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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보리문둥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군대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을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전라도 사람에게는 깽깽이, 경상도 사람에게는 보리문둥이라고 통칭하는 말 등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지역감정 요소에다, 군대가 지닌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의 특성이 수반된 집단적인 냉소가 결합된 폭력적 언어로 받아 들여졌다.

고참이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특정 지역 출신은 군생활이 매우 괴롭던지, 꽃피던지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필자의 군대생활 장소가 경상도 바닷가라서 그런지 영남지역 출신들이 많았던 내무반에서 자주 들렸던 ‘문둥이 가스나’의 표현이 몹시 거슬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왜 경상도 사람들을 문둥이라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나병(한센병) 환자가 경상도에만 유독 많았던 것은 아닐 테고, 환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격리됐던 것은 일제식민지 시절부터 알려진 전라도의 소록도로 알고 있었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경상도 사람들은 문둥이란 표현을 싫어할까? 도대체 경상도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문둥이라고 부르며, 그 말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문둥이 앞에 보리란 수식어가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조선후기 사회에서 영남 지역을 이해해야 한다.

쌀밥에 대해 간절했던 우리나라에서 조선후기 모내기의 확대는 엄청난 생활의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경기와 호남, 호서 지역 사람들은 쌀밥을 먹다가 추수한 쌀이 떨어지는 때인 음력 4월에서 6월까지만 보리로 끼니를 이을 정도로 벼의 생산력이 4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경상도는 전라도나 충청도에 비해 산이 많았다. 논이 많지 않다보니 쌀만으로는 1년을 버티기 어려웠다.

경상도 사람들이 쌀을 대체할 작물로 특히 공을 들였던 것이 보리였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다른 지역에서 쌀밥을 먹는 시기인 겨울에도 경상도에서는 보리밥을 먹었다고 한다.

이처럼 경상도 사람들은 조선후기 들어서도 쌀밥보다는 보리밥을 주로 먹었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연상되는 것이 보리였다.

마치 강원도 사람을 감자바위라고 할 때의 감자처럼, 보리가 경상도 사람을 연상케 하는 주식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리문둥이라고 할 때의 보리가 여기에서 연유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문둥이의 연원은 무엇일까. 문둥이는 문동(文童)이라는 말이 시대를 이어오면서 바뀐 것이다. 특히 문동이라는 말은 조선후기 붕당 정치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영남은 숙종 초반까지만 해도 지역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숙종 때의 환국기에 근기지방에 기반한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영남 남인은 재야세력으로 전락한다.

더구나 영조 초기에 일부 소론과 함께 영남 남인이 주도한 이인좌의 난은 정치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이후에 영남 남인들은 중앙 정계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집단상소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18세기 이후 영남의 거의 모든 유생이 서명한 유소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영남 남인의 정치적 소외가 분명해 질수록 상소에 서명하는 유생 수가 증가했다. 정조 이후 영남 유생 만명이 서명한 상소라는 의미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만인소가 작성되면 상소의 맨 처음에 서명한 이와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유생들이 함께 상경한다.

19세기 서울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시적 모습이었고, 사람들의 옷맵시는 매우 세련되었다.

영남 유생이 쓰는 사투리와 시대에 뒤진 복장은 서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었다. 서울 사람들이 상소를 하러 올라온 영남 유생을 보고, “영남의 보리 문동(文童)들이 또 상소를 올리러 왔구나”하는 말들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회수가 잦아지면서 영남 사람하면 ‘보리문동’이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보리문동은 어디까지나 경상도의 양반들을 지칭한 말이었지, 결코 경상도 사람들 모두를 일컫는 말이 아니었다. 보리문동으로 불리던 이들 역시 양반이 아닌 경상도의 상민들과의 일체감과 연대감을 갖지는 않았을 터.

1970년대 지역감정이 시작되면서 경상도 사람들은 모두가 보리문둥이라는 일체감을 갖게 되었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결속력을 보이곤 했다.

아직도 그 위력은 여전한 것인가. 지난 4월 총선에서도 그것은 어김없이 효과를 보였다.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보리문동’이라는 의미가 전혀 새롭게 해석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에서 소외되는 것은, 지역이 아닌 우리 자신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