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의 역사 타파(61) 이 시대의 대기업주들이여 아직 멀었다 - 김만덕 에게서 배우라 김만덕은 1739년 제주에서 양인 신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아가 된 후 기녀에게 의지하여 살았기에 기적에 이름이 올라 관기가 되었다. 20세가 지나 관아에 억울함을 호소하여 양민 신분을 회복했지만 만덕은 결혼하지 않고 경제적 자립을 택했다. 상업에 종사하여 거상이 되었다. 당시로는 여성의 직업이라 생각조차 못했던 객주에 도전할 생각을 했다는 발상은 시대를 앞서서 성차별을 극복한 것이다. 그 성공 과정에서 만덕은 아마 기존 제주의 상권을 장악한 객주, 상인들과 경쟁하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만덕은 늘 검소하게 살았다. 만덕은 정정 당당하게 장사했다. 그녀가 50대 중반이던 1792년부터 제주에 흉년이 들어 수천 명의 사람이 굶어 죽었다. 흉년이 계속되자 1795년, 조정에서 구호미를 보냈지만 바다를 건너오는 도중 수송 선박이 침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만덕은 전 재산을 털어 육지의 곡식을 500여석 사들여 십분의 일은 자신의 친족을 살리고, 나머지 450여석은 구호 식량으로 쓰라고 관아로 모두 보냈다. 이듬해 정조가 제주 목사에게 김만덕의 소원을 물어보라는 명을 내리자,
오룡의 역사 타파(60) 꽃처럼 아름다운 화성 - 미완의 개혁,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정조실록 15년) 정조는 1792년 초여름 정약용을 조용히 불렀다. 수원에 새 성을 쌓겠다는 뜻을 밝히고 좋은 방책을 강구해 보라고 이르고 관련 도서를 내려주었다. 정약용은 고심 끝에 기중가(起重架)의 설계 도면을 바쳤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도구였다. 1794년 2월 시작된 공사는 2년 7개월만에 완성됐다. 성 쌓기에 일반 백성이나 승군(僧軍)을 불러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인부와 장인을 모집해 노임을 주고 거처를 제공했다. 5만5000명의 인부가 몰렸다. 정조는 내탕금 86만냥을 내놓았다. 화성은 팔달산을 끼고 낮은 구릉을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성 중간에 작은 냇물이 흐르며 평지에는 방어호를 둘렀다. 총 둘레는 5520m이다. 성의 특징은 자연석이 아닌 벽돌을 섞어 사용하면서 돌의 규격을 맞추어 축조했다는 점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읍성의 기능과 방어의 역할도 겸했다. 정조는 왜 막대한 물량을 들이면서 성을 쌓았을
오룡의 역사 타파(59) 살아남은 자들이 남긴 슬픈 고백, 우리는 지금 어떤 고백을 해야하나 배워라, 난민 수용소에 있는 남자여! 배워라, 감옥에 갇힌 사나이여! 배워라, 부엌에서 일하는 부인이여! 배워라, 나이 60이 넘은 사람들이여! 학교를 찾아가라, 집 없는 자여! 지식을 얻어라, 추위에 떠나는 자여! 굶주린 자여, 책을 손에 들어라. 책은 하나의 무기다. 당신이 앞장을 서야만 한다. 저항 정신이 충천했던 시인은 히틀러가 집권한 독일에서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었다. 브레히트는 허무주의의 관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사회 참여시를 쓴다.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적극적인 진실을 말하겠다는 그는 배움을 찬양함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치 독일이 서유럽을 점령하자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르크시즘을 지지했던 시인이 주거지로 택한 곳은 자본주의 문화의 중심이었던 할리우드였다. 그 즈음에 브레히트가 남긴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는 수많은 친구와 가족들을 처참하게 잃고 살기위해 도망친 자신에 대한 절망과 자괴가 가득하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아직도 할 수 있습니다. 전선이야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음력 9월16일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생즉필사 사즉필생(生卽必生 死卽必生)의 준엄한 훈시를 했다.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감히 우리 배를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아라 거제 현감 안위의 배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왔다. 이어 중군장 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도 차차 지휘선 가까이 다가왔다. 이순신은 안위를 불렀다.안위야,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해서 어디가서 살 것이냐예, 어찌 감히 죽을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이순신의 위엄에 찬 질책에 안위는 황급히 대답하고 적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이어 김응함에게도 큰 소리로 외쳤다. 응함아,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해 대장을 구하지 않으니 그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당장 처형할 것이지만 전세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둔다그러자 김응함도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이순신 장군의 형제 이름은 희신, 요신, 순신, 우신이다. 중국의 전설 같은 임금들인 복희씨와 요순우탕을
배신의 트라우마 -권력이 나서서 말하거나 강요하지 마라. 국채 1300만원은 바로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직결된 것으로,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인데, 국고로는 해결할 도리가 없으므로 이천만 인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아 국가의 위기를 구하자 대한매일신보의 1907년 2월 21일자 보도는 뜨거운 반응을 나타냈다. 전국의 각계 각층의 범국민적 운동으로 여성들의 참여가 단연 돋보였다. 가락지와 비녀를 팔고 양식과 반찬값을 줄이고, 머리카락을 잘라 판 돈을 기부했다.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되자 통감부는 국채보상기성회의 간사 양기탁을 공금횡령 의혹으로 체포하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 무산시켰다. 일천만 한 사람이 1원씩을 슬로건으로 1923년 벌어진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총독부를 자극하여 경성 제국대학 설립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다수가 글조차 모르는 현실에서 대학 설립은 한계가 분명했으나 자발적인 운동이었음은 분명하다. 권력이 곤궁해지면 자발적인 성금 모금 보다는 강제성이 강화된다. 국방헌금, 애국헌금 등의 명목을 붙여 애국심 고취와 일제에 충성하는 지표로 삼았다. 친일화가 김은호는 금채 봉납도에서 여성 단체 인사들이
660년 7월,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에 가로막힌 신라가 승리한 원인은 관창의 죽음이다. 열여섯 살의 어린 관창을 죽음으로 인도한(?) 이는 그의 부친이었다. 네가 나이는 어리지만 굳은 의지와 기개가 있다. 오늘이야 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는 권고를 듣고 단신으로 뛰어 들었다가 죽었다. 화랑이란 무엇인가. 화랑제도는 신라 진흥왕때 국가 조직으로 정비된 것으로미소년을 뽑아 화랑으로 삼고, 그 아래 젊은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시켰다고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화랑은 14,5살된 진골 출신이 뽑혔으며, 그를 중심으로 수백여 명의 낭도가 형성 되었다. 나이 어린 진골 귀족의 미소년이 수백여 명의 낭도를 데리고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훈련을 시킬 수 있었을까. 정치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사적인 정치 기반으로서의 성격도 있을 것이다. 진흥왕이 화랑제도를 정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원시적인 국가의 단계에서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변신을 꾀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과거 잘못된 역사 교육의 폐단 중에 하나가 애국적인 역사관의 강조였다. 그로인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일본이 백제 부흥을 지원했다. 663년 백강하구에서 일본군 4만 2000명의 군대와 300척을 격퇴하면서 일본에 대한 외교적 태도가 바뀌게 된다. 그동안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며 천황 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夜郞自大)적인 태도를 표출하기도 했다. 일본 서기 등이 편찬되면서 소위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에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이런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753년 경덕왕 12년에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자 당시 일본의 실세 권력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자신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세력의 여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그 당시 일본의 병권을 모두 장악했었고 그의 집은 사찰이나 궁전에서만 쓸 수 있었던 큰 주춧돌
우리가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대중은 아직도 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전이 느린 진짜 이유는 그 소수마저도 다수의 대중보다 실질적으로 더 현명하거나 더 훌륭하지 않기 때문이다당신의 온 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지라.고 핸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했다. 후보자에 비해 유권자들이 온 몸을 던져 투표하지 않기 때문일까. 6.4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예상보다 낮았다. 국민의 관심을 끌만한,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공약이 없었기에 관심이 없었던 것일까. 1430년,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에 대한 찬반 의사를 묻는 투표를 실시했다. 17만여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8000여 명이 찬성, 7만4000여 명이 반대했다.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오늘날의 국민투표와 비슷한 것이다. 투표의 내용은 토지 1결당 10두의 세금으로 확정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전까지는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수확량을 확인하고 세금을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적용됐다. 이는 관리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세금이 정해졌기에 문제가 생겼다. 세종은 관리들의 의견을 들은 후에 최종적으로는 백성들에게
진짜 민심을, 언론이 표현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문제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는 순보서(旬報序), 내국기사(內國紀事), 각국근사(各國近事),지구도해(地球圖解)와 논설로 구성되어 1883년 박문국에서 발행했다. 열흘마다 인쇄된 한성순보는 주로 개화의 이유와 개화의 성과를 홍보하기 위해 국가가 주도한 신문이었다. 독립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의 각종 민간 신문이 발행된 대한제국 시기에는 지면이 정리되어 관보(官報), 외보(外報), 잡보(雜報), 논설, 광고면으로 세분화 되었다. 관보는 정부가 발표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새롭게 정리한 것이었고, 외보는 외신기사였다. 잡보는 기자가 직간접으로 취재한 것으로 오늘날의 보도기사라고 볼 수 있다. 통신 수단도 부족했고 지방 주재 기자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잡보의 내용은 이렇게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 누구의 전언에 의하면.....한다더라의 형식으로 기사를 썼다. 최첨단의 방송 장비와 최대의 언론 환경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방송과 신문들도 잡보 수준의 기사를 자주 남발 한다. 카더라와 아님 말고의 뉴스로도 부족한지 세월호 참사 현장에 취재도 가지 않고 보도한 기사들은 유언비어에 불과하다. *
우리 역사속에 맥아더는 위대한 군인으로 남아있다. 1926년 일본왕 히로히토가 취임한다. 그는 연호를 '쇼와'라고 발표한다. 일본어로 '쇼와'는 평화와 계몽을 의미한다. 젊은 시절 영국에 유학했던 그는 훗날의 에드워드 8세를 만났는데 이때가 자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말했다. 영국에 선전포고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슬프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 1930년대 들어서 일본은 급격한 군국주의 노선을 채택한다. 31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37년 중일전쟁, 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육군상 스기야마는 2개월 이내에 전쟁을 완료 하겠다고 일왕에게 보고했다. 일본은 장기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2차 대전 종전후에 그는 기회가 있을때 마다 전쟁을 반대했다고 말했지만 그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이유는 해군의 준비가 미흡하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반대가 아닌 기습의 성공 여부였던 것이다. 공격이 성공하자 축하 연설을 한 것으로 보아 군부의 꼭두각시가 아닌 총 지휘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로히토가 무기력한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맥아더가 보여준 전략적인 판단이었으리라. 수줍고 내성적인 안경쓴 작은 체구의 그가 보여준
1637년 1월 30일은 조선 역사 최악의 수치스런 날로 기억됐다. 용포를 벗고 청의(靑衣)를 입은 인조는 백마(항복의 표시)를 타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섰다. 송파 삼전나루에서 청 태종 홍타시를 향해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렸다. 세자를 비롯한 조선의 대소신료들은 모두 울었다. 청 태종은 항복 의식 중에 고기를 개(犬)에게 던져 주었다. 항복한 조선은 개였으며, 고기는 황제의 은전이었다. 무능한 왕은, 리더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왕은 세 번이나 궁궐을 버렸다. 1623년 반정을 성공하여 중립외교의 광해를 몰아 낸 서인은 권력을 장악했지만 민심을 장악하지 못했다. 1624년 이괄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은 시작에 불과했다. 삼전나루에서 그토록 무시하던 오랑캐에게 항복한 인조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백성들의 눈이 많은 남대문(숭례문)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서대문(돈의문)으로 우회했다. 돈의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한 노파가 손뼉을 치며 통곡했다. 강화도에서 검찰사 등이 술판을 일삼아 백성들을 다 죽였습니다. 누구의 허물입니까. 네 아들과 남편이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몸만 남았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연려실 기술」에 그날의 참상을 기록해 놓았다. 구중궁궐을 버
혁명과 쿠데타는 순간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한다. 역사에서 반란이라고 정의하는 모든 사건은 초반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담의 난도 그러하다. 비담은 김유신이 경주를 비운사이, 선덕여왕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제대로 돌볼수 없는 틈을 노렸다. 상대등 비담은 이찬 알천이 지키는 왕궁을 점령하지 못한다.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전의 경험이 무수했던 알천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왕궁의 수비를 뚫지 못할 때 부터 비담은 실패한 것이다. 비담은 경주 인근 명활산성을 점령한 후 월성에 군대를 배치한 김유신과 열흘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지만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의 큰 유성이 월성쪽을 향하여 떨어졌다. 비담은 여왕이 패할 징조라며 반란군을 독려하였고, 옛부터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한 김유신 군이나 왕실도 크게 흔들렸다. 이에 김유신은 '길흉은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며, 덕이 요사스러움을 이기는 것이 이치'라며 군대를 안심시켰다. 그런 후 허수아비에 불씨를 살리고 연에 달아 하늘에 띄워 보낸 후,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말을 비담군 진영에 퍼뜨렸다. 비록 믿기 힘든말 이었지만, 열흘간의 싸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