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의 역사 타파(111)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경찰이 지켜줘야 하는 동상은 세우지 말아야 한다. 1956년 8월 15일 남산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졌다. 동상은 이승만의 80회 생일(1955년 3월 26일)을 맞아 구성된 ‘이승만 대통령 80회 탄신 축하위원회’ 주관으로 세운 것이다. 동상이 세워진 자리는 일제 침탈기에 조선 신궁 본전이 있던 남산 중턱으로,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다. 동상의 높이는 본체 7m, 기단부를 합치면 25m였다. ‘세계 굴지의 동상은...’, ‘세계 최대의 동상’이라는 언론의 보도대로 당시로선 세계 최대 규모였다. 동상 준공식은 제3대 대통령 취임식 당일인 1956년 8월 15일 거행됐다. 제막식에 참석한 국회의장 이기붕은 “자주독립의 권화이며 반공의 상징인 이 대통령 동상 앞에서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그 뜻을 받들기를 맹세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동상은 4년 만에 쓰러졌다. 1960년 4월 11일,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는 4월 18일 고대생 피습 사건으로 확대됐다. 시위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려대생 3000여 명이 깡패들에게 무
오룡의 역사 타파(110) 조선 후기 탈놀이 광장(마당)은 해방구였다.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없는 평등한 세상이었다. ‘놀다’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는 것’과 ‘놀이를 하며 즐겁게 지내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신명나게 놀아보세’는 신을 불러낼 정도로 놀아야 한다는 것이다. ‘미친 듯이 논다’는 것과 ‘신들렸다’는 의미는 비슷하게 쓰인다. 조선의 양반들은 놀고 먹는자는 광대와 중이라 했고, 미친 자들은 무당과 기생이라 불렀다. 진짜로 놀고 먹는자들이었던 양반들에 대한 불신은 놀고 즐기는 탈굿판의 형식에서 가장 통렬했다. 안동 하회 마을의 농민들은 정월 초부터 보름까지 풍물놀이를 즐겼다. 양반을 비판하는 자리는 신명이 절로 났던 모양이다. 풍년을 비는 축제의 마을잔치에서 탈놀이는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양반에게 직접 할 수 없던 이야기들과 억눌렸던 감정을 마음껏 분출시켰다. 하회 별신굿 탈놀이의 한 토막을 보면 양반 가면과 선비 가면을 쓴 광대들의 행동은 사실 의젓한 체하는 양반의 실상이었다. 선비 : 여보게 양반 자네가 감히 내 앞에서 이럴 수가 있는가? 양반 : (자리에 선다.)허허 무엇이 어째? 그대는 내한테 이럴 수가
오룡의 역사 타파(109) 최악의 오보(誤報)라 알려진 동아일보 기사, 언론은 받아쓰기와 베껴쓰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1945년 9월 9일 미군은 서울에 들어왔다. 38도선 이남 지역에 군정을 선포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정문에 걸린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할복을 시도했지만 살아남은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살아서 돌아갔다. 일본을 몰아내 준 미군에 대해 한국인들은 해방군으로 여겼다. 하지만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한국인을 대했다. 미국인 기자 마크 게인은 “우리는 해방군이 아니었다. 우리는 점령하기 위해서 한국인이 항복 조건에 복종하는가 않는가를 감시하기 위해서 왔다. 상륙 제1일부터 우리는 한국인의 적(敵)으로 행동했다.”고 썼다. 점령군 사령관 하지는 일제의 통치 기구를 그대로 활용해 남한을 통치했다. 일본에서 군주(君主) 행세로 세월을 보내고 있던 맥아더에게도 한국 문제는 안중에 없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 시켜 준다던 약속에서 ‘적당’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미국의 루스벨트는 1945년 2월에 얄타에서 만난 소련의 스탈린에게 20~30년간 한국을 신탁
오룡의 역사 타파(108) 무녀가 권력을 잡고 국정에 개입했다. 진령군에게 홀딱 빠진 중전 민씨 1882년, 분노한 군인들은 경복궁 담장을 넘었다. 13개월의 급료를 빼돌린 중전 민씨를 죽이겠다는 군인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장호원으로 탈출한 중전 민씨는 절망했다. 권력을 빼앗긴 그녀에게 희망은 없어 보였다. 그런 민씨에게 무녀(巫女)가 찾아왔다. 무녀는 꿈에 신령님이 나타나 중전이 장호원에 있다고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민씨는 무녀에게 “지금 궁궐로 돌아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무녀는 “지금은 때가 아니지만 얼마 후에 돌아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약속한 환궁일은 정확했고, 중전 민씨는 청나라를 이용하여 권력을 회복했다. 무녀는 이후로도 민씨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서 증세가 호전되도록 곁에서 보필했다. 중전 민씨는 무녀에게 진령군(眞靈君)이란 봉작을 내렸다. 진령군은 아무 때나 고종과 중전 민씨를 만날 수 있었으며, 만날 때 마다 엄청난 재물까지 받았다. 진령군이 된 무녀는 관우 복장을 하고 다니면서 자신을 신비화했고, 국정 전반에 두루 조언했다. 그녀 의 요구에 따라 재상들이 임명되고 파직되기도 했다. 무녀 진령군의 아들 김창열은 붉은
오룡의 역사 타파(107) 독립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실패한 ‘외교론’을 붙잡고 6년을 허송세월한 이승만은 탄핵됐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에 이승만을 선출하겠다는 참석자들에 실망한 신채호는 분노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 먹었다.” 상하이의 회의장을 박차고 나온 신채호는 1923년 의열단 선언문을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9년 1월18일, 파리에서 개최된 강화회의에 미주의 최대 항일 한인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는 이승만과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을 의식한 미국이 여권 발급을 보류하여 이승만은 파리에 가지 못했다. 이 무렵 신한 청년단 대표로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은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는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위임 통치 청원을 요청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이유를 해명해야 했다. 3·1운동 이후 서울의 한성 정부, 연해주의 대한 국민 의회, 상하이의 임시정부가 통합하여 세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에 온 힘을 쏟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파리 강화 회의에 임정 대표 자격의
오룡의 역사 타파(106) 조선의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의 수혜자와 피해자는... 분명한 것은 여전히 국민은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 강대국인 중국엔 사대하고, 여진과 일본과는 우호관계를 맺는다. 중국을 어버이처럼 모시고 여진과 일본은 형제처럼 지낸다. 사대교린(事大交隣)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의 대외정책 원칙이었다. 원칙은 변함없이 지켜졌다. 고집스런 원칙이 가져온 폐해는 백성들의 몫이었다. 황족의 생일(성절사, 천추사)과 연말연시(정조사, 동지사)에는 정기적인 사신을 보내고 필요에 따라 부정기적으로 임시 사절을 보냈다. 사대의 나라에 가는 사신은 공물을 가지고 조공(朝貢)을 바친다. 조공을 받는 중국은 보답으로 선물을 회사(回賜)한다. 경제의 논리로 본다면 조공하는 품목과 회사하는 물품 사이의 가치를 따져보면 되지만, 이면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사신들이 가져가는 품목은 인삼과 모시, 화문석과 말, 문방구 등 다양하지만 가장 중요한 목록은 금·은과 환관·처녀의 요구였다. 환관으로 들어간 이들이 명의 사절단으로 들어와 무리한 요구를 일삼은 것은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처녀들의 혼인을 막기 위한 금혼령과 딸들을 혼인시키기 위한 백성들의 입
인천 상륙작전으로 영웅이 된 맥아더, 그는 완벽하게 이길 수 있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패장이다. “휘하의 전 부대를 동원하여 최대한의 속도로 압록강과 두만강국경선까지 진격하라.” 맥아더가 1950년 10월24일, 미 제8군 사령관과 미 제10군단장에게 내린 명령이었다.파죽지세로 올라 간 미군을 막아선 군대는 북한군이 아닌 중국군이었다. 중국군이 잘했다기보다 미군 측에 결정적인 실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맥아더의 공격 명령은 한국과 중국의 국경선을 향해 제한 없는 총공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진급을 위해 승리가 필요한 부대들은 앞다투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진격해 나갔다.각 부대들 사이에 경쟁이 붙여진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대 사이의 협조는 원만할 수 없다. 먼저 국경에 도착하고자 하는 각 부대 지휘관들이 다른 부대의 진격에 협조할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편제상의 문제도 작용했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은 미 제8군단장 워커 중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던 반면,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도쿄에 있던 맥아더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아몬드 소장이 지휘했는데, 그는 맥아더의 명령을 직접 받았다. 기동력이 좋은 부대들은
오룡의 역사 타파(104) 역사에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이다 – 백여년전에 조선을 가장 먼저 배신한 나라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급변했다. 중국 중심의 질서가 무너진 가운데 대륙진출의 꿈을 키운 일본의 움직임은 비수처럼 움직였다. 얼지 않는 항구를 찾아 나선 러시아, 이를 저지하려는 영국, 만주로 진출하여 경제적인 이익을 실현하려는 미국의 외교전은 두 번의 엄청난 전쟁을 가져왔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프독의 삼국 간섭까지 발생했지만 한반도에서 최후의 승자는 일본이었다. 일본이 승리한 이유는 절박함 때문이다.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와 한반도 진출이 동양 평화를 위협할 수 있다는 논리로 미국과 영국을 설득시켰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청나라에서 발생한 의화단 운동 진압에 서구 열강이 몰두한 틈을 이용하여 1901년 8월 러시아는 만주로 진출했다. 1903년 러시아가 만주를 봉쇄하자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논리를 인정하고 군사동맹을 맺는다. 한반도를 둘러 싼 정세는 갈수록 일본에게 유리해져 간 이유가 있었
오룡의 역사 타파(103) 타락한 권력을 비판하고 벼슬을 거부한 조식은 말한다 -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는 백성이다. 조선의 선비는 칼을 차지 않았다. 선비에게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경상감사 이양원이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그대의 허리춤에 있는 금대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했던 조식은 칼을 찬 선비였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 받은 조식은 단호했다. 명종의 집권 10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일 정도로 혹평의 사직 상소를 썼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
오룡의 역사 타파(102) 운명을 가른 역사적인 사건의 중심에서 몰락한 지도자 -시대의 흐름을 거부한 위화도 회군의 좌군 도통사 조민수 1388년 음력 5월7일, 5만여 명의 요동 정벌군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 있었다. 계속되는 장마비에 고립된 정벌군에게 우왕과 최영은 요동으로의 공격을 지시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왜적이 침입할 수 있다.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며 4불가론을 주장했던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했다. 마침내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졌다. 성공한 반란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는 당대의 대유학자 이색을 끌어들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즉위시켰다.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어쩌지 못했다. 창왕의 나이 9살에 불과하나 장성하면 회군 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제거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민수는 거침이 없었다, 이성계와 맺은 연합전선을 붕괴시킨 그는 권문세족의 화신이었던 이인임과도 결탁하려 했다. 부패하고 노회한 구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으니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
오룡의 역사 타파(101) 충주의 남한강과 여주의 여강은 하나로 이어져 흐른다. “나는 조선의 국모다” – 모든 비극은 비애롭지 못하다. 영릉의 아침은 진중하다. 영릉의소나무들은제멋대로성장해서 더폼나게푸르렀다.단체 관람객들만 아니라면 적막하고 한가했다. 답사초보자들이찾은영릉의오래된 숲은과거다. 과거의숲속에서미래의어린친구들은숲과나무를구분하지못할것이다. 명성황후 민씨가 8살까지 뛰놀던 집은말끔하게빛났다. 명성황후의 옛집에서 느끼는 고독은 그의 삶과 연결된다. 날마다새로워지는옛집은과거의생가가아닌 현재의생가다. 일본자객들의날선검에명성황후민씨는맞서지못한다.베어진그의아픔은비극이지만 역사 속의그는비애이다. 옛집과 생가의 공간에서 아이들과함께 배역놀이를 해본다. 그의 죽음보다 더 아픈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어린 답사객들의 아우성은 명료하다. 오래된절터 고달사는 허무함도,쓸쓸함도,휑함도 보이지않았다. 흙은 흙으로다져져야흙다운것인데도 수년째포크레인굉음은멈추지 않고 메뚜기와개구리는여전히자유롭다. 국보4호 고달사지 승탑에 오르는 길은 여전히 무너졌 있다. 찾아주지 않는 역사는 모래와 자갈로 엉켜있다. 이름없는 석공의 기억으로 영원히 살아 남은 승탑 앞에서 묵직한시간들을겨우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 허영을 부리지 않은 수덕사 대웅전은 눈부셨다 여름의숲은푸르고서늘하다. 여름의숲은어둑하지만반짝인다. 나뭇잎사이로비집고달려드는빛은 투명하지만새침하다.여름의흙은눅눅하지만성글다. 여름의흙은망설임도,머뭇거림도없이단순하다. 찾아주는,밟아주는사람이드문여름의답사에서 만난 흙길은 아늑하고 고즈넉하다.내가좋아하는세상은흔적이보이는여운이 있는세상이다. 예산 덕숭산의풍경은초록사이로 파고드는빛으로 눈부셨다.세속으로부터비켜앉은위대한부처(대웅전)는 허영을부리지않았다.형형의단청을거부한주심포와무보정의칠백년맞배지붕은소멸하는시간을거부한채여전히검소했다. 온갖욕망과번뇌의세속을떠난비구와비구니의 삶은순간이다. 시공을초월한영겁을만나기위해 숱한 중생들의합장은하나로모아지지못하고흩어진다.백제의미소를가득안고살았을청년윤봉길은 스물다섯에조국의독립을위해목숨을바쳤다. 그는죽어서영원히살았지만 그가원한진정한푸른역사는아직갈길이멀다.깊은산중에서도 셋이라서외롭지않은마애삼존불은 헤픈웃음(?)보내며우리를맞아준다. 백제의미소들이터질듯웃어주는불상의 오동통한입술과귀여운천진성앞에먼길떠나던 백제인들도웃었을테고우리도웃었다. 절벽에매달려20cm를파내었을이름없는석공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