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인성 오룡의 역사 타파(99) 죽주산성과 처인성엔 바람보다 햇살이 먼저 닿는다 - 한없이 단순한게 삶이요, 순결하지 못한게 역사다 저 먼 북쪽에서 노도같이 달려 올 몽골의 기마병은 사라졌다 8백년 역사가 손에 잡힐 듯 탁트인 죽주 산성의 정상에 오르는 호흡은 거칠었다.어사 박문수의 과거 급제 이야기와 천년 신라의 불통에 분개한 궁예와 부패한 훈구파들의 탐욕에 절망한 백정 임꺽정의 공통점은 칠장사다. 봄 햇발 가득 드리운 칠장사 대웅전 앞마당엔 늙은 누렁이가 한가롭게 졸고 있다. 밤새 내린 봄비로 씻겨진 처인성은 초록이었다. 용인 처인성, 교과서에 달랑 한 줄 나오는 역사의 현장에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800년전의 토성은 무력했다. 성은 성답지 않았고, 고려왕조는 국가답지 못했고, 최고 권력자 최우마저 강화로 도망간 1232년 가을. 성난 파도처럼 밀려든 대륙의 적에 맞선 처인부곡민은 단순했다.살아 남아야 한다.들판에 익어가는, 모진 노동과 억척스런 삶의 잉태물을 놓고 갈 수 없는 백성들의 단순성이 처인부곡을 지켜냈다. 작은 토성하나 점령하지 못하고 죽어나간 살리타이 보다 거친 손마디, 굽은 허리 펴지 못한 부곡민의 눈물겨운 삶이 역사여야 한다.김윤후는
오룡의 역사 타파(98) 살아서 아름다운 것이 있었던가? 살아서 눈부셨던, 사라져 비극적인 백제의 역사를 위로하기 위해 부여를 찾는다! 허망하고슬프고아련한비운의 나라 백제의 도읍지 부여는 여전히 소박했다. 딱한 운명에 벌거숭이로 남겨진 백제의 고도(古都)는 천사백년전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시인 신동엽 생가는 고즈넉했다. 무왕의 스러진 꿈을 알 리 없는 궁남지는 연인들의 놀이터로 안성맞춤이다. 오래전 영화(榮華)가 사라진 구드래 항구의 낡은 스피커에서 울려대는 꿈꾸는 백마강은 애절했다. 삼천궁녀의 전설이 잡히지 않는 수심 6미터의 백마강엔 낙화암의 그림자가 어슬렁 거렸다. 부소산의 푸른 솔빛이 어우러진 백마강은 달밤이 아닌데도 청승 맞았다. 5만여명의 사비성민을 굽어 살핀 대자대비한 사찰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십오만의 당나라 군대에게 허물어졌다. 오만방자한 소정방도 무너뜨리지 않았던 정림사지 5층 석탑만이 날아갈 듯 경쾌했다. 능산리를 감싸안은 허물어진 나성엔 연두색 봄 햇살이 가득 뿌려졌다. 허망한 외성은 부실했고 초라했다. 1400년전의 빛나던 사비성은 잡히지 않았지만 금동대향로는 눈부시게 황홀했다. 660년 7월, 아비규환의 사비성 육좌
오룡의 역사 타파(97) 꽃보다 아름다운 강화에선 바람이 우선이다 - 무겁게 가라앉은 안개처럼 아득한, 돌아갈 수 없는 강화의 역사는 허망하다. 무너진 고려 궁지엔 38년 고려 왕도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800년전 궁궐터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온 왕실의 허망함을 보여줄 뿐이다. 개경의 만월대를 흉내낸 높다란 기단위에 병인년(1866년)에 불타고 새로 지워진 외규장각은 감동을 주지 못했다. 바다인지 강인지 모를 갑곶진에서 보이는 김포는 선명했다. 그곳에서 노려봤을 몽골의 기마병 앞에 불안했을 고려 고종의 한숨은 아득해서 잡히지 않았다. 광성보 용두 돈대에서 바라본 바다는 강물처럼 소리내어 흘렀다. 신미년(1871년), 어재연과 350여 조선 병사가 뒤엉켜 삶과 죽음으로 아수라장이었을 손돌목은 만발한 진달래의 붉은 색이 핏빛처럼 흘러 내렸다. 1875년 늦가을, 운요호에서 포탄이 벼락처럼 쏟아졌다.초지진 소나무엔 깊게 베인 상처는 아직 아물지 못했다. 역사의 현장을 숨죽이며 지켜 본 소나무 앞에서 기어코 기념사진을 찍는다. 그 오래된, 상처입은 역사의 봄날에, 팽팽한 활시위처럼 흔들림 없는 강화의 바다는 적막했다.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해풍이
오룡의 역사 타파(96) 역사의 그날 현장에서 역사를 보다 모든길은사후의길이며정치적인길이다. 그게역사로남아밟고다닌다. 강화내성에서진도용장성으로,다시탐라의 항파두리성으로연결된길은바다위에 선으로 그려져있다.13C탐라는세계제국몽골에저항한삼별초의 끝점이아닌,고려에반기를든 무인정권의 종착지다. 그러므로고려와삼별초,몽골은비긴것이다. 한라산의깊숙한흙성앞에 고단한 항몽순절비는 맥없이 고단해 보였다.차디찬 순절비에서 뜨거운 충성심은 느껴지질 않았다. * * * 삼천리 반도 산하는화약연기로흐릿했다. 1951년,길이끝나는부산을떠나 길이시작되는 제주, 그곳에서도길이끝나는서귀포에서이중섭의그림은시작된다. 그가잠시 머물다 떠난지오래된 거리엔늙은 백구만이 한가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제주대정의추사 김정희 유배지는쓸쓸한만큼고즈넉했고조용한만큼단아했다. 삶속에서는언제나사랑보다는밥이우선일까? 거친바다를건너온제자를위해추사는 소나무를그렸다. 나무는가냘프고앙상하다. 바람은차고매섭게후려치지만나무는부러지거나꺾이지않았다. 원한과치욕의마음과 그리움과사랑의마음은 동등하다.아,아득하고허망한제주의 역사여... 손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없으리라. 때문에 눈에 익혀서 가슴에
오룡의 역사 타파(95)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게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게 부끄러운 것이다. 1937년 젊은 문학청년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던 즈음에 만주 곳곳에 황군이 몰려왔다. 오래전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은 말과 글을 쓰지 못했고, 징병과 공출로 신음했다. 식민지의 어둠이 짙어질 때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반듯한 청년 윤동주는 끝내 아침을 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오뚝하고 곧은 콧날, 크고 선한 눈망울, 유난히 흰 살결의 청년 윤동주는 1917년 만주 간도 명동촌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항일 감정이 특출난 마을에서 어린 동주에게 사촌형 송몽규와 친우인 문익환의 영향은 컸다. 1932년 윤동주는 고향 명동을 떠나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인 투사가 아니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양심의 괴로움으로 슬퍼하는 내면적인 사람이다.
오룡의 역사 타파(94) 광해군의 외교 감각에서 오늘을 본다 - 민족적 자존과 국가의 이익을 위한 탁월한 리더쉽이 필요하다. 1619년 3월2일, 도원수 강홍립은 1만 4000여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만주의 심하에 도착했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할 만큼의 강행군을 요구하던 명군은 자체 식량도 없었던 지 주변 부락을 약탈하다가 후금군 3만명에게 무너졌다. 철기(鐵騎)라 불리던 만주족의 기마대는 허겁지겁 달려 온 조선군을 몰아쳤다. 좌우를 유린하는 기마대에게 화포는 더뎠고, 총은 느렸다. 굶주림으로 지친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애초부터 후금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고, 패하지 않는 싸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광해군의 특명대로 강홍립은 움직였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항복을 지시했는지의 여부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지만 통역관 출신이었던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현장에서의 상황 판단을 위한 능력을 고려하여 언어가 통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중심이었던 명의 기운이 쇠하고 변방의 오랑캐라고 여겼던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팽창을 시작한 1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는 격변기였다. 그 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오룡의 역사 타파(93) 청산하지 못한, 청산하지 않은 역사의 반복- 전쟁을 일으킨 그들은 살아 남는다. 1592년 4월13일, 700척의 왜선이 부산포에 상륙한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1만 8000여명의 왜군에게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졌다. 동래성을 지키고 있는 부사 송상현에게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를 요구한다. 즉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명나라를 치러가는데 필요한 길을 열어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시작이었다. 이에 송상현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이라고 쓴 나무판을 세웠으니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동래성을 지키던 군관민 3000여명은 철저하게 학살당했다. 이후부터 경상도를 지키는 조선군은 없었다. 왜군의 상륙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 2만 2800명, 제3군은 구로다 1만 1000명, 제4군 모리 1만 4000명, 제5군 후쿠시마 2만 5000명, 제6군 고바야가와 1만 5000명, 제7군 모리 3만명, 제8군 우키다 병력 1만명, 제9군 하시바 1만 1500명으로 구성된 왜군의 육군은 15만 8700명으로 정규
오룡의 역사 타파(92) 진실을 왜곡하는 기자들의 기사는 얼마나 많을까? 그 기사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반목과 갈등이 진행되고 있는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이다”라고 말한 크로체의 주장은 분명하다. 역사가는 역사의 관찰자이며 참여자이다. 역사가들이 쓰는 역사서는 역사가 본인 시대의 관점이나 그들의 미래에 대한 어떤 교훈을 염두에 두고 쓰게 된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진실이란 것은 어떤 사실을 기억하고자 쓰여진 것이 아니라 기억하려는 것만을 써낸 보고서 일지도 모른다.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가 한창이던 때 남한을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동아일보의 1면 기사는 미래를 계산하고 쓴 기사였을까?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외상 회의에 논의된 조선 독립 문제,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내용은 취재한 기사도, 사실 보도도 아닌, 명백한 오보였다. 한반도의 신탁통치에 대한 언급은 1943년 얄타에서 나왔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모인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가장 적극적인 건 미국이었다. 스탈린은 한반도를 바로 독립시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를 살고 있는가. ‘정신대’와 ‘종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의 의미를 알기나 하는가? 식민지 조선의 징병제 실시 소식에 김활란은 감격한다. 그 절정의 기쁨을 1942년 12월, 가장 친일적인 대중잡지 신세대에 남겼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반도여심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도 국민으로서의 최대 책임을 다할 기회가 왔고, 그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한 일인지 알 수 없다.’ 제국주의 일본은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침략 전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했다. 전쟁 승리를 위해 국가 총동원법이 시작되고 식민지 조선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했다. 곡식은 물론이고 놋그릇, 숟가락을 가져 가더니 1944년 부터는 본격적으로 강제 징용과 징집이 시작됐다. 남자들이 군인으로, 노동자로 끌려가면서 조선의 일손 부족이 심각해졌다. 새로운 노동력의 충원이 필요해 지자 여성들에게 집
오룡의 역사 타파(90) 매천 황현, 그는 애국적 보수주의자 였지 고루한 양반은 아니었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참으로 통쾌할 것이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1910년 8월29일, 5백년 왕조의 역사는 허망하게 몰락했다. 황현은 ‘절명시’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다. 그는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고, 9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다음날인 10일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황현은 평생 벼슬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는 28세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다. 보거과는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다. 그는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정했다. 민씨세력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그 뒤의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3년 뒤 황현은 가족과 함께 구례로 이주했다. 2년 뒤 황현은 아
오룡의 역사 타파(89) “현모양처라 불리는 사임당 신씨, 그녀를 독립된 여성으로 다시 해석하라.” 사임당 : “제가 죽은후에 당신은 재혼(再婚)하지 마시오. 우리가 7남매를 두었으니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오.”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내쫓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원수 :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후로 증자는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 주자 나이 47살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남편인 이원수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사임당은 공자와 주자의 고사를 인용하며 논리적으로 대응한다. 남편의 말에 순응하는 ‘양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4살에 공부를 시작하
오룡의 역사 타파(88) 친일에 대한 확신범, 그들에게서 반성문은 없다. 자기 합리화만 있을 뿐이다. 잡지 , 1922년 5월호에 춘원 이광수는 작심하고 글을 썼다. “거짓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서는 용기가 없고, 이기적이어서 사회 봉사심과 단결력이 없다.” 그는 우리 민족의 식민지 전락은 열등한 민족성에서 기인된 것이기에 조선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는 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개조’된 인간의 특징은 ‘국가에 대해서는 모든 임무를 다하는 완성된 범인(凡人)’이다. 일본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며,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개조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1924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에서 “조선 내에서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헛되이 독립을 꿈꾸거나, 단지 감옥에 들어갔다’ 오는 독립 운동가들을 과소평가한 그는 식민지의 독립이 아닌 ‘자치론’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40년 2월 12일부터 본격화된 창씨개명은 식민지 조선을 ‘내선일체’의 하나로 총독부가 조선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다. 그날 아침 관공서가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