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의 역사 타파(23) 삶의 출발은 비슷했으나 마지막은 달랐던 민영환과 이완용 신문에 실려 인구에 회자된 혈죽가에서는 놀랍고도 신긔하다 우리 민충정/ 어리석고 블상하다 우리 국민들()/ 대한 중흥 어서 해보셰라고 하여 사후에 기적을 일으켰다는 민영환을어리석고 불쌍한 백성의 스승으로 삼았다. 나라가 무너져가는 시대에 자살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라도 저항을 보인 민영환은 친일하거나 보신주의로 일관한 다수의 고관대작과 대조적으로 군계일학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영환 영웅 만들기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등 매체들이 절대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도 있었다. 임오군란의 원인 제공자로, 민씨정권 부패의 상징으로 군란의 와중에서 피살된 민겸호(1838~82)의 아들 민영환. 22살의 나이로 벌써 정3품의 성균관 대사성(국립대학 총장)이 되고 그 뒤 30살도 채 되지 않아 이조참판호조판서병조판서까지 두루 역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척족정권의 핵심적 소장 멤버라는 태생적 신분이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1854~95)의 공초에는 민영환이 매관매직부정부패의 주역으로 지목되고 있다.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지금 확인할 길이 없지만 1890년대 전반에 민영환이 매관매직을
오룡의 역사 타파(22)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은 성공한 작전이었나?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부산에서 거리가 49.5㎞인 반면 일본 큐수의 후쿠오카에서는 134㎞나 떨어진 섬이다. 섬 면적의 90% 이상이 산악지대여서 고구마를 제외하면 먹을 것이 거의 없는 척박한 땅이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이들은 해적과 왜구라고 불리우며 동아시아의 해안주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려말부터 계속된 왜구의 준동은 조선초기에도 계속된다. 일본 본토의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교체기의 혼란도 원인이었다.세종 1년(1419) 5월, 왜선 500여 척이 서천 비인현을 침공했다. 당시 태종은 왕위는 세종에게 넘겨줬으나 병권만은 장악하고 있었다. 상왕 태종이 주상 세종에게 말했다. 주상, 지금 적들이 발광하고 있는 비인현에서 싸울 게 아니라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가 비어 있으니 그곳을 치도록 하시오. 세종은 즉시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임명하여 전함 227척, 군량미 65일분, 병사 1만7000명을 통솔하여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기습 작전으로 인한 대마도 공략은 대성공이었다. 정벌을 통해 대소 선박 129척과 가옥1940여 호를 소각하고 적 114명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
오룡의 역사 타파(21) 고구려의 형사취수제는 패륜이 아니다 우씨 왕후 - 두명의 왕과 결혼하다 서기 179년 고구려의 고국천왕이 즉위했다. 그리고 일년 후 연나부 우소의 딸이라고 전해지는 우씨가 왕후에 올랐다. 강력했던 5부족의 반란을 진압한 191년, 고국천왕은 농부 출신 을파소를 등용하여 빈민 구제를 위한 진대법을 실시한다. 왕의 사랑은 물론 아이조차 낳지 못한 우씨도 친정의 몰락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 버렸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고국천왕이 197년 갑자기 죽은 것이다. 왕이 죽은 그날 밤에 우씨는 궁궐을 몰래 나왔다. 고국천왕과 우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이 누가 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였다. 이때 우씨왕후는 왕이 죽은 사실을 숨기고 밤에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왕이 되라는 암시를 한다. 발기는 왕이 죽은 줄 몰랐기 때문에 도리어 왕후가 밤에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우씨왕후는 부끄러워 발기의 집을 나와서 그의 동생인 연우의 집을 찾아간다. 연우는 복장을 갖추고 친히 문으로 나와 왕후를 맞아들이고 환대한다. 우씨왕후가 속마음을 털어놓자 연우는 그
오룡의 역사 타파(20) 망국의 패전지장 백제의 계백. 황산벌 전투의 총지휘관이었을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투, 기억에 남는 장군은 누구일까? 설문조사를 한다면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를 만든 이순신. 30만 수나라의 별동대를 살수에서 몰살시킨 을지문덕, 화북지방을 휩쓸었던 요나라의 10만 정예병을 전멸시킨 강감찬 보다 우선할 수 있는 인물. 전쟁에도 승리하고 나라를 구한 승장이 아닌, 패전과 더불어 목숨을 잃고 나라마저 비참하게 멸망당한 패장. 그가 바로 계백이다. 660년 음력 7월9일. 뙤약볕 조차 피할 곳 없는 황산벌(지금의 논산시 연산면). 백제의 명운을 걸고 황산벌에 집결한 5000결사대를 지휘한 달솔 계백은 백제의 2관등으로 황산벌 전투에는 계백 이외에도 백제의 1관등인 좌평 충상과 상영이 참가한 것으로 삼국사기에는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계백의 열전 기록을 더 살펴 보자. 一國之人, 當 唐羅之大兵, 國之存亡, 未可知也. 恐吾妻孥, 沒爲奴婢, 與其生辱, 不如死快. 遂盡殺之.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誓衆曰: 昔句踐以五千人, 破兵七十萬衆, 今之日, 宜各奮勵決勝, 以報國恩. 遂鏖戰, 無不以一當千, 羅兵
오룡의 역사 타파(19) 목화씨의 전래와 조선 농민들의 무명옷 이야기 1363년 공민왕 13년,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그 후 일 년 만에 돌아 온 그에 의해 이 땅에 무명옷의 시대가 열렸다. 더 극적인 것은 삼엄한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서 들여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말과 조선초의 기록에는 목화씨를 넣어가지고 왔다거나 그냥 가져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고려사 열전을 보면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에 부(附)하였다가 덕흥군이 패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죽고 한 포기만 살아 3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 뽑는 기구와 실 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목숨을 걸고 들여온 이야기는 없다. 왜, 목화씨의 전래가 붓두껍에 숨겨들여 온 목숨을 건 씨앗으로 바뀐 것일까? 이는 조선 중기이후 세금 제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 그렇다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 우리 땅에는 면직물이 없었을까. 당나라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가 백첩포(白疊布)라는 면
오룡의 역사 타파(18) 백성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의 원칙은 덕치의 유교이념에 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과 명분도 그러했으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근본도 민본에 있다고 설명한다. 훈민정음과 농사직설, 각종 과학기구의 발명보다 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신문고가 주목되는 이유도 백성을 배려하는 사례에서 가장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태종 4년(1404년), 국가에서 백성의 의사가 왕에게 전달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신문고를 설치하였다. 백성들에게 와서 치도록 허락하여 왕의 귀와 눈이 막히고 가려지는 근심을 없애니, 이것은 진실로 좋은 법이요, 아름다운 뜻이다.라고 실록은 기록했다. 현재의 중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설치한 신문고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여 국가 정책에 반영한 것으로 표현하여 민주적인 제도였다 라고 서술하는 부분도 우려되는 주장이다. 조선의 신문고는 전국의 백성들이 언제 어디서나 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의 궁궐에 위치한 신문고. 그 신문고를 치기 위해 서울에 오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절차의 복잡성 이었다. 신문고를 치기 전에 해당 관청에 호소하고,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다고 생각되면 사헌부를 통해 신문고를 칠 수 있었다
오룡의 역사 타파(17) 1919년 31 운동의 33명 민족대표, 절반은 변절자 대표라 불러야 한다 1919년 1월 22일 경운궁(덕수궁)에서 뇌일혈로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소문은 소리없는 가운데 3천리 반도 곳곳으로 퍼졌다. 고종의 독살은 사실처럼(아직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짓지 못한다) 굳어졌다. 고종의 장례일인 3월3일에 예정된 만세시위는 이틀앞으로 당겨졌다. 2일은 일요 교회예배에 참석하는 민족대표들의 반대로(?) 3월1일 정오에 파고다 공원(현재의 탑골공원)으로 독립선언서 낭독장소는 예정되었다. 개학을 맞은 학생들과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상경한 일부의 유생들이 파고다 공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군중이 모이기 시작한다. 소위 민족대표 33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 시작한 것일까. 33명중에서 29명이 모인 시간은 오후1시 무렵. 태화관 사교 1호실에도 드디어 태극기가 걸렸다. 기본적인 의례를 마친 후 계획된 독립 선언서 낭독은 이미 보았다는 이유로 낭독되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기념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를 끝낸 손병희는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불러 조선 총독부에 집회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압록강은 흐른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고려말 최영 장군의 좌우명으로 유명해진 말이다. 최영은 아직도 청렴결백한 고려의 충신이요, 자주적인 군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가 주장한 요동정벌이 이루어졌다면 이 땅의 역사가 달라졌을 거라는 기대로 그의 정치적 몰락을 애석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다. 고려 우왕 14년(1388년) 초여름 날씨가 완연한 음력 4월 18일이었다. 서경(평양)에서 요동공략에 나서는 정벌군을 사열하는 최영의 낯빛은 엄숙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필자가 최영의 입장에서 상상을 해본다. 최영은 최근 정국에서 요동공략에 대한 자신의 결정이 대견스러운 듯 생각했다. 불온한 세력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었잖은가 말이다. 또 이성계의 군사가 항상 맘에 걸렸는데 이번에 확 틀어쥘 수 있어서 그 아니 시원한가. 그렇잖아도 정국 운영 때문에 머리가 아팠는데 마침 명나라가 위압적으로 나온 것은 절묘한 타이밍이었어. 요동을 공략해서 고려의 자주성을 세우겠다는데 누가 이의를 달아? 감히 누가! 만약 요동 공격이 실패한다고 해도 피해는 이성계가 더 클 것이야.) 그런데 평양을
오룡의 역사 타파(15) 한강은백제의 개로왕, 조선의 선조,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알고 있다. 고구려의 첩자 승려 도림과 바둑을 두던 개로왕. 왕은 바둑을 두며 은근슬쩍 말하는 도림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백제의 강성함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백성들을 징발하여 성벽을 쌓고, 궁궐을 화려하게 증축했다. 대규모 공사에 백제의 창고는 비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공사장에 끌려가 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다. 백성들은 굶주렸고, 군사들의 무기와 군량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 백제 정벌을 단행한다. 고구려의 공격 소식에 개로왕은 크게 놀랐다. 그는 태자 문주를 불렀다. 내가 어리석어서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를 망쳐놓았다. 백성들이 흩어지고, 군사들도 약하니, 지금 고구려 군대를 막기가 어렵다. 나는 마땅히 적과 싸우다가 죽어야겠지만, 너는 우선 난리를 피하였다가, 다시 백제를 일으켜 주길 바란다. 하지만, 개로왕은 수도를 함락시킨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아단성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왕족이 몰살하고 남녀 8천여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 1592년 4월30일 새벽
한 군데서 이익이 많이 쏟아져 나오는 일이나 장소를 노다지라고 한다. 그런데손대지 말라의 뜻인 노 터치(No Touch)와는 발음상의 유사성에서 유래한 것 이외는 딱히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이 말에는 19세기말 조선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까지 이르렀던 미국인들은 흑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대포로 협박하여 일본을 개항시켰다. 황금의 나라 지팡그 라고 인식했던 일본에서 금맥을 찾지 못한 미국은 1866년 조선에 제너럴 셔면호를 보냈지만 실패했다. 무도한 나라 조선을 개화시켜 주겠다며 무자비한 침략을 자행한 신미양요의 이면에는 조선에 매장 확인 된 풍부한 금광이 목표였다. 흥선대원군의 완강한 저항에 무력도발이 실패로 돌아가자 청을 앞세운 통상교섭을 통해 마침내 미국은 1882년 조선과 수교한다. 이때 미 공사관 의사로 입국한 알렌이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 민영익을 갑신정변 당시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왕실의 극진한 보살핌을 얻었다. (알렌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건립, 뒤에 제중원으로 개명) 이후 공사관의 외교업무를 맡아 보게된 알렌은 조선 전체 금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던 평안도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미국에
[고구려의 옛 도읍은 황폐해진지 비록 오래 되었으나 고적은 아직 남아 있다마땅히 백성들을 옮겨 그곳에서 살게 함으로써 국가의 변방을 공고히 하여 백세의 이익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김종서가 책임편수관이 되어 편찬된 고려왕조의 정사(正史)인 고려사에 나오는 태조 왕건의 고구려 계승관련 발언으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그렇다면 실제로도 고려는 고구려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구려 계승보다 신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아 삼한일통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왕건은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기 전에 이미 무력으로 정변을 일으켜 태봉의 궁예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왕이 되었다. 때문에 왕건을 비롯한 고려의 건국 세력들의 입장에서 궁예는 부정적인 인물로 남겨놓아야 할 인물이 되었다. 실제 왜곡된 기록이라 할지라도 궁예가 현재적 관점에서 도덕적이고 자비로운 왕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궁예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전기의 삼국사기와 후기의 제왕운기는 물론 조선의 고려사서술에서도 포악무도의 극한을 보여주고 있다. 본래 궁예는 출생부터 불운한 사람이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헌안왕 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되어
고려사 열전에 신우로 기록된 우왕과 신창으로 기록된 창왕. 이성계와 급진파 정도전 세력에 의해 신돈의 자식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우왕은 누가 낳은 아들일까? 정말 신돈의 여종 반야의 아들인가? 보통, 사극에서는 노국대장공주(통칭 공주)가 죽고 공민왕이 방황하다가 신돈의 집에서 공주와 닮은 반야와 동침하고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바로 우왕이 태어난 생년이다. 우왕은 1365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1365년 2월 공주가 노산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기록이 다 사실이려면 우왕은 공주가 죽은 후 바로 잉태되었거나,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잉태되었어야 한다. 문제는 너무 시간이 짧다는 것이다. 가능한 것은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아이를 가졌어야 한다는 것. 아니라면 아이를 가진 여인의 신변 보호를 위해 신돈의 집에 위탁했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까지도 신돈은 공민왕이 믿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으니깐. 사극에서 등장하는 공주는 똑똑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며 공민왕 즉위와 반원자주 정책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어찌되었던 투기가 심한 몽골 여인 이었다. 그런 성격을 알았던 공민왕이 우왕의 생모인 반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