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의 역사 타파(87) 미국과 맞장 뜬 용감한 조선, 죽음으로 맞선 무명용사 들만이 진정한 애국자였다. 1871년 6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해협에 나타났다. 손돌목 인근을 오가며 해안을 측량하는 미군에게 경고포격이 가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초지진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한 1230명의 미군은 광성보에서 어재연을 비롯한 500여명의 조선군과 충돌했다. 전투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남북전쟁을 통해 전투력을 키운 미군에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군이 남긴 기록에는 조선군 사살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20여명 이었지만 에는 53명이 전사했다고 쓰여있다. 이처럼 사상자의 규모가 커진 이유는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었다. 탄환이 떨어진 병사들이 돌과 흙을 뿌리며 끝까지 싸웠다. 미군 윌리엄 그리피스가 남긴 기록이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중에 진동했다. ……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 체포자들을
오룡의 역사 타파(86) ‘사단(四端)이란 사물의 이(理)에 해당하는 마음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란 사물의 기(氣)에 해당하는 마음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당대 사림 선비들의 표상이었던 퇴계 이황이 성리학에 대하여 정리한 말 중의 하나다. 1559년, 58세의 성균관 대사성(현재의 서울대 총장) 이황에게 32세의 신출내기 과거 급제자였던 고봉 기대승은 이의를 제기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사단칠정’ 논쟁의 시작이다. 받아주지 않아도 될, 받아주지 않으면 논쟁이 성립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한 논쟁을 8년간 지속했다. 격렬하면서도 심오했던 논쟁에서 퇴계는 나이와 권력을 앞세워 고봉을 압박하지 않았다. 26년의 나이차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누구도 기대승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건방진 젊은 녀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이라면 임금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하며, 부모라면 부모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한다. 연장자 역시 연장자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만 연장자이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연장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유학의 정명(正名)을 실천한 논쟁이었다. 즉 정명이란 이름에 걸맞은 자세가 필요
오룡의 역사 타파(85)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는 김수영과 “두려운 것은 역사뿐이다.” 라던 연산군을 생각하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석기문명을 대체하는 청동기 문명의 탄생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속을 다룰 줄 알았던 외지인들이 현지 세력들과 결합해 가는 과정을 토템 신앙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양 세력 간의 갈등을 통합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된 단군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옛날부터 많았다. 단군의 건국신화 뿐만아니라 모든 신화는 허구로 가득 찬 이야기이다. 허구 속에 은유적인 해석을 해야만 진실에 가까운 내용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근대에 와서야 허구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재발견의 의미도 생겨났다. 단군은 더 이상 허구의 존재가 아닌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우리 역사 최초 국가 고조선의 건국자이다.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가언(嘉言)과 선정(善政)만이 실려서 다시 고칠 것도 없으려니와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오룡의 역사 타파(84) 효종의 북벌과 송시열의 북벌은 다르다-역사의 왜곡을 통해 300년을 지배하다. 1637년 삼전도에서 조선은 청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이 그토록 사모하던 나라 명나라는 농민군인 이자성에게 멸망했다. 명의 숭정제는 자금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랑캐라고 생각한 청은 17세기 중반이후 동아시아의 최강국가로 중원을 장악했다. ‘청이 재편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조선은 북벌을 준비한다. 그 중심에 효종(재위 1649~1659)과 송시열과 서인이 있다.’고 한국사는 말한다. 10년 재위 기간은 북벌을 위한 절치부심의 준비 기간이라고 가르치는 역사교육의 현실은 두 차례의 나선정벌(1654년, 1658년)과 병렬로 마주서있다. 극적인 타협은 북벌을 위해 준비한 조총수들에게 실전 감각을 쌓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효종의 북벌정책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송시열과의 단독회담(기해독대)이다. 이 회담의 요즘 버전은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회담이다. 1659년 4월, 효종은 풀리지 않는 정치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서인의 영수였던 이조판서 송시열을 사관도 없이 만났다. 당시 효종이 추진하는 중앙군 확충 정책에 반대하는 서인을 설득하기 위
오룡의 역사 타파(83) 백성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 망해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중에 지식인이 있었던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된 1905년부터 1909년 사이의 의병투쟁은 가열찼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의 의병들이 봉기했지만 애국 계몽주의자들인 지식인들은 다수가 외면했다. 이들은 ‘지금은 헛되이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때가 아니라 본업을 지키면서 실력을 길러 후일을 기약하라’며 의병들을 질책했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이주하여 삼원보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새운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처럼 무장 투쟁론을 강조한 지식인은 소수였다. 의병들을 흉도라며 비난했던 계몽 지식인들의 대다수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굴복했다. 그들은 실력 양성운동을 외쳐댔다. 언제까지 실력을 키울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의 행위는 국격을 떨어뜨리는 만행이라고 맹렬히 비방했던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진사(陳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며 사죄했다. 3일 동안 음주가무는 금지되고 대한제국은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932년 10월 26일 남산기슭 장춘단에
오룡의 역사 타파(82) 1636년 병자호란 - 나라는 망해가는데 명분을 고집하는 주전파에게 백성들은 무슨 존재였을까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초의 동아시아 정세는 급격하게 요동쳤다. 만주 일대에서는 만주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도요토미 가문을 전멸시킨 도쿠카와는 국내 안정을 위해 조선과의 교역 재개에 사활을 걸었다. 조선의 15대왕 광해는 발군의 외교력으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 나갔다. 문제는 광해군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외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의 지배층은 명나라에 대해 재조자소(再造字小: 다시 나라를 만들어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준 은혜)의 의식이 팽배했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실리외교를 모조리 뒤엎었다. 1636년 12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홍타지(청 태종)는 전면적 침략을 단행했다. 12만 명의 팔기군은 질풍처럼 달려와 6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꼼짝도 못했고, 백성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왕과 권력자들은 항전하여 죽느냐, 항복하여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으면서 유교적 대의명분
오룡의 역사 타파(81) 광복 70년 -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했다.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던 이재명은 24살의 나이로 사형 당했다. 나는 평생 시세를 따라 잘 처신한 덕에 가문을 이만큼 세웠다. 앞으로는 미국이 승할 테니 너는 영어를 배워 두라.는 이완용은 천수를 누렸다. 예순아홉 살 까지 살다간 이완용의 장례식은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엄수했다. 일왕이 하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이라고 적힌 깃발을 앞세운 장례 행렬은 일본 순사들의 호위 속에 이루어졌다. 이완용은 처세의 달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탁월했다. 그는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주미 조선공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유학에 대한 통찰력, 당대의 명필가로 개
일본에 의한 침략 전쟁 -7년간의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불러야만 하나- 우리가 일본에 대한 원한의 감정을 지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7년 동안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假道)는 일본군의 요구로 인해 명나라는 조선이 옛 고구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의심까지 했다. 그만큼 일본군의 조선 점령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평안도까지 일본군이 점령하자 1592년 7월초 명군 3천명이 조승훈의 지휘하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외국 지원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명군이 조선 땅에 들어온 뒤 조선 군사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명군이 군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이다. 거 350여년 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시기 작전지휘권을 미군 중심의 연합군에 양도한 것과 유사하다. 명은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일본과 강화교섭을 벌였다. 조선의 군왕 선조와 실료들은 강화 교섭을 반대하고, 철저 항전을 외치면서 수복 작전을 벌였다. 한국전쟁 시기 정전회담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 대통령과 너무나 흡사하다. 강화 회담 교섭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조선의 팔도를 분
오룡의 역사 타파(77) 메르스의 발생과 감염에 대처하는 대한민국 정부 손을 놓고 방치한 에비슨 인가, 억지를 부리는 살의 인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중전 민씨의 조카인 보수파의 상징인 민영익이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알렌의 치료에 의해 목숨을 구한 민영익, 그에 대한 보답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근대식 병원 광혜원은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이었다. 1896년 3월 3일, 사람을 구제하는 집이라 불린 제중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 광혜원을 이어받은 제중원은 선교를 목적으로 한 에비슨이 운영 중이었다. 1885년 제중원 개원 당시, 조선 정부는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진료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서울 뿐만 아니라 지방관에게도 널리 알리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가난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한다는 원칙이 있었던 제중원을 찾았다가 죽은 오치서는 제중원의 존재 이유를 명확히 알고 온 것이었다. 평안도 서흥에서부터 먼길을 걸어 온 그는 에비슨에게 고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병원 진료실도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다. 제중원에서 쫓겨난 그는 탈진한 상태로 병원문 밖에서 밤을 새우다가 죽은 것이다. 에비슨이 오치서의 차림새가 돈이 없어 보였기에 진료를 거부한 것은
오룡의 역사 타파(76) 금성의 분황사 동쪽 동네에 지은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은은 서른두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가고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도 하고, 구걸도 하며 밥을 얻어다 어머니를 모셨다. 어느 해 흉년이 들자 동네에서 밥을 얻기도 어려워 졌다. 생각다 못한 지은은 스스로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석을 받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말 정강왕(886년)때의 기록이다. 수도 금성에 살던 지은의 삶이 이토록 힘들었다면 지방민들의 생활은 더 비참했을 것이다. 지은 모녀를 측은하게 여긴 화랑 효종은 부모에게 청하여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가져다주었다. 또 부잣집에 지은의 몸값을 갚아 주고 도로 양민이 되게 하였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정강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곡식이 많아서 도둑에게 빼앗길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효종은 진골 출신으로 아버지는 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신라 최고의 집안이었다. 정강왕은 백성들에게 효를 장려하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 지은이의 효도를 활용했다. 지은처럼 로또를 받은 행운은 지극
오룡의 역사 타파(75) 초기 고구려의 왕위계승 진실은 무엇일까 - 기록이 부실한 역사의 정통성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성이 고씨라는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전한다. 김부식은 출처를 말하지 않았지만 일연은 신라의 거칠부가 지은 국사에서 인용했다고 적었다. 건국자 주몽은 고씨인데 아들인 유리부터는 해씨로 나온다.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의 성씨는 해씨이며, 북부여의 해부루도 해씨이다. 흔히 생각하기를 고구려라는 명칭이 주몽의 성씨에서 인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광개토대왕비에는 추모라고 표기한 건국자 주몽의 성이 고씨가 된 것은 고구려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고서 불렸을 것이다. 춘추전국 시대의 여러 국가들은 건국자의 성을 나라의 이름으로 정했으니 자료가 부실했던 고구려의 역사기록을 김부식은 중국의 역사를 인용했을 수 있다. 주몽은 성씨 뿐만 아니라 왕의 묘호조차도 태조왕에게 밀린다. 6대왕 궁은 건국자도 아닌데 태조왕으로 불리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후한서 고구려전에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힘이 세고 전투를 좋아하여 옥저와 동예를 모두 복속시켰다. 중국의 기록에 고구려가 처음 등장하는 태조왕 시기를 기록에서 분풀이 한 의도는 수모를 만
오룡의 역사 타파(74) 대한제국, 부정축재의 끝판왕들은 최고 권력자의 비호를 받았다 1935년 12월, 식민지 조선 최대 갑부였던 민영휘가 84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잡지 삼천리는 '민영휘 재산은 어디로 가나'라는 글을 실었다. 그의 재산 규모에 대해 삼천리는 '평안감사 시절부터 긁어 모으고 황실 내탕금을 이리저리하여 모은 것이 4000만원이고, 그 외에 중국 상해 회풍(홍콩상하이)은행에 적립하여 놓은 것이 수천만원'이라 한다. 4000만원은 현재 화폐로 약 1500억원에 해당한다. 대한제국 시기에 탐관오리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대표격인 인물로 지목된 사람들이 있다. 백성들의 원성을 받던 여흥 민씨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민영휘는 권력을 이용한 토색(討索재물을 탈취함)으로 치부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그의 부(父) 민두호도 돈을 긁어모아 '쇠갈구리'라고 불렸으며, 그가 추천한 민영주의 별명은망나니였다. 무전취식이 주특기였던 그는 벼슬을 얻은 후에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부자가 되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민영휘가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고종의 신임을 얻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남정철이 과거 급제 2년이 채 안 되어 평안감사가 되었는데, 왕비의 친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