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뙤약볕 아래 담배 밭고랑에서의 작업은 학생들에게 피하고 싶은 작업 중의 하나였다. 대학시절 농촌봉사 활동을 여러 번 경험한 필자에게도 독한 담뱃진과 땀방울이 범벅된 담배잎 따기는 힘든 노동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수확의 고단함이 있지만 수입의 만족도가 크기 때문에 농촌의 효자 작물로 널리 재배된 담배.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하면 아주 오래된 옛날 같지만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통해서 전래된 것이므로 생각만큼 옛날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풍습은 언제쯤 정해진 것일까? 18세기 조선의 세시풍속이 기록된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는 비천한자는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고 되어있다. 또 거리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거나 높은 관리가 행차할 때 피우면 엄한 치죄를 받는다고 되어있다. 기록으로 볼 때 이러한 풍습들은 전래 직후부터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예절의 유래를 보면 조정에서 어전회의를 할 때 신하들이 담배를 피우는데 연기가 높은곳으로 올라가 임금에게로 가는 바람에 금지 시켰다는 것과 담뱃불씨로 인해 곤룡포가 타게 돼서 임금앞에서 피우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담배가 들어와 확산되던 시기는
80~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군대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을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전라도 사람에게는 깽깽이, 경상도 사람에게는 보리문둥이라고 통칭하는 말 등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지역감정 요소에다, 군대가 지닌 획일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의 특성이 수반된 집단적인 냉소가 결합된 폭력적 언어로 받아 들여졌다. 고참이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특정 지역 출신은 군생활이 매우 괴롭던지, 꽃피던지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필자의 군대생활 장소가 경상도 바닷가라서 그런지 영남지역 출신들이 많았던 내무반에서 자주 들렸던 문둥이 가스나의 표현이 몹시 거슬렸던 기억이 있다. 당시엔 왜 경상도 사람들을 문둥이라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나병(한센병) 환자가 경상도에만 유독 많았던 것은 아닐 테고, 환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격리됐던 것은 일제식민지 시절부터 알려진 전라도의 소록도로 알고 있었기에 더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경상도 사람들은 문둥이란 표현을 싫어할까? 도대체 경상도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문둥이라고 부르며, 그 말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문둥이 앞에 보리란 수식어가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조선후기 사회에서 영남 지역을 이해해야
병자호란 때 청국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들이 수없이 자살했다. 이들은 목을 매 죽거나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얼마나 포로로 끌려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이 땅의 여인네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대략15~30만명)가 귀환한 2만 5000여명 중 상당수가 자살했거나 자살을 시도했다.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이들은 고향사람들의 경멸과 가족의 비난을 견딜 수 없었다. 조선 땅엔 전쟁이 끝나고 나면 으레 여성들의 자살이 뒤따랐다. 임진왜란 때 왜군의 현지처 노릇으로 목숨을 부지한 여성들, 병자호란 후 살아 돌아온 여성들에게는 자살이 강요됐다. 돌아온 여성들에게는 환향녀((還鄕女)란 이름표가 붙었다. 이 말은 '화냥년'이란 말로 변하면서 '정절을 지키지 못한 여자'란 의미가 덧붙었다. 여성들은 이른바 남성 중심의 가문과 정절의 이름으로 처단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여성의 정조를 사회문제로 대두시켰다. '열녀 이데올로기'에 숨은 폭력성의 절정은 자신들의 잘못을 엉뚱한 것으로 몰아가려는 왕조와 사대부들의 파렴치였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왕조와 집권 사대부는 엎드려 사죄했어야 했다. 왕조와 사대부들은 사죄는 커녕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며 자살을 방조하고 심지어 끊임
파란만장 했던 즉위식을 끝낸 광해군의 거침없는 개혁의 시작은 소득의 분배와 조세정의의 실현이었다.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은 각 고을의 진상(進上)과 공물이 관아의 방납인에게 막혀, 물건의 값이 3~4배 또는 수십 배에 이르며, 특히 경기도가 심합니다라며 공납 대신에 1결당 쌀12두 징수를 건의 한다. 광해군의 교지에 선혜(宣惠)라는 말을 관청의 이름으로 삼았다는 표현 그대로 왕의 결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92년부터 시작된 7년간의 임진왜란을 세자의 신분으로 백성들과 함께 전쟁의 참화를 경험하고 극복한 광해군 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623년 3월, 폐모살제(廢母殺弟)와 숭명반청(崇明反淸)의 성리학적 명분론을 근거로 연합한 서인과 남인에 의한 인조반정의 근본 속셈은 과다 세금 징수를 자행한(?) 광해군에 대한 저항 이었던가? 반정공신 이괄은 1624년 1월에 군사를 일으켜 한양에 무혈입성 한다. 허둥지둥 공주로 피신한 인조와 서인정권과 반란군에 의해 궁궐이 점령된 미증유의 사태에도 평온한 백성들의 일상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대의명분은 물론 현실명분 조차도 갖고 있지 못한 서인 내부에서 벌어진 논공행상의 추악성을 조선 백성들은 이미 분명하게 파악한
오 룡 오룡아카데미 원장/ 용인여성회관강남대평생교육원 강사 용인신문 애독자들이여! 저 오룡이 이제부터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낄지도 모를 역사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는 제법 있어 보이는 발언인데 과연 얼마나 명확할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월이 약이다가 더 현실적인 발언이 아닐는지. 한국사에서 진정 성공한 개혁의 완성이 언제였던지 가물거리는데, 개혁은 시작과 동시에 조급해지고 피로감을 호소한다. 고정된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미래를 위한 명확한 아젠다 없이 개혁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한번 진정 과거를 이해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의 역사를, 과거의 전철(前轍)을 되풀이 않기 위해 참회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 적이 있었던가. 알량한 사료만을 외우는 앵무새의 역사가 아닌 장삼이사(張三李四)를 위한 교양 역사, 시대를 관통하고 흥분하는 풀뿌리 역사의 지평을 확대하고픈 욕심이 한껏 앞선다.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인문학으로서의 역사 인식 확대를 위해 날 선 출발을 시작한다. 그래야만 개혁은 지속될 것이고, 미래는 예측되며, 희망은 살아난다. 역사는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미래의 학문이다. 역사는 거울만이 아니라 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