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주당과 유한규 합장묘 이사주당기념사업회에서 묘소를 찾아가는 가을여행 귀천 차별없는 인본주의 학자 [용인신문] 모현읍에 세거했던 소론계 경화사족 진주류씨 목천공파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로 태교신기 저자 이사주당을 비롯해 그의 천재 아들 유희를 꼽을 수 있다. 천재적인 이들 두 모자지간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언급이 있었지만 사주당의 남편인 목천공파 파조인 애오자 유한규(1718~1783)에 대해서는 언급된 바가 없다. 최근 그의 아들 유희가 쓴 황고가장이 완역됨으로써 다소간의 실체가 드러났다. 유한규는 규합총서를 쓴 빙허각이씨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유한규 또한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우선 훌륭한 인품과 성격이 돋보인다. 자신의 재예를 남들에게 자랑하기 꺼려했으며 미천한 사람이 찾아와도 홀대하지 않고 깊이 이해해주었고, 상벌은 정확했다. 일을 추진함에서도 치밀, 신중했다. 유한규는 학문과 사상에도 뛰어나 성리학은 기본이고 수학에 뛰어났으며 온갖 잡학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유희는 아버지의 학문에 대해 ‘문학에 깊고, 백술(百術)을 꿰뚫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한규는 시와 서예, 음악도 출중했지만 특히 이과 방면에 소질이 뛰어났다. 총명해서 한번
팔굉일우 뜻 ‘온 천하가 한 집안’ 일제 침략 전쟁 합리화 위한 포석 팔굉일우비석 양지초에 자리잡아 우리의 부끄러운 단면 생생 전달 [용인신문] 지난 2008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양지초등학교 운동장의 일부가 포함된 도시계획도로 개설공사 중 담장 앞 도로공사를 위해 학교 놀이터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양지현감을 지낸 ‘현감 송공병준 선정비’와 그의 아들 송종헌의 장수를 바라는 ‘백작 송종헌 영세기념비’ 등 두 개의 공덕비가 발견됐다. 이어 송종헌이 글씨를 쓴 팔굉일우(八紘一宇)비가 학교 운동장에서 비슷한 시기에 발견됐다. 일진회 총재며 정미칠적 가운데 한명인 송병준(1857~1925)은 이완용과 함께 대표적인 친일 민족반역자다. 송병준은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의 조선침탈에 협력했으며, 일진회를 이끌며 고종의 퇴위와 한일합병을 적극 추진한 대표적인 친일파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10여 일 전에 이용구와 함께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할 것을 제창하는 ‘일진회선언서’를 발표했다. 1907년 6월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뒤 당시 농상공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고종에게 양위를 강요해 퇴위시켰으며, 1909년 2월 내부대신에서 물러나 일진회의 총재가 됐다.
사진 출처 : 이인영 편저 효제충신의 고장 용인 '삼강행실록' 백암면에 있는 열녀 연안이씨 정려각(사진 출처:이인영 편저 효제충신의 고장 용인 '삼강행실록') 연안이씨 열녀비 열녀 연안이씨 명정 현판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 열녀가 됐다. 모현면 일산리에 있는 열녀 강화최씨 묘문비(좌측)와 정려비(우측) 용인지역에 30여명의 효부·열부… ‘남존여비’ 구시대 유물 치부 유실 [용인신문] 용인이라는 지명이 생긴지 600년이 넘었지만 기록에 남아있는 대부분 인물은 남성들이다. 용인의 여성 인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대적으로 조선시대에 효부를 비롯해 열녀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혼인 후 남편, 시부모 봉양이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들에게 조정에서 내려진 정려문이나 정려각, 열녀각, 열녀비 등이 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그러나 현시대와는 맞지 않는 버려져야 할 구시대 유물로 간주돼 건설 공사 등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고 남아있더라도 자리가 옮겨지는 경우가 있어 위치를 찾기조차 어렵다. 열녀는 조정이 개입해 규범을 전파시킨 것으로 오늘날 양성평등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극도로 불평등한 조선 여성들의
금양계 표석 선영입구 표석에는 기존 표석의 글자가 마모돼 다시 세웠음이 기록돼 있다. 전면에 연안이씨선영입구 각인 뒷면은 유래 적혀있어 [용인신문] 금표는 왕릉이나 태실, 사패지를 벌채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출입을 금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표석이다. 황당한 금표비도 있으니 고양시에 소재한 연산군 금표비는 자신의 위락을 위한 사냥터 표석으로 무단 침입자는 처벌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용인에 조선시대 금양지와 관련된 중요 자료인 금양계 표석이 남아있다. 금양계는 연안이씨 선산의 출입을 금하는 표석으로 이동면 서리 불당골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이곳에는 두 개의 표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하나는 금양계(禁養界) 표석이고 나머지 하나는 연안이씨선영입구 표석으로 여름에는 풀숲에 덮여져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금양계비는 용인에서는 유일한 표석이며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중요한 유물이다. 금양이란 나무나 풀을 베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며 출입을 금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비는 연안이씨 문중에서 선산을 수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침범해 훼손하지 말라는 뜻으로 세워졌다. 표석은 화강석으로 돼 있다. 금양계라고 음각돼 있는 뒷면에는 ‘용인군이동
[용인신문] 용인시가 126년 만에 ‘건지산 봉수’의 원위치를 찾았다. 시는 처인구 원삼면 건지산에서 1895년 이후 멸실된 것으로 알려진 건지산 봉수의 흔적을 발견했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한양에 알리는 국가통신제도다. 조선 초 세종 때 설치된 뒤로 1895년(고종 32년) 공식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약 450년 간 사용됐다. 건지산 봉수는 조선의 5개 봉수 노선 중 부산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2거 직봉(直烽) 노선의 42번째 내지봉수로, 안성 망이산 봉수에서 신호를 받아 처인구 포곡읍 석성산 봉수로 신호를 전달했다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기록돼 있다. 봉수 제도가 사라진 후에는 멸실 돼 건지산 정상 부근에 있었다고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이에 시는 지난해부터 현장답사를 진행했고, 지난달 22일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이번에 확인된 건지산 봉수터는 건지산 정상에서 남서쪽 아래 약 300m 거리의 능선에 위치한다. 돌과 흙을 이용해 긴 타원형으로 방호벽을 쌓았으며 길이 38m, 폭 16m, 둘레 80m의 평균적인 내지봉수 규모다. 내부에서는 아궁이·굴뚝시설인 연조 5기의 흔적이 모두 확인됐으며, 출입구는
1974년 일본인이 찍은 사진으로 멱조현터널 북측(동백지구방향) 입구사진. 멱조현터널 북쪽 입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사진.(정양화 교장 촬영) 멱조현터널 정상부 화운사 표석 지하에 터널이 매몰돼 있다. 용인중앙시장 도시락카페 내에 설치된 수여선 지나던 길을 알리는 안내판 풍림아파트 뒷편에 남아있는 수여선 교각 일부 화분뒤에 숨어있는 수여선 지나던 길 안내 표지판 광복 후 한때 낭만을 실어나르던 수여선의 추억 수원~용인~이천~여주 73.4㎞구간 ‘꼬마열차’ 현재 협궤철도용 터널, 덕곡·멱조현터널이 유일 동쪽 입구 발굴 ‘수여선 철도 기념관’ 재탄생 필요 [용인신문] 수탈의 도구였던 수여선(수려선)은 광복 후 한때 낭만적 추억이 깃들어 있기도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수탈을 목적으로 건설된 근대사의 아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문화유산이다. 용인은 협궤열차 수여선이 통과하던 지역이었다. 수원을 출발해서 용인, 이천을 거쳐 여주에 도착하는 총 연장 73.4㎞의 꼬마열차로 불리던 수여선은 1972년 4월 1일 폐선 됐다. 광복 이후 국유화 돼 운영되다가 교통의 발달로 사라져버린 수여선. 그러나 현재 국내 철도터널 가운데 협궤철도용 터널로는 수여선의 덕곡터널(기흥구 태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