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황혜경 나는 볼 수 없는 것 당신은 보고 있을 거예요 그쪽에서 꽃이 피고 있다고 하셨죠 못 본 꽃을 본 당신이 보여주세요 모르는 암흑이라서 당신 손을 잡아요 당신을 통해서 끝이라 쓰고 꽃이라 읽을 수 있어요 꽃이라 해도 끝이라 했던 내게 당신이 말을 할 차례니까요 당신이 본 것을 보여주세요 황혜경은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모호한 가방」 외 4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See」는 내가 본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당신에게, 당신이 본 것을 보여 달라는 요구 혹은 욕망이 드러난 시편이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암흑이라서 당신 손을 잡아야 하고 당신을 통헤서 꽃을 읽을 수 있지만 꽃은 꽃이 아니고 끝이다. 꽃이라 해도 끝이라는 내게 당신이 말을 할 차례니 당신이 본 것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사물의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라고 읽힌다. 문학과지성사 간 『겨를의 미들』 중에서. 김윤배/시인
꿈에 네가 나왔다 이수명 꿈에 네가 나왔다 네가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왜 누더기를 입고 있니 누더기가 되어 버렸어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는 날에는 누더기 옷을 꺼내 입는다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꿈속을 네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게 걸어가서 너무 쓸쓸해서 땅에서 돌맹이를 주웠는데 빛을 다 잃은 것이었다. 돌벽 앞에 네가 한동안 서 있었다. 나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다고 피하라고 했는데 너는 집을 나와서 천천히 산책 중이라고 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 아주 짧은 꿈이었다. 이수명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꿈에 네가 나왔다」는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혼재되어 있는 시로 읽힌다. 꿈에 나온 너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다. 날씨가 나쁜 날에는 몸을 똑바로 세울 수 없어서 누더기 옷을 입는다는 너다. 너는 꿈속을 아주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나는 너무 쓸쓸해서 돌맹이 하나를 주웠는데 돌맹이는 빛을 다 잃은 돌맹이였다. 너는 돌벽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네가 서 있는 돌벽이 무너질 것 같아 피하라고 했지만 너는 산책 중이라고 했다. 너는 아주 짧은 꿈속에 내게 왔다. 그러니 너는 내게…
비의 마중 김중일 어린아이가 무지개 우산을 쓰고 맞은편에서 동동 떠내려오듯 오고 있다 네가 비켜서는 방향으로 여러 번 가만히 멈춰선 아이의 우산은 비의 무릎 같다. 네 앞에 쪼그려 앉아 마치 너를 어린이처럼 내려다보는 키가 큰 비의 한쪽 무릎 같다. 너를 마중 온 비. 한쪽 무릎을 꿇고 우산도 안 쓴 너의 이마를 매만지는 비의 젖은 손가락. 너는 아이의 무지개 우산 위 공중에 목례를 하고 서둘러 마중 간다. 급히 챙긴 하나 남은 우산을 쓰고 갈 생각을 미처 못하고. 죽은 아이 마중 간다. 그동안 잃어버린 우산들을, 그렇게 모두 다 주고 돌아왔다. 김중일은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시인의 길에 들어섰다. 「비의 마중」은 세상을 떠난 아이에 대한 헌시다. 아이가 살아 있었을 때 화자는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들고 아이를 마주나가고는 했었을 것이다. 마중 나가 죽은 아이에게 그동안 잃어버린 우산들을 모두 다 주고 돌아오는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간『만약 우리의 시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중에서. 김윤배/시인
빛멍 이혜미 돌이켜 보아도 무례한 빛이었다. 최선을 다해 빛에 얻어맞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응고되지 않은 말들, 왜 찬란한 자리마다 구석들이 생겨나는가. 너무 깊은 고백은 테두리가 불안한 웅덩이를 남기고 넘치는 빛들이 남기고 가는 진한 발자국들을 따라,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를 따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일들을 공들여 겪으니 홀로 돋은 흑점의 시간이 길구나. 환한 것에도 상처 입는다. 빛날수록 깊숙이 찔릴 수 있다. 작은 반짝임에도 멍들어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을 때,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푸르게 떠오르는 잔영 속이었다. 이혜미는 1988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났다. 2006년 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다.「빛멍」은 빛에 대한 상념이고 빛에 대한 서사다. 빛에 얻어맞고 돌아오는 길의 빛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빛은 황홀하게 굴절하는 눈길의 영토이며 진한 발자국이며 흑점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환한 빛에 상처 입는다. 작은 빛의 반짝임에도 멍든다. 멍은 무수한 윤곽과 반점을 얻게 한다. 그 자리는 무심코 들이닥친 휘황한 자리였다. 눈을 감아도 떠오르는 잔영이었던 것이다. 문학과지성사 간 『빛
사랑의 역사 이병국 그녀가 머리를 헝클인다 내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그건 위로가 된다 자정을 모르는 이들처럼 마음을 매달고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다 방죽 위를 내달렸다 부당한 길의 시작이었으나 끝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병국은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2017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에 평론이 당선되며 문단생활을 시작했다. 「사랑의 역사」는 저질렀으나 아무렇지 않았다는 고백체의 시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그 떨림과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시인의 일요시집3 『내일은 어디쯤인가요』 중에서. 김윤배/시인
풀잎 조창환 풀잎들이 몸을 비튼다 시멘트 틈바귀를 비집고 나와 여리고 새파랗게 하늘거린다 이슬 묻은 바람이 쓰다듬어주고 보석 같은 아침 햇살이 내려 쪼인다 한 파도 뒤에 다른 파도 밀려오듯이 한 바람 뒤에 다른 바람 밀려와 풀잎에 얹힌 황사 쓸어내린다 풀잎에서 여치 울음소리가 난다 세상은 역병으로 뒤덮였는데 풀잎에는 이슬 자국이 영롱하다 조창환은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73년 『현대시학』으로 문단에 나왔다. 「풀잎」은 생명의 시다. 그리고 서정이 넘치는 시다. 시멘트 틈바귀를 비집고 나온 여리고 새파란 풀잎은 세상의 역병을 이기고 풀잎의 세상을 이루어 갈 것이다. 시인은 풀잎에서 세상의 생명을 일궈내는 것이다. 서정의 서정 3 『나비와 은하』 중에서. 김윤배/시인
스타벅스·모비딕 려원 커피잔 속 모비딕 슈핑크림 연애처럼 소용돌이쳐요 머리가 흰 수염 고래로 주세요 빨리 하얘지고 싶어요 출렁이는 언어는 이제 감당 못 해요 태평양을 건너는 동안 고래들은 얼마나 수다스러웠을까 연애를 마시는 동안 포경선 피쿼드호 대항하는 모비딕 스타가 될 수 없는 나는 흰고래 수염을 마셔요 려원은 2015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했다. 「스타벅스·모비딕」은 스타벅스에서 마시는 커피를 모티프로 쓰인 시로 읽힌다. 모비딕은 허먼 멜빌의 대표작이다. 우리나라에는 『백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인간과 고래의 사투를 그렸다. 시인의 상상력은 태평양과 고래와 포경선 피쿼드호에 이른다. 그러나 시인은 스타가 될 수 없다고 자탄한다. 상상인 시인선 009 『그해 내 몸은 바람꽃을 피웠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무화과 이재무 술안주로 무화과를 먹다가 까닭 없이 울컥, 눈에 물이 고였다 꽃 없이 열매 맺히는 무화과 이 세상에는 꽃 시절도 없이 어른을 살아온 아들이 많다 이재무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1983년에 시단에 나왔다. 「무화과」는 속꽃으로 열매를 맺는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꽃 없이 열매 맺는 과일로 보인다. 그 무화과를 먹다가 시인은 까닭 없이 울컥 눈에 눈물이 고인다. 아니다. 까닭이 없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무화과와 같은 군상들이 얼마나 많은가. 꽃 시절 없이 어른으로 살아온 아들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아들들 속에 시인 자신도 있는 것이다. 시작시인선 409 『즐거운 소란』 중에서. 김윤배/시인
남겨진 사람들 심춘자 터널 속 어둠처럼 긴 현실 슬픔은 그날 그대로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아내는 남편을 잃고 딸은 아버지를 잃고 삶이 무너졌다 아침엔 눈이 또 떠졌다 심춘자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났다. 2018년 『문학사랑』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다. 「남겨진 사람들」은 우리들의 일상의 삶에서 겪게 되는 비극적인 상황을 묘사한 시다. 슬픔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이어서 울컥울컥 피를 토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삶이 무너져도 아침엔 또 눈을 뜨는 것이다. 그게 가혹한 우리들의 삶이다.
설해 이수진 우리가 원망이 되더라도 우리가 잘 안 풀리는 문제로 남더라도 우리가 태양의 죽음을 살더라도 세상에 미로는 없는 거래요 격(格) 으로 들어와서 격(格)으로 나가는 거래요 잘못 들어선 길도 가다가 포기한 길로 모두 출격(출格)인 거래요 이수진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2009년 『현대시』롤 문단에 나와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설해」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시다. 원망되더라도, 잘 안 풀리는 문제로 남더라도 마침내, 태양의 죽음을 살더라도 세상을 격조 있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타이른다. 세상에 미로는 없는 거라고 깨우친다. 김윤배 시인은 충북 청주 출생으로 1986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고, 현재 《용인문학》 편집고문입니다. 시집으로 『떠돌이의 노래』, 『바람의 등을 보았다』 『내 생애는 늘 고백이었다』 등 16권이 있습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