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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타파

<명성황후>, 뮤지컬과 드리마는 역사가 될 수 없다(?)

오룡의 역사 타파(28

- 누가 그를 조선의 국모라고 불렀나!

한국을 대표하는 창작 뮤지컬로 공전의 기록을 세운 <명성황후>. 극적인 죽음, 일국의 왕비가 침전에서 외국의 낭인들에게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실은 드라마적인 요소를 지녔다. 역사와 민족을 동일시하는 우리에게 준 충격은 가혹하다.

드라마와 뮤지컬의 성공으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조선의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한 인물로 복권하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기도 했다.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며, 일제의 잔재라고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명성황후 민자영은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의 천거로 1866년(고종 3) 두 살 아래 고종과 혼인한다. 세도정치에 민감했던 흥선군 이하응의 선택은 분명했다. 여덟 살에 부친을 잃은 중전 민씨는 인현왕후의 후손으로 뼈대 있는 가문에다 어린 시절부터 『춘추』를 읽을 정도로 총명했기 때문이다. 탁월한 간택의 중전민씨가 입궁 7년 만에 조선 최초의 살아있는 대원군을 축출하는 정치적 능력을 발휘했다.

1873년 고종의 친정은 중전 민씨가 단순한 왕비가 아니라 정치적 반려자 또는 그 이상의 정책 결정권자라는 것을 대내외에 알리는 계기였다. 을미사변이후 고종이 왕비의 죽음을 그토록 애도한 것은 믿을만한 정치적 동반자의 상실과 정치적 고립감도 한몫했을 것이다.강화도 조약(1876)이후 근대화를 통한 개화정책의 추진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재정확보였다. 1884년 김옥균이 어설프게 일으킨 갑신정변의 발발 이유는 국가의 재정을 틀어 쥔 중전 민씨와 민씨 세력의 방해도 원인이었다.

느긋하고 조용한 고종이 어느 날 화를 버럭 냈다. “남정철이란 놈은 정말 큰 도둑놈이구나” 그는 한때 평양감사 였는데 인척이 아닌 그가 고위직에 오른 이유는 재물을 많이 바친 이유였다. 감사 시절에 진기한 물건을 진상하는 남정철을 이뻐한 고종이 그를 청나라에 영선사로 보낸다. 이후에 평양감사가 된 민씨 척족인 민영준이 얼마 지나지 않아 큼직한 금송아지를 바치자 고종은 다시 흥분하며 말했다. “관서지방의 금덩이를 남가 놈이 다 해먹었구나”라고.

봉건왕조의 재정은 분리되지 않아 나랏돈을 왕이 끌어다 쓸 수는 있다. 개화정책을 추진하기에도 벅찬 가난한 조선이었기에 왕실의 삶도 윤택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고종과 중전 민씨는 딴 주머니에 극도록 집착한다. 지방관이 보내는 뇌물의 양에 따라 충성도가 결정되고, 그 액수에 따라 좋은 자리가 보장됐다.

세자의 건강을 기원한다는 명목으로 금강산 1만2천봉마다 돈 천냥, 쌀 한섬과 포 한필씩 공양했다. 1882년 군인들의 월급이 13개월이나 밀려서 터진 임오군란 당시에 구식 군인들과 도성 백성들이 궁궐을 침범했을 때 도망친 중전 민씨는 조선의 국모를 포기한 것이었다. 아니 이미 조선의 국모가 아니었다.

궁궐에서 도망친 그는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납치해 가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청의 간섭이 분해서 러시아를 끌어 들이려 했으나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실패한 후에도 민씨정권의 부패는 끝날 줄 몰랐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불러들인 청군이 화근이 되어 터진 청일 전쟁으로 수십만의 백성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근대적 국가로 이끌기 위해 위태로운 외교적 수완을 발휘한 것이라고 한다면 위안이 될 수 있으려나. 권력 유지를 위한 부패와 사치에 수탈당한 백성들의 저항을 진압하려고 외국군대를 끌어 들인 중전민씨가 대한제국시기에 명성황후로 추존된 것으로 그를 조선의 국모로 불러야 하나. 일본 제국주의 폭력적 야만성에 분노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가 죽은 15년 후의 조선 백성들에게 닥친 운명의 책임이 국모였던 그에게는 없단 말인가?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소장,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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