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處容)이 주는 친근함을 가진 세대들이 영어에 덜 노출됐다면 무슨 얼토당토 않는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다. 언어와 비문학으로 국어를 나누어 시험보는 현행 입시제도에서 처용가를 배우는 학생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필자는 고등학생 시절에 유난스럽게 고전문학을 좋아했다. 마음껏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의 여백을 혼자 즐길 수 있었던 이유 때문이다. 처용가를 배우던 날, 자신의 아내와 몰래 잠자리를 하고 있는 외간 남자를 용서하는 내용에 대해 미친거 아닌가요라고 말했다가 선생님으로부터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 14수를 다 외우라던 벌을 달게(?) 받기도 했으니. 그렇다면 한번 상상력을 발휘해서 처용이 살았던 9세기 말 신라로 가보자. 헌강왕이 동해안 개운포(지금의 울산 부근)에 놀러 갔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길을 잃었는데, 일관(점을 치는 관리)의 말인즉, 동해바다 용의 훼방이니 좋은 일로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근처에 절을 짓고 복을 빌라는 명령을 내리자 즉시 구름과 안개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동해 바다 용이 기뻐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놀다가 그 중 한명이 왕을 따라 경주에 와서 급간의 벼슬을 받았다. 왕이 미녀를 아내로 맞게 해주
미련 곰탱이와 까칠한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겠다고 환웅을 찾아온다. 경쟁자인 호랑이가 사라진 상태에서도 곰은 21일을 먹고서 여자의 몸으로 변한다. 13세기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등장한 마늘의 효능은 경이로울 뿐이다. 그래서일까 현재에도 마늘은 건강을 위해 매우 소중한 밥상의 찬거리다. 마늘과 함께 있는 고추는 어떠한가. 16세기 중반에 포르투갈인이 일본에 전래한 것으로 알려진 고추는 1592년 임진왜란 중에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고추를 왜겨자라고 쓰고 있다. TV에서 김치냉장고를 광고하는 모델들이 아삭 하고 맛있게 먹는 빨간 김치의 역사는 17세기에 시작된 것일까? 빨간 김치는 아니지만 하얀 김치는 고려의 이규보가 남긴 동국이상국집에 염지(鹽漬)라고 표기한 것으로 볼 때 예전부터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초반에 딤채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구개음화 현상으로 김채로 변하여 발음하기 좋은 김치로 불려졌을 것이다. 김치의 어원이 소금에 절인 채소의 의미로 본다면 17세기 이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선조들은 싱싱한 김치보다는 푹 절여진 김치를 먹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배추를 소금에 절여서 먹었을까? 저장 기술이
진덕여왕 때에 알천임종호림술종유신염장이 남산 무지암에 모였다. 이때 호랑이가 나타나 좌석 가운데로 뛰어들자 모두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은 태연히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메어쳐 죽였다. 알천의 힘이 이와 같으므로 회의의 첫 자리에 앉았으나, 사람들은 모두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로 신라 최고의 귀족들이 회의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신라에는 성스러운 장소가 네 곳이 있어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대신들이 그곳에 모여 의논하면 반드시 순조롭게 이루어졌다라고 써있다. 이 성스러운 장소들이 동쪽의 청송산, 남쪽의 무지암, 서쪽의 피전, 북쪽의 금강산이라고 밝혀놓고 있다. 화백이라는 회의의 명칭은 중국의 신당서에 최초로 나타나는데, 통일 신라 이전에는 다르게 불렀을 수 도 있다는 의미이다. 회의 장소가 대부분 산봉우리,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개최한 것으로 볼 때 아주 오래전부터 신성시 된 곳이다. 이는 부족사회의 공동집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6촌(村)락에서 출발한 신라가 어느 정도의 독립된 세력으로 성장하는 과정인 6부(部) 사회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하나라도 반대하는 세력이 나타나면 국가의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 식민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단 한차례이다. 1910년부터 1945년 일본의 지배를 받은 시기 뿐이다. 하지만 좀 더 냉정하게 보자면 1945년부터 1948년 까지 미 군정의 지배를 받은 것과 고려말기의 원 간섭기도 식민지와 비슷한 경험이다. 중국 왕조에 대해 사대는 했어도 정치구조의 완전한 형태로서의 지배는 한족이 아닌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시기가 최초였다. 역사교과서에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와 자주성에 많은 손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지만 이건 식민지배를 받았다는 뜻의 온건한 표현일 것이다. 요즘 방송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무신]에서 장엄한 전쟁처럼 그려지고 있지만 몽골의 침략에 맞선 것은 고려의 군대 보다는 일반 민중의 처절한 생존싸움이었다. 1231년 살리타의 침입으로 시작된 몽골의 공격은 28년간 7번 동안이나 계속됐다. 강화도에 갖혀 있던 고려의 고종이 1259년 태자를 인질로 보내는 항복의 조건으로 전쟁은 끝났다. 인질로 갔던 태자가 귀국하여 원종으로 즉위한 시기에는 항복은 했지만 원의 직접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이후 벌어진 개경환도와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과정에서 원나라는 다루가치를 설치한다. 다루가치란 진압하는 자라는 의미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원리를 통달 하였고 오묘한 꾀는 땅의 이치를 꿰뚫 었으며 전쟁에서 이겨 공 또한 이미 높으니 족한 줄을 알고 그만 돌아감이 어떠한가 612년 살수대첩의 주인공 을지문덕이 수나라 사령관 우중문에게 보낸 [여수장 우중문시]로 현존하는 최고의 시 다. 이 시는 문학사적 뿐만 아니라 수준높은 문장으로 을지문덕 장군이 문(文)과 무(武)에 능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최대의 승전이었던 살수대첩 당시 고구려의 총사령관 을지문덕은 누구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는 것이 없다.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 태어난 곳은 어디인지, 부모는 누구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남북조 300년 분열을 통일한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을지문덕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했던 것으로 볼 때 612년 이전부터 중국에는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의 113만 대군이 요동으로 진군할 때 고구려가 전개한 수성전(守城戰)지구전(持久戰)유인전(誘引戰)기습전을 지휘한 을지문덕의 출신은 어디일까? 단일민족을 강조했던 그간의 역사 교과서에서 금기시 했던 을지문덕의 이민족 출신설에 대해 추론해 보련다. 북송의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
반정(反正)은 바른 상태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으로, 조선은 중종 반정과 인조 반정 등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는 반정인가? 아니면 성공한 쿠데타인가? 세조 즉위가 왕권강화의 명분을 가졌다면, 그 이후의 과정을 살펴보면 된다. 단종이 어린 12살의 나이여서 왕권이 약화되었다라고 하는 의미는 조선의 국가시스템을 이해 못한 때문이다. 종친의 정치 참여를 엄격하게 금지시킨 태종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사적으로 숙부지만, 공적으로는 단종의 신하였던 수양대군이 왕권강화를 위해 국왕이 임명한 정승들을 몰살시킨 것은 정권찬탈을 위한 것이다. 특히 김종서와 황보인은 문종의 고명을 받은 대신이었다. 백번 양보해서 왕권강화를 위한 것이었다면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수양대군은 15살의 단종을 협박할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종친으로 물러났어야 하는 것이다. 국법을 어기며 즉위한 세조의 정치가 공포정치와 측근에 대한 전폭적인 권한 위임으로 이어진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세종과 문종 시절에 임금에게 충성하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조선의 엘리트 들은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유교적 신념을 추종하는 이들과 권력의 단물
한여름 뙤약볕 아래 담배 밭고랑에서의 작업은 학생들에게 피하고 싶은 작업 중의 하나였다. 대학시절 농촌봉사 활동을 여러 번 경험한 필자에게도 독한 담뱃진과 땀방울이 범벅된 담배잎 따기는 힘든 노동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수확의 고단함이 있지만 수입의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농촌의 효자 작물로 널리 재배된 담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옛날 같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통해서 전래된 것이므로 생각만큼 옛날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풍습은 언제쯤 정해진 것일까? 18세기 조선의 세시풍속이 기록된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비천한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고 되어있다. 또 거리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거나 높은 관리가 행차할 때 피우면 엄한 치죄를 받는다고 되어있다. 기록으로 볼 때 이러한 풍습들은 전래 직후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예절의 유래를 보면 조정에서 어전회의를 할 때 신하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연기가 높은곳으로 올라가 임금에게로 가는 바람에 금지 시켰다는 것과 담뱃불씨로 인해 곤룡포가 타게 돼서 임금앞에서 피우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담배가 들어와 확산되던 시기는
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군대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을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전라도 사람에게는 깽깽이, 경상도 사람에게는 보리문둥이라고 통칭하는 말 등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지역감정 요소에다, 군대가 지닌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의 특성이 수반된 집단적인 냉소가 결합된 폭력적 언어로 받아 들여졌다. 고참이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특정 지역 출신은 군생활이 매우 괴롭던지, 꽃피던지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필자의 군대생활 장소가 경상도 바닷가라서 그런지 영남지역 출신들이 많았던 내무반에서 자주 들렸던 문둥이 가스나의 표현이 몹시 거슬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왜 경상도 사람들을 문둥이라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나병(한센병) 환자가 경상도에만 유독 많았던 것은 아닐 테고, 환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격리됐던 것은 일제식민지 시절부터 알려진 전라도의 소록도로 알고 있었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경상도 사람들은 문둥이란 표현을 싫어할까? 도대체 경상도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문둥이라고 부르며, 그 말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문둥이 앞에 보리란 수식어가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조선후기 사회에서 영남 지역을 이해해야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이 수없이 자살했다. 이들은 목을 매 죽거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얼마나 포로로 끌려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이 땅의 여인네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대략15~30만명)가 귀환한 2만 5000여명 중 상당수가 자살했거나 자살을 시도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이들은 고향사람들의 경멸과 가족의 비난을 견딜 수 없었다. 조선 땅엔 전쟁이 끝나고 나면 으레 여성들의 자살이 뒤따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현지처 노릇으로 목숨을 부지한 여성들, 병자호란 후 살아 돌아온 여성들에게는 자살이 강요됐다. 돌아온 여성들에게는 환향녀((還鄕女)란 이름표가 붙었다. 이 말은 '화냥년'이란 말로 변하면서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란 의미가 덧붙었다. 여성들은 이른바 남성 중심의 가문과 정절의 이름으로 처단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여성의 정조를 사회문제로 대두시켰다. '열녀 이데올로기'에 숨은 폭력성의 절정은 자신들의 잘못을 엉뚱한 것으로 몰아가려는 왕조와 사대부들의 파렴치였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왕조와 집권 사대부는 엎드려 사죄했어야 했다. 왕조와 사대부들은 사죄는 커녕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며 자살을 방조하고 심지어 끊임
파란만장 했던 즉위식을 끝낸 광해군의 거침없는 개혁의 시작은 소득의 분배와 조세정의의 실현이었다.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은 각 고을의 진상(進上)과 공물이 관아의 방납인에게 막혀, 물건의 값이 3~4배 또는 수십 배에 이르며, 특히 경기도가 심합니다라며 공납 대신에 1결당 쌀12두 징수를 건의 한다. 광해군의 교지에 선혜(宣惠)라는 말을 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표현 그대로 왕의 결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임진왜란을 세자의 신분으로 백성들과 함께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고 극복한 광해군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623년 3월,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근거로 연합한 서인과 남인에 의한 인조반정의 근본 속셈은 과다 세금 징수를 자행한(?) 광해군에 대한 저항 이었던가? 반정공신 이괄은 1624년 1월에 군사를 일으켜 한양에 무혈입성 한다. 허둥지둥 공주로 피신한 인조와 서인정권과 반란군에 의해 궁궐이 점령된 미증유의 사태에도 평온한 백성들의 일상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대의명분은 물론 현실명분 조차도 갖고 있지 못한 서인 내부에서 벌어진 논공행상의 추악성을 조선 백성들은 이미 분명하게 파악한
오 룡 오룡아카데미 원장/ 용인여성회관강남대평생교육원 강사 용인신문 애독자들이여! 저 오룡이 이제부터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낄지도 모를 역사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제법 있어 보이는 발언인데 과연 얼마나 명확할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월이 약이다가 더 현실적인 발언이 아닐는지. 한국사에서 진정 성공한 개혁의 완성이 언제였던지 가물거리는데, 개혁은 시작과 동시에 조급해지고 피로감을 호소한다. 고정된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미래를 위한 명확한 아젠다 없이 개혁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한번 진정 과거를 이해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역사를, 과거의 전철(前轍)을 되풀이 않기 위해 참회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 적이 있었던가. 알량한 사료만을 외우는 앵무새의 역사가 아닌 장삼이사(張三李四)를 위한 교양 역사, 시대를 관통하고 흥분하는 풀뿌리 역사의 지평을 확대하고픈 욕심이 한껏 앞선다.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인문학으로서의 역사 인식 확대를 위해 날 선 출발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개혁은 지속될 것이고, 미래는 예측되며, 희망은 살아난다. 역사는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미래의 학문이다. 역사는 거울만이 아니라 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