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집권 국가를 완성한 삼국시대 이래로 수도 주변에는 산성도성을 쌓고 마지막으로 궁성을 지었다.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한 산성과 도성에 비해 궁성은 의장용 이었다. 광화문 뒤로 경복궁의 근정전 지붕이 외부에서 보이도록 지은 의미는 왕의 궁궐을 백성들이 쳐다 볼 수 있도록 한 의미가 담겨있다. 뒤로 보이는 백악(북악산)능선에 맞춘 근정전의 위치로 볼 때 백성의 마음을 하늘에 전달해야 한다는 왕의 마음가짐을 표현하려 했다면 지나친 확대일까? 몰락한 왕조의 궁궐은 일본제국의 식민 지배의 도구로 전락하며 철저히 농락당한다. 광화문은 허물어지고 근정전 앞에는 철옹성 같은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다. 총독부 뒤편에는 1939년 미나미 총독의 관저를 짓는다.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해방은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되고, 남한에 들어 온 미군 사령관 하지는 총독 관저를 그대로 사용한다. 지배 권력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변했다는 것은 조선총독부에 일본기 대신 미국기로 교체된 것으로 알게 됐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는 경무대로 불렸다. 정식 명칭이 경무대 대통령 관저로 12년 집권 기간 동안 철통보안(?)이 유지된 곳이다. 원래 경무
교과서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들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인물은 아니지만 최초의 인류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한국인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을사늑약 하면 을사오적과시일야방성대곡이 떠오른다. 때문에 황성신문에 논설을 게재한 장지연은 대표적인 저항 언론인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유명하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개와 돼지라고 비난했지만 고종과 일본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음인지 장지연은 3개월 만에 석방되어 복직했다. 이보다 앞선 1904년 5월 황성신문 논설에서 장지연은 백인종에 맞서려면 황인종은 일본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장지연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은 안중근도, 신채호도, 박은식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끝은 같지 않았다. 장지연은 1909년 10월에 경남일보 주필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15년부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1917년 6월 8일자 신문에는 내선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의 기사를 게재했다. *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가 현역 군인이었던 육군 소위
- 경강도, 동호도, 서강도, 마포강도, 용산강도 한강이다 - 한때 간첩이 득실(?) 거린 것처럼 생각한 시절도 있었다.자나 깨나 불조심보다도수상하면 신고하자가 더 중요한 표어였다. 국가의 중요한 시설물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주요 임무였기 때문에 고대로부터 적대국을 직접 염탐하는 일을 흔한 일이었다. 때문에 간첩은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한 일은 중요 시설물을 사진 찍고 그리는 일을 하지 않았을까. 지금이야 정밀지도를 매일 구글이 전달해 주고 위성사진을 실시간으로 검색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사람의 시야를 벗어나면 인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거대한 자연물은 일단 눈에 보이는 범위 안에서만 실체화 시켰다. 경계가 없는 바다를 나누어 동해와 황해, 남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유효하다. 때문에 여러 가지 논란이 발생한다. NLL 논란의 근본 원인도 선을 그을 수 없는 바다와 한반도 분단의 타율적인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한강도 마찬가지였다. 삼국시대에 벌어진 한강 쟁탈전의 의미는 영토의 분명한 선긋기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한강은 자연적인 국경선으로 방어에도 효과적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한강은 물이 흐르는 지역마다 부르는 호
종군 위안부와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1945년 8월15일. 해방(解放)의 기쁨은 만세로 표출됐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어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광복(光復)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해방의 사전적 의미는 구속, 차별, 속박,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또는 그 상태를 말한다. 광복은 빛을 되찾음 또는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이 빼앗긴 국권과 1945년 8월15일 다시 찾아 온 국권의 의미가 지닌 차이는 있는가. 1945년 8월15일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우리의 진정한 국권회복 시점까지 묻는다면 혼란스러워 진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우리 역사와 한반도 진출이라는 일본 우익들의 시각 차이만큼 역사 용어의 어휘 사용은 신중해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과 해방 3주년 기념식을 함께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광복 68주년 기념식 문구도 올바른 표현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1970년대까지의 신문과 방송은해방공간이나해방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단원 제목에도 민족의 해방과 국토의 분단이라 썼다. 물론 이승만 정권이 4대 국경일을 정할 때 광복
오룡의 역사 타파(33) 일제에 망가진 역사를 아직도 사용하는 우리 장충단과 신라호텔, 경운궁과 덕수궁-역사는 말이 없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안개낀 장충단 공원.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가수 배호의 중저음과 어울려 애수에 잠들게 한다. 1900년에 5군영인 어영청의 분원인 남소영 자리에 장충단이 건립됐다. 1985년 을미사변 당시에 일본 낭인들과 싸우다가 죽은 훈련대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군인들을 기리는 제단이었다. 1901년에는 개항이후 순국한 영령들을 추가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동작동 국립현충원과 비슷한 곳이다. 장충(獎忠)은 충성을 장려한다는 의미이며 현충(顯忠)은 충성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1904년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은 러시아를 기습공격하고 서울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만주로 가기위한 일본군들의 오락장을 짓기 위해 일본인 거류민단은 장충단 서쪽지역을 매입하여 유곽을 만들었다. 헐값에 강제로 사들인 곳이 대한제국의 초혼단이었던 장충단 주변이었다는 것은 일제의 의도적인 대한제국의 정신 말살이라 볼
-잃어버린 간도, 사라져 버린 백두산 정계비- 조선의 심마니는 산삼을 찾는데 청나라 인들보다 감각적(?)으로 탁월했다. 특히 만주 지역과 백두산 일대에서 청나라 인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했다.이러한 사실은 만주족인 청의 강희제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고향인 만주지역에 대한 오랜 봉금 정책으로 일관했던 청나라는 국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12년 청은 국경선 실측을 제의해 왔다. 조선에서는 예조참판인 박권을 접반사로 삼고 함경감사 이선부와 현지의 수령, 군관 등을 동행케 했다. 두 나라 대표는 실측을 위해 혜산진에서 백두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때 박권과 이선부는 힘이 부쳐 가지 못했고, 군관과 통역관만 백두산에 정상에 올랐다. 오라총관 목극동은 천지의 남쪽 비탈에 이르러 경계를 표시할 지점을 지정했다.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목극등은 정계비에 두 대표 이름을 새겨야 하는 형식 요건이 필요했다. 목극동은 무산으로 내려와 박권과 상의하여 두 강의 상류에 목책과 흙과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자고 합의했다. 그 경비는 청에서 부담하고 작업은 우리 쪽에서 맡기로 했다. 정계비를 설치한 곳은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으로 해발
▲ 정림사지 5층석탑 망국의 백제 수도 사비성에 남겨진 쓸쓸한 낙서(?) - 정림사지 5층석탑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어질 기억마저 모조리 차지하지는 못한다. 진 자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힘으로 살아남는다. 그 흔적인 문화유산앞에 서서 그 아련한 역사를 보노라면 감정은 오롯해진다. 전통석탑의 백미라고 하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푸른 하늘을 향해 날렵한 지붕돌 끝의 쳐들린 선이 너무나 아름다운 백제의 탑이다. 그 아름다운 백제 장인의 솜씨에 낙서해 놓은 (1층 탑신부에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명으로 새긴대당평백제국 비명)은 망국의 나라 백제의 아픔, 우리의 아픔을 처연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숱한 양민들을 살상하고 사비성 안의 궁성과 사찰을 불지른 소정방은 전과에 고무되어 공훈비를 새기기로 한다. 불에도 타지 않는 화강암의 5층 탑에 문사 권회소를 시켜 글자를 새긴다. 내용을 보면 출정한 중국 장수들의 공덕을 치켜올리고 잡아간 왕족, 백성과 정복한 땅의 내력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끝간 줄 모르는 이국 장수의 기고만장함이 느껴진다.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 떨어져 천상을 어지럽게 하고
- 누가 그를 조선의 국모라고 불렀나!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로 공전의 기록을 세운 명성황후. 극적인 죽음, 일국의 왕비가 침전에서 외국의 낭인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실은 드라마적인 요소를 지녔다. 역사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우리에게 준 충격은 가혹하다. 드라마와 뮤지컬의 성공으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한 인물로 복권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기도 했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며, 일제의 잔재라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명성황후 민자영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1866년(고종 3) 두 살 아래 고종과 혼인한다. 세도정치에 민감했던 흥선군 이하응의 선택은 분명했다. 여덟 살에 부친을 잃은 중전 민씨는 인현왕후의 후손으로 뼈대 있는 가문에다 어린 시절부터 『춘추』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간택의 중전민씨가 입궁 7년 만에 조선 최초의 살아있는 대원군을 축출하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은 중전 민씨가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정치적 반려자 또는 그 이상의 정책 결정권자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였다.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한국 최초의 신부를 기억하라! 김대건을 말하다. 역사교과서에 한줄로 정리된 인물 김대건은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다. 그런데 김대건에 대해서는 가장 불명확한 것은 그의 출신 신분이다. 워낙 비밀스럽게 종교활동을 했기 때문일까. 25년의 짧은 생을 살았기 때문일까? 그의 집안이 양반이었는지 평민이었는지 가늠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그가 추구한 것은 신분을 초월한 평등과 사랑을 구현하는 것이었으니. 1821년(순조 21) 김대건은 김제준(이냐시오)과 고(高)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이 살던 곳은 내포 지방 솔뫼로 지금의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이다. 그의 할아버지 김진후는 천주교를 믿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14년 사망했다.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에서 참수되었다. 할아버지 김진후의 아들 중 셋째 종한은 1816년에 참수되고, 종한의 딸은 1839년에 참수당하고, 이 딸의 사위는 1824년에 옥사했다. 또 작은할아버지인 선후의 손자 제교, 할아버지 김진후의 넷째아들 희연의 아들 제항은 1866년에 공주의 충청감영에서 처형되고, 김대건의 또 다른 숙부 제철의 아들 진식은 1867
오룡의 역사 타파(26) 고려- 몽골과 30년을 맞장뜨다, 그 중심에는 처인성의 김윤후가 있었다 태종 4년 8월, 다시 살리타이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청했는데,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원사]몽고의 원수 살리타이가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고려사] 1232년 12월 16일, 질풍노도처럼 내달리던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죽었다. 30여년간 대 몽골전쟁 최대의 승전은 고려의 정규군이 아닌 이름없는 부곡민과 승려 김윤후가 만들었다. 몽골군의 제 2차 침략이 벌어질 당시, 대칸 오고타이는 금나라 정복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살리타이는 아마 고려의 북방이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요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출병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가 금나라 정복에 참전하고 있었다면 지리적인 위치상 고려에 대한 원정을 다시 개시하기는 어려웠을테니 말이다. 2차 침략은 고려의 주요 거점에 대한 공격을 감했했다. 1차 침략이 충주와 청주였음을 감안하면. 대구까지 내려온 몽골군은 팔공산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을 불태워 버린다. 팔공산에는 공산성이 있는데, 몽골군은 아마 이 공산성을 공격하면서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 수지구 상현동 양지바른 광교산 능선에 정암 조광조 묘소 입구에 있는 절명시 내용이다. 역사 교과서에 크게 기록되어 시험에도 곧잘 나오는 기묘사화, 1519년 음력 동짓달 중종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조광조의 죽음에 대해서 긴 논평을 남겼다. 사신은 논한다.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 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두텁게 총애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한반중에 영문도 모른채 의금부에 끌려온 사헌부 대사헌 조광조는 자기변론도 못한채, 중종의 변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가 믿었던 중종도 자신과 같은 꿈을 꾸는 도학군주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자신을 죽이려는 것은 훈구파들이라고 믿었다. 정작 중종은 조광조를 빨리 죽이라고 재촉하며 밀지를 내렸다. 1482년(성종13) 서울에서 태어난 조광조는 17세에 평안도 어천역에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인근에 유
오룡의 역사 타파(24)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모르는 이 없을 시조다. 옛 선인들에게 글이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단심가는 정몽주를 대변한다. 뛰어난 정치가였던 정몽주의 시조 한편을 통해 절대적 신념과 훼절할 수 없는 가치의 정립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 앞에 충절의 상징성을 부여한다. 거기에 극적인 장치들이 더해진다. 훗날의 태종 이방원이 포은의 마음을 엿보고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의 하여가와 대비되는 타이밍의 절묘성이다. 자객 조영규의 쇠몽둥이로 선죽교에서 절명하는 장면은 비장미의 절정이다. 개성에서 죽은 포은은 1406년 태종6년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을 허락 받았다.용인 수지 풍덕천 근처에 이른 행렬의 명정(銘旌)이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묘지를 삼았으니 현재의 모현면 능원리다. 1337년에 태어나 1360년(공민왕 9년)에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본격적인 관리의 길을 걸었다. 당시의 대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정도전과는 뜻을 함께하며 권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