫 시행은 한국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2년도였다. 그것 역시 이승만 정권이 재집권을 위한 전략적 시나리오였다. 재집권에 성공한 이승만 정권은 제2차 지방자치법 개정안을 모색한다. 이유인즉, 지방의회가 지방자치단체장에 대해 잇따라 불신임을 결의해 단체장들이 고유 업무에 차질을 빚는다는 것. 그때도 단체장과 의원들 사이에 청탁이나 이권거래가 성했던 모양이다. 이승만 정권은 1956년 2월 지방자치법을 개정했지만, 5개월 만에 또다시 개정한다. 야당이 승리할 경우 최고 권력자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불과 2년 후인 1958년 12월에도 자치단체장을 임명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구축을 위해 지방자치법이 개정된다. 지방자치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
몇 달 전 용인지역 선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예강환 전 용인시장을 만났다. 기자는 예 전시장이 현직에 있을 때 용인시청 출입 기자였고, 그 시절에도 술자리를 했던 기억이 있어 매우 반가웠다. 예 전시장은 관선시절 용인군수를 지냈던 경력이 있었고, 민선시장까지 역임했다. 그러니 용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 고향이 용인이 아닌 화성이라는 것 때문에 선거철마다 묘한 텃새에 시달려야 했고, 선거에서 떨어지면 화성으로 갈 사람이라는 정치공세를 받아야만 했다. 선거철엔 없는 사실도 만들어내는 판이니 지역출신인 다른 후보들에겐 호재였을 것이고, 본인에게는 어쩌면 악재 중 악재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선거이후엔 그의 거취에 관심을 두었던 정객들도 적지 않았을 터이다. 과연 예 전 시장이 용인에 계속 살 것인지 아닌지를. 예 전시장이 야인으로 돌아온 지 그로부터 거의 10여년이 되어가지만, 그는 여전히 용인에 살고 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시민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현직 시절에도 조깅을 즐겨하던 그였기에 물어보니 예전만큼은 못해도 여전히 운동을 좋아한단다. 불과 10년 전만해도 당적 변경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철새 정치인, 지역정치인이 아
용인에서 약천 문학제가 열렸다. 약천(藥泉)이란 말은 물론 용인과 약천의 연계성이 낯설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향토사에 관심이 있든 없든 지역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라는 시조는 많은 국민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시조 작가가 바로 조선 후기의 문신인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이다. 약천 문학제가 용인에서 열린 이유는 선생이 오랫동안 용인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약천 묘소와 사당(별묘)도 용인에 있고, 의령 남씨 문충공파 후손들도 용인에 많이 살고 있다. 약천문학제를 준비한 용인문학회는 시를 쓰며 문청을 자처하던 기자가 1996년 지역문인들과 함께 창립한 향토문학단체다. 이후 10년 넘게 용인문학 신인상 공모전, 용인문학 아카데미 시창작반, 용인시 문학의 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나름대로 지역문학운동을 펼쳐왔다. 그렇지만 기자를 비롯해 지역문인들은 향토문학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뿌리가 있어야 현재와 미래가 있다는 나름대로의 원죄의식 같은 마음을 가졌던 탓일까. 몇 년 동안의 숙고 끝에 약천 남구만 선생을 기리는 문학제를 기획 추진하게 됐다. 다행이 약천 선생 후손들이
한국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또 실패했다. 최근엔 해마다 고은 시인이 노벨상 후보자로 올랐던지라 많은 국민과 언론의 실망 또한 클 것이다. 그런데 기자는 노벨문학상 발표 때마다 한국문학이 정말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한다. 솔직히 회의적이다. 그렇다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문학이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소통되고 있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문학이 올바로 번역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동안 한국문학을 올바로 세계에 소개할 번역가조차 체계적으로 양성하지 못했다. 그만큼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수준은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지난 2001년 설립된 한국문학번역원은 8년간 26개국 언어로 380여 권의 한국문학을 해외에 소개했다. 그런데 두 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일본은 1945년부터 무려 2만 여종의 문학작품을 번역해 해외에 소개했다. 그만큼 국가 차원의 전략적 작품 번역 지원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또한 전문가들은 우리의 문화와 한글을 잘 이해하는 수준 높은 현지 번역가 양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문자의 힘은 무한한 상상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우
가을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요즘엔 산행 못지않게 자전거 열풍이 뜨겁다. 지난 주말엔 기자도 처인구 운학동부터 포곡읍 에버랜드까지 자전거를 탔다.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들 명수와 함께 물길을 따라간 운행거리는 총 43km 였다. 자동차 거리로야 얼마 안 되지만, 마라톤 풀코스 42.195km와 100리(40km)길 보다는 먼 거리였다. 자전거 전문가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겠지만, 초보자 아빠와 초등학생 입장에서는 체력보단 마음의 용기가 더 필요했던 게 사실이다. 다행히 청명한 가을 하늘과 풍요로운 들녘, 그리고 색색의 코스모스 길을 달리는 기분은 정말 운치 있었다. 그 덕분에 체력 부담감도 상당부분 줄었고, 또 다른 용기와 희망까지 갖게 되었다. 우리는 운학동 내어둔 마을의 집을 출발해 하천변 자전거 길을 탔다. 마평동을 경유한 후 고림동 이삭아파트 주변의 시골길과 하천변을 달렸다. 고림동 외곽을 지난 후에는 포곡읍 금어리~둔전리~전대리 에버랜드 앞길까지 갔다가 유방동~김량장동~역북동에 있는 용인신문사까지 갔다. 다시 김량장동~남동~운학동을 돌아 무사 귀환했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엔 분위기 있는 포시즌(중국음식점)에 들러 다른 손님들이 타고
1900대초에는 전 세계적으로 독감이 대유행 했다. 전염병과 역병 연구자들은 1918년 가을부터 1919년까지 독감 사망자가 무려 2000만 명에서 1억 명이 될 것으로 추정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전쟁이란 죄악을 저지른 인류는 결국 인플루엔자(돌림고뿔)라는 대재앙을 맞이했고, 급기야 식민지 조선까지 덮쳤다. 일본은 2100만 명이 감염되어 26만 명이 사망했고, 조선은 740만 명이 감염되어 14만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구 비율로 본다면 주거환경을 비롯해 위생과 영양상태가 열악했던 조선이 더 많은 사망자를 낳았다. 흑사병은 대륙과 세기를 뛰어넘어 창궐했었고, 독감 변종 바이러스는 현대 과학문명의 이기를 심판이라도 하듯 현재 진행형이다. 일명 돌림고뿔이란 감기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인류는 또 다시 신종인플루엔자 위기를 맞았다. 과거의 독감 기록들에 비하면 최근 신종 플루 발생자와 사망자수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낮은 수치다. 그리고 발병원인도 몰랐던 과거와는 달리 예방백신과 치료약이 개발되어 있는 만큼, 보건당국의 관리대처 능력이 관건일수도 있다. 지난 2005년 9월말, WTO는 조류독감 변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인
14세기 중세 유럽사회를 붕괴시킬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던 흑사병. 당시 사람들은 흑사병이 왜 생기는지 몰랐다. 막연하게 거지, 유대인, 한센병 환자, 외국인들이 흑사병을 몰고 다닌다고 믿었다. 그래서 죄 없는 그들을 집단폭행하거나 학살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흑사병은 박테리아의 일종인 예르시니아 페스티스가 원인균이다. 이 균에 감염된 쥐의 혈액을 먹은 벼룩이 사람의 피를 빨면서 병을 옮겼다. 다음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글이다. “매일 밤낮으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머지않아 온 땅이 묘지로 덮이리라. 나, 아그놀로 디 투라 또한 다섯의 아이들을 내 손으로 묻었다. …… 이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며 사람들은 세상의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흑사병은 14세부터 17세기까지 창궐했고, 18세기에도 이어졌다. 1940년에는 중국 동북부의 농안과 장춘에서도 발생, 731부대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에서 창궐한 흑사병 희생자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사망율을 기록했다. 14세기 유럽의 흑사병 희생자는 총 7500만 명에서 2억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유럽 인구의 절반이 감소한 셈
“당신은 민주주의입니다. / 어둠의 날들 / 몰아치는 눈보라 견디고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 몇 번이나 죽음의 마루턱 / 몇 번이나 그 마루턱 넘어 / 다시 일어서는 목숨의 승리입니다. / 아 당신은 우리들의 자유입니다. 우리입니다. // 당신은 민족통일입니다. / 미움의 세월 / 서로 겨눈 총부리 거두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것 / 그 누구도 바라마지 않는 것 / 마구 달려오는 하나의 산천입니다. / 아 당신은 우리들의 평화입니다. 우리입니다. // 당신은 이제 세계입니다. / 외딴 섬 아기 / 자라나서 겨레의 지도자 겨레 밖의 교사입니다. / 당신의 고난 당신의 오랜 꿈 / 지구의 방방곡곡 떠돌아 / 당신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입니다. / 아 당신은 우리들의 내일입니다. 우리입니다. / 이제 가소서 길고 긴 서사시 두고 가소서.” 고은 시인이 쓴 故 김대중 대통령 추도시 “당신은 우리입니다” 전문이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세계적 지도자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역사의 파노라마를 한 생애에 고스란히 반영시켰던 큰 별. 그 역사의 주인공을 떠나보내는 국민들의 마음은 정치노선을 떠나 모두가 안타깝고 침통할 따름이다
용인의 정체성 확립의 길은 오래 전부터 용인지역 문화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기자를 가장 놀라게 했던 것은 석축 원형이 많이 남아있는 할미산성이었다. 언젠가는 한 여름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할미산성을 둘러봤고, 비를 피해 산불감시탑 밑에서 커피를 마시던 추억은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가을엔 잘 여문 알밤이 산성위로 쏟아져 산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용인의 산수이야기 저자인 이제학 선생을 중심으로 만들었던 모임仙이 산행의 주인공이었고, 그렇게 2년쯤 카메라를 들고 따라다니다 보니 웬만한 용인의 산하는 거의 다 돌아볼 수 있었다. 그때서야 용인의 아름다움을 느꼈고, 그 중에서도 석성산과 할미산성, 그리고 처인성이야말로 진정한 용인의 보배임을 깨닫게 됐다. 석성산은 용인의 진산으로 예로부터 국가의 중요 통신수단이었던 봉화대가 있었던 곳이다. 아직까지 성곽 흔적들이 존재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옛 봉화대 역할을 하는 군 통신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석성산에서 내려와 영동고속도로를 건너면 바로 할미산성에 오를 수 있다. 인근 기업체의 토지가 포함되어 있던 탓인지 사람들의 출입이 많지 않았고, 천년이 넘는 세월에 성곽은 많이 무너져 내렸지만 흔적만큼은 고스란히
입추가 지났고, 휴가철도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여름휴가 때문에 영동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몸살을 앓았지만, 아직도 휴가를 못 갔거나 미뤄둔 시민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기자는 시간과 돈이 가장 적게 드는 휴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때마침 용인역사기행에 대한 용인시 홍보자료를 보면서 이글을 쓰게 됐다. 기자가 몸담고 있는 용인신문사(구 성산신문시절)에서는 90년대 초반부터 꽤 오랜 시간을 향토문화유적 답사단을 운영해왔다. 향토사학자들이 동행했던 답사단은 참가자들의 회비와 신문사 지원으로 운영됐고, 답사 결과물들은 신문에 연재해 널리 알렸다. 그리고 문제가 있는 문화재 주변 환경은 행정기관에 건의를 했고, 이후 즉각적인 시정조치까지 이뤄졌으니 문화재 보호 역할까지 겸했던 것이다. 그 후엔 본사 주도로 용인향토문화지킴이 시민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뜻있는 분들이 명맥을 잇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만큼 용인지역엔 향토문화유적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최근 10년간 급격한 개발로 용인의 지도가 바뀌면서 각종 문화재의 위치조차 찾아가기 힘든 실정이다. 그래서인지 원주민들조차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환경의 변화 탓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