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조선의 25대 철종이 그러하다. 왕족이었지만 역적의 후손으로 태어나 유배지를 전전한 그에게 붙은강화도령이란 별칭부터 친근한 왕이다. 1849년 6월 헌종이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죽자 왕으로 옹립된 철종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다. 수렴청정을 하던 대비 순원왕후의 지시에 따라 천주교 신자로 사사된 철종의 할아버지 은언군과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살다가 죽은 아버지의 기록이 세초(洗草)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의 기록이 빠져있을 때 추론을 더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사실이 완성되는 순간이 있다. 헌종이 승하한 이틀 뒤인 6월7일 영의정 정원용은 철종을 모시러 강화도로 떠났다. 그가 70여년간 쓴 「경산일록」엔 실록에 없는 그날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갑곳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왕의) 생김새도 연세도 몰랐다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사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 였다. 14살부터 5년동안 아버지도 없이 형과 함께 가난하게 살아가던
1592년의 인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은 조선의 사대부와 왕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줬다. 백성은 분노했지만 그 뿐이었다. 하지만 떨어진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걷잡을 수 없었다. 신분제 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등장한 수많은 한글소설, 판소리와 사설시조는 양반을 조롱했지만 양반을 동경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18세기 이후 정착된 장자상속과 모내기로 성장한 부농의 등장은 수많은 놀부와 흥부를 만들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신분의 상징이었던‘양반’에 대한 명칭은 이놈 저놈 하듯이 이 양반 저 양반이라 부르는 호칭으로 전락했다. 공명첩을 사서 돈으로 된 양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부농과 상인들에게 해당 될 뿐이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신분제 국가로 출발했다. 삼봉 정도전이 불량인물로 낙인된 조선전기는 신분제의 적용이 엄격했다. 원래 양반은 문관인 동반과 무관인 서반을 지칭했다. 4대조 이래로 9품 이상의 관직에 나가지 못하면 양반의 신분에서 탈락했다. 지배층의 비대화를 막고 소수의 권력 독점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3년마다 실시된 식년시 대과 시험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화폐는 996년 고려 성종때 만들어진 건원중보이다. 조선 건국 후인 1423년 세종 5년에도 조선통보를 발행했으나 유통되지 못했다. 교과서에 널리 유통된 것으로 알려진 상평통보는 1633년 상평청을 통해 주조된 것이다. 몇 번의 폐기를 거듭한 상평통보는 1678년 숙종대에 재발행 된 후에야 전국적인 법화로서 정착된다. 광범한 유통에도 불구하고 상평통보는 신뢰하기 어려운 화폐였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양은 비슷했지만 불량품이 너무나도 많았다.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거래시에 동전을 자세히 살펴보는 장면을 추가해도 어색한 장면은 아니다. 상평통보 제작을 관리 감독하는 관청이었던 호조는 개인에게도 특허를 내주었고, 지방의 감영이나 군영에서도 찍어냈기 때문이다. 통용되는 지역마다 구리의 함량이 다른 것은 물론 고의적으로 비싼 구리 대신 철의 함량을 높여 부정축재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실학자 유수원은주조한 성분이 분명치 않고, 무게도 서로 다르며 두께와 넓이마저 다르다고 기록했다. 화폐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상평통보의 질이 나빠질수록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은 올랐다. 조선 왕조가 취한 방법 중
충무공 이순신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는 원균의 칠천량 패전과 죽음. 그를 비난하는 말 중에 원균의 편이었던 서인조차『선조수정실록』에서 원균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하여 비판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는 당시 시작된 붕당의 폐해로 인해 군인들이 당한 피해의 일부일 수 도 있다. 당시 서인의 영수격이었던 윤두수는 원균을 일러 친족이라 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다. 윤두수와 원균의 관계가 실록에 단 한 마디 나올 정도인걸로 보면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친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는 시기에 승자인 서인 측에 가담해 있던 아들 윤방의 영향도 있어 윤두수는 미화되었지만 원균은 그 반대로 오히려 서인들의 무능과 비리를 죽은후에 혼자 다 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으로 보면 윤두수는 원균을 자신의 정치적인 승리를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넘어가 이용당한 원균의 책임이 없다 할 순 없다. 처음 부산 진공을 건의하여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리고 이순신이 파직되자 슬그머니 손을 뗀 윤두수,그 후 칠천량 패전의 책임은 권 율, 원균의 야전군 장수들에게 돌리는 윤두수의 정치적 능력은 탁월했으니
신라 애장왕 10년 6월에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었고백제 의자왕 19년 4월에 병풍에 그린 개가 세상으로 내려와 왕궁을 향해 짖었다. 고구려 봉상왕 8년 9월에 귀신이 산위에서 울고 별이 달을 침범하였다. 보장왕 19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사흘동안 핏빛으로 변했다. 신라말 왕위 쟁탈전은 극심했으며 애장왕은 숙부에게 암살당했다. 의장왕의 실정은 멸망의 원인이었고, 봉상왕은 쫓겨나 아들과 함께 자살했으며, 보장왕은 당나라의 포로가 되고 700년 고구려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들이다. 기록 그 자체만으로 보면 유언비어가 분명하다. 주술적이며 엽기적이라 할 만하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내용만을 취사선택한 유학자 김부식이 다소 황당한 내용들을 남긴 의도는 무엇 때문일까. 김부식은 기록했다.죽은자의 피가 흘러서 방패가 떠내려갈 지경이라고. 삼국간의 전쟁이 남긴 피해의 단면이다. 그는 사관이며 시인이다. 형용사화된 기록을 허구라고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온통 기름 투성이로 범벅된 여수 앞바다 상황에 대해 해당부처 장관이 1차 피해자는 GS칼텍스이고, 어민들은 2차 피해자라고 말했다가 구설에 올랐던 이유가 인기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는 뉴스는 사실적인
전 세계적인 공황은 식민지 조선에게도 영향을 준다. 1931년 서울의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경성전기 주식회사를 시영으로 전환하자는 시민운동이 일어났다. 1898년 1월에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윅 두 사람이 세운 한성전기회사는 1899년 4월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개통하여 운행하였다. 그보다 먼저 1890년 4월 최초로 민간 전등이 가정에 보급되었다. 1904년 7월 한미전기주식회사로, 1915년 9월에 경성전기주식회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1961년 7월 1일에 한국전력주식회사(지금의 한국전력공사)에 통합된 회사다.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최초이자 최후의 시민운동은 비싼 전기요금 때문이었다. 조선인 뿐만이 아닌 서울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연합한 운동에 당황한 경성전기주식회사는 총독부와 경성부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부민관을 지어 경성부에 헌납하여 시영화의 급한 불을 껐다.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에선 연극과 영화, 음악을 공연했지만 평범한 경성 사람들은 관람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초호화 건물이었으니 건물 관람 대가로 비싼 전차와 전기 요금을 내야했다. * 역대 최장기 철도노조 파업의 단초가 됐던 수서발 KTX 법인이 뜨거운 찬반논쟁을 뒤로하고
조선시대에 관청의 잘못된 권력남용에 대해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들은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문고 인데, 이 북이 대궐 문루에 걸려 있었던 데다가 북을 치기위한 절차과정이 복잡했다. 상징적인 신문고 였지만 이를 아예 없애버린 연산군은 쫓겨났다. 반정에 성공한 중종 때부터 징을 쳐서 왕에게 호소하는 격쟁이 신문고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알려졌다. 언로를 막았던 연산군을 몰아 낸 중종에 대한 기대감이 격쟁을 만들어 낼을 것이다. 대궐에 들어가 치던 관행은 영정조 시기에는 왕의 궐밖 행사시에 징을 치는 경우가 많았다. 백성을 살피려는 군주의 마음을 이용하려는 백성들의 절박함 때문이다. 징을 친 백성이라 해도 왕의 행차를 막았기 때문에 형식적인 처벌을 받았다. 처벌을 감수할 만큼의 억울한 백성의 호소는 들어 주겠다는 뜻이었다. 왕조국가 조선은 백성의 마음을 얻기 위해 가장 억울한 이야기들을 직접 챙겨 들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는 사회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해법이니, 덕담이니 하며 식사를 하는 행사가 흔하다. 진짜 억울한 국민은, 사회적 약자들은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없다. 당연이 억울한 국민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
권력에 취한 연산군과 재물에 눈먼 황희의 아들 황수신을 보라. 자신을 비판하는 사림을 제거하기 위한 조작한 정치 음모였던 무오사화. 왕권에 도전한다고 생각한 훈구파를 몰아내기 급조한 갑자사화는 연산군이 연출한 것이다. 연산군에게 사림과 훈구는 자신의 향략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비판세력을 몰아내고 경연을 폐지한 그는 전국에 채홍사와 채청사를 보내 젊은 여성들을 뽑아오게 했다. 또한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원각사를 폐지한 뒤 그곳에 기생(당시에 운평이라 부름)들을 모아놓고 연방원이라 했다. 나라의 운세가 평안해졌고, 아름다운 꽃이 연달아 핀다는 뜻이니 정말 해석이 기가 찰 따름이다. 연방원에서 가무를 익힌 운평들이 수시로 대궐로 들어갔으니 그들을 흥청이라 불렀다. 왕이 운평에 의해 흥겨우면 나라도 흥할 것이라는 의미였다지만 연산군이 쫓겨난 이후에 흥청망청이 흥청과 놀다가 망했다는 사실로 널리 알려졌다. 구중궁궐에서 연산군이 흥청들과 어울려 있을 때, 흥청의 주변 인물들은 권세를 부렸다.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행패를 부린 그들에 대한 원망은 왕에 대한 뒷담화로 나타난 것이다. ◆ 세종의 치세기는 영의정 황희의 뛰어난 업무 추진력과
삼국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시대에도 노비는 단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 초기의 성군이라는 세종과 성종, 후기의 태평치세라는 영정조 대에도 노비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귀족과 양반은 오로지 글공부나 하고 국가백년지대계 운운하는 동안 말하는 짐승 들은 노동에 종사하며 주인의 필요에 따라 물건처럼 팔렸다. 양반집이면 누구나 노비를 거느렸고, 상속할 때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398년 7월6일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 무릇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5백 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을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에서 40살까지는 4백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1살 이상인 자는 3백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 때는 노비 열 명이 말 한 마리 값 -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한 마리와 노비 열 명을 맞바꿨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말 한 마리 값이 은자 열냥 정도라고 했으니 노비 한명의 값이 은자 한냥에 불과 했던 셈이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이
광해군 10년(1618) 8월, 반역의 주모자로 몰린 허균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와 몸통이 6개 조각으로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난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허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1589년 누이 허난설헌이 죽은 슬픔을 딛고 생원 시험에 합격한 허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면서 실시된 1594년의 과거 시험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평소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방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탓으로 관직 임용이 늦어졌다. 형의 도움으로 1597년 황해도 도사(종5품, 오늘날의 부도지사)에 임명되었다. 허균은 서울의 기생들을 임지로 데려가 별장을 짓고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다.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598년 보란듯이 문과 중시(문과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에 장원 급제해 조정의 중요 문서를 다루는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일년도 못가 방탕한 생활로 다시 해직되었다. 1601년 다시 복직되었으나 2년 만에 양반의 품위를 손상한 자로 탄핵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예조 판서가 된 형의 도움으로 1604년 다시 복직되어 황해도 수안 군수와 성균관 전적(교관)을 거쳤다. 1607
조선의 성균관 유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입학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던 최고의 국립대학이었다. 생원과 진사로 구성된 학생들은 대과 준비생으로 출세길이 보장된 예비관료였다.전원 기숙사 생활에 학비 일체를 국가에서 제공해 주며 최고 엘리트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입학은 까다로웠지만 졸업은 정해진 기한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성균관을 떠났으니, 시험에 합격하기까지는 학생으로서 품위유지를 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가 96회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조정의 부당한 처사, 훌륭한 학자에 대한 문묘배향 요구, 이단에 대한 배척 요구 등이 시위의 주된 내용이었다. 자신들이 배우는 학문과 어긋나는 일, 자신들의 신념에 배치되는 조정의 주장에 대해서 시위를 한 것이다. 이들의 시위에 대해 조선 정부는 굳이 막지도, 조종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유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은 유생들의 주장을 국가 발전을 위한 기회로 삼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은 시위 모의를 위해 몰래 숨어서 할 필요가 없었다. 재회(齋會)라고 하는 학생회와 유사한 자치기구에서 결정하면 행동으로 옮겼다. 명륜동에서 유소(儒疏: 유생들의 서
법은 산 사람을 심판하고 역사는 죽은 사람을 심판한다. 이런저런 변명과 각종 증거를 제시하며 저항(?)할 수 있는 산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때문에 죽은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휠씬 쉬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판사가 당대의 권력자들을 심판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지만 역사 학자들이 심판해야 하는 대다수는 권력자 들이다. 판사가 못하는 살아있는 권력자의 심판을 역사가는 죽은 다음에는 제멋대로 심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판사에 비해 역사가들이 정의롭다고 평가 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21세기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심판자는 누구일까? 얼마전 혼외아들 문제가 발단이 된 채동욱 검찰총장을 사퇴시킨 언론사 기자인 것 같다. 최고의 권력집단인 검찰 조직의 수장을 법률적인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사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면 말이다. 현실적인 법에서는 삼심제와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있지만 언론에서는 삼심제도 일사부재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최근의 채동욱 사건의 진실 공방은 법정에선 어떻게든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가 겪었던 사랑과 전쟁의 후유증은 오래 남을 것이다. 법적으로 임기제인 검찰총장을, 기사를 빙자한 막장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