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룡의 역사 타파(73)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했던 송강 정철, 최고의 감성주의자(?)가 남긴 교훈 권력욕의 화신, 암군(暗君) 선조의 충직한 신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내는 구구절절 주옥같은 가사 문학을 남긴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 또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고 강직하고 절개가 있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했다 선조 실록과 선조 수정실록에 실려있는 송강 정철에 대한 극단적인 평이다. 1589년 10월, 선조 앞으로 한 통의 비밀 장계가 올라온다. 정여립의 역모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정철이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정언신 대신에 정철을 우의정으로 삼아서 재판을 맡겼다. 크게 노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린 걸까. 정철은 역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이 죽은 뒤에도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인다. 3년이나 이어진 수사기간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만 천여 명. 조선 최대의 옥사, 기축옥사다. 조선의 국법에는아이와 노인은 고문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었지만, 정철은 이발과 그의 80살 노모를 때려죽이고 10
오룡의 역사 타파(72) 휴일도 없이 일한 노비들, 오늘날의 비정규직처럼 언제든지 버려졌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노비는 단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지배층들은 누구나 노비를 거느렸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사고 팔았다. 1398년 7월 6일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무릇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00~500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을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에서 40살까지는 400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1살 이상인 자는 300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한 마리와 노비 열 명을 맞바꿨다. 임진왜란 당시 말 한 마리 값이 은자 열냥 정도라고 했으니 노비 한 명의 값이 은자 한냥에 불과 했던 셈이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는 동산이었다. 경국대전에는 매매에 관한 규정이 있는데 가옥을 매매하거나 전답을 매매할 때 15일 안에 무를 수 있고 100일 안에 등기를 해야 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노비도 또한 이와 같
오룡의 역사 타파(71) 애국과 국기에 대한 경례에 대한 짧은 생각 - 지금은 충군애국의 전근대적인 시대는 아니다. 1898년 10월 29일 서울 종로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단상에는 태극기가 걸렸고 의정부 참정대신 박정양, 중추원 의장 한규설을 비롯한 10여명의 정부 대신들까지 참여한 독립협회의 관민공동회였다. 지식인, 중인, 향리, 성균관과 사부학당의 학생, 신식학교 학생, 부인, 상인, 승려, 천주교도, 기생, 광대, 백정 등 신분과 관계없이 1만여 명의 인파가 몰렸다. 개막 연설은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했다.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몰각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국편민 하는 길은 관민이 합심한 연후에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 차일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해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년 이어지도록 하게 합시다. 당시에 가장 급진적인 단체였던 독립협회의 생각도 나라는 백성의 것이 아니라 임금의 것이라 생각한다. 애국은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위하는
오룡의 역사 타파(70) 염치없는 양아치와 야합하는 정치인들깜냥이 안된다는 의미로 통했다. 815 광복 직후에 거지들의 조직이 분업화되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얻어 오는 것을 상납 받아 생활하는 왕초, 왕초의 시종 역할을 잘해서 얻어 먹는 자들이 똘마니였다. 날치기는 막무가내 빼앗아 오는 자, 꽃제비는 몰래 훔쳐 오는 자(지금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북한의 어린 아이들을 지칭하는 은어)로 조선 후기에 소매치기에서 생성된 용어였다. 장타령은 각설이 타령의 평범한 예능을 보여주고 먹을 것을 요구하는 자들이었고, 남이 버린 물건을 주어오는 자들을 쓰레기라 부르기도 했다. 이들은 곧 넝마주이로 불렸다. 구걸꾼은 남의 집이나 점포 앞에서한 푼을 요구하며 떼는 쓰는 자들이었다. 양아치라는 말은 한국전쟁 이후의 빈곤기에동냥아치가 변한 것으로 날치기에 가까운 자들이었다. 주로 깡패와 건달 사이를 오가는 자들로 거지 근성을 버리지 못한 이들을 부르는 비속어의 상징이었다.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자들로 돈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는 자들을 이렇게 불러온 것이다. * 야하다라는 말은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농촌을 떠난 많 은 젊은이들이 직
오룡의 역사 타파(69) 영조의 위민 사상과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자화자찬 허세의 차이점은 주어가 있고 없음 이다 18세기 이후 한양에는 거지들이 많았다. 왕이 사는 곳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오래된 왕도사상의 영향 때문이다. 전국의 거지들이 몰려든 혜화문 부근과 용산의 활인서에서는 날마다 죽을 쑤어야만 했다. 한 그릇 죽을 먹기위해 3000명의 굶주린 거지들이 몰려 들었다. 거지들의 대부분은 기근과 흉년으로 고향을 버리고온 빈민들 이었다. 왕이 나서서 배고픈 백성을 구휼하는데 신하들이 모른채 할 수 없었다. 서울의 부자들(대부분이 고위 관리였을)은 이때부터 거지들을 위해 빈자떡을 만들었다. 이 말이 변해서 유행가요에 나온 빈대떡이다. 돈 없으면 집에가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에 나오는 빈대떡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영조 17년(1741) 좌의정 송인명이 도성에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자가 매우 많으니 5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친히 살펴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자원하는 자는 양식을 주어 보내고, 한양에 남고자 하는 자는 진휼청으로 하여금 구제토록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에 영조는 백성들의 사정이 이와 같은데 군왕이 그것을 듣고 떠날
오룡의 역사 타파(68) 새나라의 어린이와 국민교육헌장, 애절양 그리고 진시황과 황희 -욕심이 없는 권력은 영원하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장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광복 직후 나온 윤석중이 작사한 창작 동요 새 나라의 어린이다. 1절보다 더 와닿는 내용은 2절이다. 1945년 815 당시의 어린이들이 원했던 세상은 부지런히 일하지만 서로 돕고 나누는 나라, 정의로운 나라의 건설이었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 헌장은 각종 기념식과 기념일까지 제정되어 1993년까지 국가 주도하에 이어져 왔다. 한민족으로서의 긍지, 개인 윤리 의식의 고취, 국민이 지켜야 할 도리, 개인과 국가의 일체감 형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시절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어쩌면 그런 정신이 일정부분 시대적 공감을 얻은 측면이 있었기에 영화 국
오룡의 역사 타파(67) 조선의 벽서와 괘서, 그리고 대한민국 대자보와 찌라시 1547년 9월 18일 양재에 붉은 글씨의 대자보가 붙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여주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말한다. 윤씨는 동생인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장악하고,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벽서에 등장하는 이기는 윤원형과 손잡고 젊은 사림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윤원형 일파는 벽서를 권력 강화의 기회로 이용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벽서 사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외척과 일부 훈구세력들은 을사사화 때 쫓아내지 못한 선비들을 숙청하고, 20년 동안 독점적 권력을 유지했다. 국가의 기강은 무너졌고, 유랑민은 속출했으며 민심은 흉흉했다. 고리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3년 동안 왕조를 조롱했다. * 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는 대자보가 넘쳐났다. 1980년 광주에 대해 왜곡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땡전 뉴스에 맞선, 미처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대신 전하는 대안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자보
오룡의 역사타파(66) 조선의 특권층 조기교육 - 인격을 앞세운 통치를 위해서 였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경제력이다. 이것은 인격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가진 무기도 본질적으로는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골적으로 경제력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들이 경제력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그들은 지적인격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자신들의 통치에 순종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받은 조기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쓰셨고, 세 살 때는 다과를 받으시자 목숨 수(壽) 자나 복 복(福)자 찍은 것만 잡수시고 () 또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자와 넉넉할 부(富)자가 나오자, 치(侈)자를 손으로 짚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이것이 사치다라고 하셨다. 조기교육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에서도 실시되었다. 특권층 가문의 조기교육도 오늘날의 조기교육을 뺨치는 수준이었다. 고종 때 나온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오룡의 역사 타파(65) 백성 버리고 도망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 그는 강화도에서 행복했을까? 1231년 몽골의 기병이 북계를 휩쓸었다. 안정기를 누리던 고려의 무신 정권은 맞서 싸우기보다 피난을 선택했다. 교정도감 최우에게 강화도 피난을 권한 사람은 풍덕군(지금의 개풍군)의 승천부 부사 윤린이었다. 윤린의 말을 들은 최우는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고종에게 강화로의 천도를 강요한다. 1232년 7월 6일, 강화도 피난길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드디어 천도하니 때마침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졌다.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벼슬아치와 양가(良家)의 부녀들도 신발을 벗고 갈 지경이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피난의 아비규환을 뚫고 강화로 온 사람들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방치된 본토의 백성들은 30여 년간 몽골의 말발굽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강화로 도망간 왕과 무신들을 위해 세금을 바쳤다. 몽골은 수시로 쳐들어 왔으니 삶과 죽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강화의 원주민들은 어떠했을까? 피난 온 개경 사람들은 다수가 권력자이거나 관련
오룡의 역사 타파(64) 온달은 영웅이 아니다 - 이 땅을 지켜낸 진정한 바보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니 왕이 놀리며 말했다.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을 가야 되겠다. 온달에 대해 사관 김부식은 왜 '바보'라고 기록했을까. 온달은 왜 '바보'라고 불리워진 것일까. 현대사의 전직 대통령에게도 '바보'란 표현이 쓰인 것을 보면 실제 바보는 아닐 것이다. 온달이 바보인 이유에 대해 삼국사기 열전 제5권에 명확한 이유가 나온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때 사람이다. 용모는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빛이 났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발을 걸치고 시정(市井) 사이를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온달이 바보라고 불린 이유는 겉모습 때문이었다. 한없이 착했지만 웃음이 날 정도로 못생겼다. 남루한 옷차림으로 동냥을 해서 효도를 다하는 그를 국가는 외면할 수 없을 만큼 유명 인사였다.온달을 찾아 온 공주가 황당한(?) 프러포즈를 하자 이는 어린 여자가 하기에 마땅한 행동이 아니니, 필시 너는 사람
오룡의 역사 타파(63) 찬란했던 백제의 한성 시대를 마감하게 만든 개로왕의 토목공사 나라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宮室)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蛇城, 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검단산) 북쪽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개로왕의 풍납토성 보수공사 관련 기록이다. 개로왕(재위 455~475년)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백제왕이다. 개로왕의 비극인 동시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백제 몰락의 시초였다. 적자재정으로 궁핍해진 백제는 군대의 유지조차 힘들어 졌고, 백성의 징발도 어렵게 된다. 남진정책의 기회를 노리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 군대를 보내 불과 7일만에 한성을 함락 시킨다. 개로왕은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게 붙들렸다. 이 고구려 장군들은 말에서 내려 개로왕에게 절한 뒤에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서는 아차산(풍납토성 건너편, 천호대교 북단)
오룡의 역사 타파(62) 선조와 이승만의 닮은 꼴, 다른 꼴 -반복되는 역사의 희생자는 민(民) 임진왜란은 음력으로 1592년 4월13일(양력 5월23일) 시작됐다. 선조는 4월 30일 새벽에 한양을 탈출했다. 백성들의 분노가 형조와 장례원을 불태운 것으로 볼 때 선조에 대한 당시 한양의 민심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는 개성평양영변을 거쳐 6월 22일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했다. 조선의 영토에선 최전방이지만 그에게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명나라 망명 계획을 포기했다. 그 해 6월 26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가 선조를 푸대접 할 것으로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였다. 명은 선조가 국경을 건너오면 망명 정부를 압록강 인근의 전방 군사기지인 관전보에 마련해 줄 계획이었다. 선조는 이때쯤 체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 1950년 6월27일 새벽 2시, 대통령 이승만은 주저없이 서울역에서 비상 열차를 탔다. 장관들도, 군 수뇌부도, 국회도 모르게 혼자 가버렸다. 국군 통수권자가 위험에 빠질까봐 비밀유지를 위해 새벽에 몰래 대구까지 내려간 것인지,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한 대통령은 다시 대전으로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