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색 머금은 여강을 품다 ‧ 걷다 ‧ 느끼다 여주 고달사터와 영릉의 소나무 숲 사이에 빛이 내렸다. 살아 백년의 저택이 아무리 호화로운들 죽어 만년 유택만 못한다고 했던가. 지금의 서울 내곡동 대모산에서 옮겨 온 여주 영릉(英陵)은 ‘해와 달의 모습을 띠면서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내려오는 형세’인 최고의 명당이다. 하지만 객(客)은 풍수와 지리에 과문(寡聞)한 때문인지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의 푸름이 먼저 보였다. 영릉은 4개의 돌로 받친 혼유석 2개를 놓은 합장릉이다. 살아서도 금슬 좋았던 세종과 소헌왕후가 혼유석에 나앉아 부족한 우리들을 지켜볼 것만 같다. “우리글을 만드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인데 뭐가 나쁘단 말인가”라며, 사대주의 학자들을 물리치던 세종의 단호함을 지키는 석상들은 듬직했다. 명성황후의 생가는 말끔하게 빛났다. 1873년부터 1895년까지 조선을 움직였던 중전민씨가 8년 동안 살았던 곳에서 만감(萬感)이 교차된다. 그가 남긴 역사의 상흔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낭인들의 날선 검에 쓰러진 중전민씨는 비극이지만 역사속의 그녀는 비애(悲哀)일 뿐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
유림(儒林)의 고장 안동은 묘사가 아닌 설명이 필요하다 그곳엔 이황도, 이육사도, 이상룡도 있다. 그리고 봉정사도 있다 봉정사는 결이 고운 절이다. 정성을 다해 쌓은 천연(天然)의 멋 그대로인 돌담이 정겹다. 그 위로 당당히 서있는 만세루를 지나면 절제된 대웅전이 눈앞에 나타난다. 말간 느낌의 공포(栱包)와 앙증 맞은 마당, 유려한 배흘림기둥의 극락전(국보15호)은 작지만 엄숙하다. 극락전은 기둥과 공포의 결구방식, 기둥과 기둥 사이에 가로지른 창방(昌枋) 위에 나무받침이 복화반(覆花盤, 꽃잎을 엎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보이는 건축 양식을 계승한 현존 최고의 건물이다. 그러므로 안동은 봉정사로 인해 또 하나의 가치를 얻은 셈이다. 봉정사의 참나무 숲길이 오래도록 변함없기를, 정연한 건물들이 아담한 봉정사가 화려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가지런히 합장했다. 더운 날의 강물은 존엄해 보인다. 물은 겨우겨우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1500리 굽이치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도산서원 앞마당에 도착했다. 서원은 정문인 진도문과 중앙의 전교당을 기준으로 청량산을 품듯이 안겨있는 형세다. 퇴계 이황 선생은 1557년부터 서당을 설계했다. 서당은 맞배지
영주 부석사에서는 색(色과) 공(空)이 존재한다. 가장 오래된 서원이 있다. 서원보다 오래된, 아름다운 절도 있다 부석사 근처에 소수서원이 있다. 은은하고 가지런하며 소박한 풍광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서원이다. 소나무 숲속은 ‘화보(?)를 찍으면 좋겠다. 산림욕을 하고 싶다.’는 말들이 나올 정도로 상쾌한 피톤치드를 느낄 수 있다. 서원 옆으로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경쾌했다. 물가에 세워져 있는 ‘겸령정’ 곳곳에 걸려있는 문장들은 공부보다는 휴식하기에 안성맞춤의 장소였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1543년,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은 백운동 서원을 세웠다. 성리학을 들여온 문성공 안향이 살았던 곳을 기리고,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함이었다. 최초로 세워진 백운동 서원은 퇴계 이황에 의해 1550년에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았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한 1868년에 살아남은 47개 서원중의 하나다. 순흥(順興) 들판을 가로질러 늦은 오후 무렵에 부석사에 도착했다. 작렬하는 태양은 작은 나뭇잎하나 말리지 못할 정도로 여름의 소백산맥은 강렬한 초록의 군상(群像)이었다. 일주문에서 올려다 본 범종루는 아득했다. 범종루에서 세 계단을 오르면 드디어 아홉단 석축 돌계단의 마지막인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여가는 것이다. 허영을 부리지 않은 수덕사 대웅전은 눈부셨다 정갈한 산세의 아름다움이 겸손하다. 비산비야(非山非野) 부드러운 내포의 길들은 시간을 품고 달려와 흘러내리는 치맛자락처럼 펼쳐졌다. 덕숭산의 고즈넉한 풍경은여름을향해 달려가는 초록으로 눈부셨다. 세속으로부터비켜 앉은위대한부처님이 허영을부리지않은 대웅전은 엄중했다.배흘림의 여유로운 기둥은 단아하고, 기둥 사이는 넓어서 안정감을 주니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어도 편안했다. 형형의단청을거부한주심포와무보정의700년맞배지붕은소멸하는시간을거부한채 여전히검소했다. 한국 불교의 5대 총림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통도사, 백양사) 중의 하나인 수덕사 대웅전은 백제 양식을 계승한 최고의 건축물이다.1937년부터 4년간에 걸친 해체·수리 작업 중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해 1308년(충렬왕 34)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에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수덕사의 여승’ 탓은 아니리라. 시공을초월한 영겁을만나기위한숱한 중생들의합장은하나로모아지지못하고바람을
삶의 속도를 늦추고 바라보는 부여, 부여는 백제다 부소산엔진하고굵은초록비가내렸다 풍경은 바람처럼 흩어졌다. 오래된 백제의 시간은 서울을 찍고 공주를 거쳐 부여에서 부서졌다. 산산히 깨진 백제의 왕궁을 복원하며 6좌평의 관청길을 걸어야 할 몫은 온전히 답사객의 몫이다. 얌전하고 고즈넉한 부여의 답사 안내판에 그려진 볼거리는 지나치게 친절하다. 부여가 주는 쓸쓸함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싱그러운 봄볕의 화창한 기운을 받으며 떠나는 것이 좋다. 사비성을감싸안은허물어진나성은붉은 속살을공개했다. 백제의 멸망을 지켜 보며 무너진 능산리의 절터에, 천진스런 7기의 고분군 위로 속삭이듯 봄비가 내렸다. 서쪽 산등성이는 8km로 추정되는 나성의 잔편이 완연히 남아있다. 그 아래 에 흔적만 남은 왕실의 원찰(願刹)에서 1400여 년 간 잠들어 있었던 금동대향로는, 나당연합군에게 도성이 함락된 시간을 뚫고 황홀한 자태로 남아있다. 목숨을 보전할 수 없었을 긴박했던 승려들이 다급하게 숨겨놓은 향로는 낙토(樂土)의 세상을 기원한 백제인들의 정성을 받아 연꽃처럼 피어난 것이리라. 이른 봄날,비뿌리는백마강은달빛이없어도 청승맞았다. “···그때에 포위를 당하여 너무 급하게 되자 임금과 신
소멸되지 않은 역사를 품고있는 강화도 꽃보다예쁜섬강화에는너무나 절절한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 강화는,땀과 눈물로 억척스럽게 지켜낸 민초의 땅이다. 고인돌을 품고, 38년동안 임금을 지켜낸 강화는 섬 전체가 박물관이다. 고난과 영광이 공존하는 우리 역사의 집약체이다. 민족사의 고비마다 등장한 강화에 온 답사객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것을기록할수없으리라. 눈에익혀서가슴에담고 가는게 순리이다. 강화에는 많은 길이 존재한다. 화려하거나 사납지 않은 무던한 길을 묵묵하게 걷다 보면 시간은 앞으로만가는것이아님을깨닫게 된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살기 좋았을 부근리에는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세계문화 유산의 상징적인 53톤 덮개돌은 계급의 위력을 보여주는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이다. 1232년 6월, 고려의 무신 집권자 최우는 섬으로 들어왔고, 강화는 강도(江都)라 불렸다. 왕도, 귀족들도 건너왔던 염하(鹽河)를 세계 최강의 몽골군은 건너오지 못했다. 지금은 사라진 고려궁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피란처로, 강화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됐다. 정조 6년(1782)에 준공되어 왕실관계 기록을 보관했던 외규장각은 18
명작들은 보고 또 보아도 그립다 걸음걸음 밟히는 경주에 가면 천년의 신라가 말을 건다. “절은하늘의별처럼많고,탑은기러기떼처럼솟아있다.”는일연스님의말씀은 확실하다. 경주는 발길닿는 곳마다 신라를 보여준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역사가 다시 천년을 이어져 거의 완연한 모습으로 숨쉬는 곳이 경주다. 경주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박물관에서 한나절을 보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박물관 뜨락에 있는 석조물들의 아우라에 빠져서 걸음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진 절을 옮겨온 것같은 고선사터의 3층석탑 앞에서 원효대사의 ‘무애가’를 읊조려야 화쟁(和諍)과 일심(一心)을 조금이라도 터득한 중생(衆生)이 되어 경주를 볼 혜안(慧眼)이 생길 것 같다. 근처의 월지(안압지)에는빛도 사람도가득찼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한가로운 풍류가 사라진 곳에는 달빛보다 강한 조명이 화려하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궁내(宮內)에 못을 팠다는 문무왕 14년(674)과 경덕왕 19년(760) 시기는 신라 국운의 전성기였다. 도성 한가운데 거대한 태자의 궁궐과 유흥지를 마련했다는 것은 왕실의 사치가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인의 손끝에서 알알이 여문 부처의 나라(불국토)인 불국
떠날 수 있어 행복했다. 떠나기 위해 맡긴 몸은 알아서 움직였다. 헤벌쭉 거리며 빨아먹는 사탕처럼 답사는 울림의 연속이다. 답사는역동성을가장풍부하게드러낸다. 답사는언제나모호해서철학적이며,철학적이어서내맘대로이다. 답사는온전히,소유의충동을갖고 오는 자의적행동의 발현이다. 시선의일방성은근대성의하나이다. 하지만 인도에선보는쪽이보여지고,보여지는쪽이보는것이다. 델리에서자이푸르로가는 길이다. 가도가도 끝나지않는 데칸고원의 마른 길 위에서는 보든, 보여지든 알아서 순연(順延)해진다. 자동차전용도로를걸어가는사람과차를탄사람은마주보고 나란히 가고 있으므로 평등하다. 익숙하기보다 덤덤해지는 것에 몸이 반응해야 편해지는 인도의 길은 무질서의 질서에 편입해야 맘도 너그러워진다. 인도의마음은넓고깊다. 소의눈망울과어린 아이들의 큰 눈은하나로모아져꿈벅거린다. 나고죽고또영속으로이어져온시간의가루들은수만의신들로반짝이는힌두의역사로명멸했다. 그위에덧입혀진브라만과자이나교와붓다와무함마드와 시크의융합은외지인을경이롭게바라보는포용을 허락한 것인가. 수백의눈을가진시바와 비슈누가 허락한공존을감히경험하지못한답사객은 온갖신들을향해익숙한웃음을막무가내로뿌릴뿐이다. 과거의 역사와 영광이 장엄했던궁전을점령한것은사람
오룡의 역사기행-발해를 가다. -해동성국 발해는 여전히 거대한 청춘의 꿈이다 - 발해의 옛땅에서 삶과 죽음은 여전히 동행(同行)하고 있다. 답사는 느끼는 것에 우선하여, 순서없음을 매력으로, 게으름의 타성을 즐기는 것이다. 가끔은, 모르는 길이 매혹적이다.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걸을 때 느끼는 짜릿함은, 정해지지 않은 길에서 무언가를 찾았을 때의 기쁨에 이르지 못함을 여러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영고(迎鼓)에 취한 부여인이었고, 오늘은 해동성국 발해의 영토에서 살기위해 북만주로 이동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위태롭다. 7세기 말에 일어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무너진 질서의 회복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담대한 선택이었다. 대조영은 고구려가 아닌 발해를 통해 더 위대한 역사를 선택한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분노가 중원을 넘어 동북으로 몰아쳤지만 그녀가 보낸 이해고의 군대는 천문령에서 완벽하게 전멸했고 소리없이 흩어졌다. 698년, 대조영은 이곳 동모산(지린성 돈화시 성산자산)에서 건국을 선언했다. 동모산 가까운 육정산에는 발해 왕족과 귀족들의 석실 및 석곽무덤 80여개가 모여있다. 1949년에 발견된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묘는 봉토석실분의 고구려
-쑹화강은 여유로웠고, 아무르강은 멀리있었다- 부여가 사라진 북만주는 개마무사의 고구려였으며, 해동성국의 발해였다. 북간도에는 무수한 역사가 땅속에 묻혀있다. 부풀어 올라 농염한 검붉은 땅은 징징거렸다. 바람은 가슴을 후벼 파내고도 부족한지 귓가에서 앙앙댄다. 가을볕에 알알이 여문 옥수수는 꽉찬 풍성함으로 반짝거렸다. 밥을 먹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인간에게 흙덩이를 밀고 올라왔을 강인한 생명력이 이 너른 땅, 만주의 삶을 억척스럽게 이어온 동력이다. 지나온 시간속에 돌들은 무너져갔고, 집들은 사라졌으며 사람들은 흩어졌다. 소멸된 왕조의 역사를 밀어 낸 세월은 푸순의 북쪽 고이산에 흩어져있다. 산속깊은 성안에서 발굴된 500여점 무기에서 전쟁의 살기는 사라졌고, 100개의 완전한 질그릇과 화폐에선 사람의 온기를 찾을 수 없다. 신성의 남쪽으로 흐르는 혼하는 연신 요하로 물들을 내려보냈다. 밀어내는 물의 기세에 편승한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혼하를 이용해 요동으로 진출했을 것이다. 1619년, 이 물길을 역으로 따라 들어 온 명나라는 중국사의 운명을 가르는 사르후에서 후금의 누루하치에게 대패했다. 만주를 통일한 건주여진은 혼하를 타고 내려가 산해관을 넘어 중원대
-역사를 훔치다, 요동과 만주를 다녀오다- ‘고구려의성벽은견고해서무서웠고,담백해서외로웠다.’ 고구려를보기 위해요하를건넜다. 천리장성아래로펼쳐진발해만에서불어오는바람은비사성 벽을타고황해로넘어갔다. 645년고・ᆞ당전쟁에서당태종이세민은말했다. “건안성을얻으면안시성은내손아귀에든것이나다름없다.” 1400년을견뎌온건안성의외벽은굳건했고성안은여전히아늑하고평온했다. 눈부시게아름다운흰성벽의백암성에서한걸음도떼지못하고주저앉잤다.수양제의백만대군을조롱한강이식대장군과만여명의요동성수비대는살아서아름다웠다. 찾을수없는성터앞의해자는깊게흘렀다. “시조추모왕이북부여에서남하해비류곡에도착했다.추모왕은거기서홀본서쪽산위에올라성을쌓고도읍을정했다.” 밀물처럼달려오는오녀산성의능선깊숙히파고들었다.턱밑으로찾아온가뿐숨소리보다더빠르게2천년전의주몽이 살아서 달려오는 듯한 산성은 경이롭도록 완벽하게 남아있다. 시간속에풍화되지 않은,바람에도날려가지 않은 아득한 성위에서외쳐본다. “나는하느님의손자이며,물의신하백의외손자다.” 저멀리비류수와혼강은말이없다.물고기와자라도없어보이는환인호에서바람이포개져메아리로솟을뿐이다. 통구분지의의산임수형세에자리잡은국내성과환도산성은짝을이룬고구려도성체계의전형이다. 돼지가일러준곳으로도읍을옮긴
오룡의 역사 타파(112) “반성없는 역사에 미래는 없다. 특권을 지키려다 나라가 망했다” 능력있는 인재들이 신라를 떠났다. 골품제도는 진골이 아닌 신라의 젊은이들을 좌절 시켰다. “우리 신라는 사람을 쓰는데 먼저 골품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못한다.”며 설계두가 당으로 떠난 7세기의 신라는 진골의 나라였다. 9세기 헌강왕 시기 귀족들은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고 할 만큼 풍요로웠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의 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가악(歌樂)소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왕이 시중에게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밥을 숯으로 짓는다는 말이 사실인가” 물으니 시중 민공이 “역시 일찍이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에서 문장력을 인정받은 최치원이 귀국한 시기가 헌강왕 때였다. 선진적인 정치철학을 신라의 개혁을 위해 활용하려던 6두품 출신 최치원은 열정적으로 일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린 최치원은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