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백환 목사 인생2막/샘물교정 복지선교회(회장 이백환 목사) 갇힌 자에게 복음을, 풀린 자에게 소망을 2013년 선교회 결성 재소자에 희망의 손길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그들의 상처 어루만져 지난 1989년 성남 은혜교회를 시작으로 목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1996년 이천 중앙장로교회 목사를 지냈고 1999년에는 충북 음성에 베데스다기도원을 건축했습니다. 일흔의 나이를 바라 볼 때쯤 기흥구 영덕동에 위치한 수원 영은교회(담임목사 권영삼)에 항존직 목사로서 하나님을 뵈오며 흥덕마을 4단지 경로당 노인회장직을 맡았습니다. 경로당 회원들을 잘 모셨고 그들의 도움도 받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여주소망교도소에도 방문했습니다. 이제 나이를 핑계 삼아 목회 활동을 그만두려했지만 다시 활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 노인회장들과 여주 소망교도소에 처음 방문해 물품을 후원하고 인연을 맺었다 지난 2013년 4월 25일, 4년 동안 흥덕마을 4단지 경로당 노인 회장을 지낸 이백환 목사를 중심으로 샘물교정 복지선교회가 결성됐다. 결성 1년 후 복지선교회는 여주소망교도소에 등록했고 새생명멘토링을 시작했다. 재소자 10명과 자매를 맺고 매월 셋째 수요일 오후 3시가 되
▲ 박흥근 배움터지킴이 손자손녀같은 아이들 보디가드 하루하루 행복 대학생 시절부터 봉사활동 남다른 애향심 나라용인가족건강 근면한 사랑전도사 장평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어울리며 함께 즐거운 삶을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마을의 유일한 초등학교입니다. 아토피천식 안심학교로 지정돼 학교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밝고 맑습니다. 같이 어울려 생활하다보니 아이들과 동화되는 기쁨도 누립니다. 학교의 배움터지킴이 사업에 내가 동참한 것은 행운입니다.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하산마을에 거주하는 박흥근(81세) 옹은 중학생 시절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928 서울수복 직후였고 서울공고를 빌어 학교 구분하지 않고 무작위로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안정 되면서 한양공고에서 정식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중앙대학교에 진학한 박 옹은 화요일과 목요일을 봉사의 날로 정하고 서울역에서 을지로6가까지 구역을 맡아 가로청소를 실시했다. 흑석동에서 상도동까지의 길가도 내가 다니는 길이라고 폐병이나 폐깡통 등을 주우며 정리했다. 그는 아마 내가 했던 일이 새마을 사업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용문회라는 이름으로 수도권 대학에 다니던 용인출신학생들의 모임에서 회장직을 맡
▲ 조병태 사두 인생2막/조병태(용무정 사두국궁으로 인생의 희열 느끼다) 정적이지만 전신운동 균형 잡힌 몸, 집중력 향상 90세 넘어도 반듯한 몸 과시 자신과의 홀로운동 임시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서기관으로 35년간의 공직을 마감할 때까지 여러 부서를 경험하며 인생을 배우고 생활을 배웠습니다. 입문한 국궁은 상대가 없는 개인운동으로 나와의 고독한 싸움이었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의 도전에 승리했다는 마음이 생기는 순간 희열을 느꼈습니다. 지금은 행복합니다. 육군사관학교 진학을 목표로 고등학교 시절 꿈을 키웠다. 꿈을 이루기 위해 친구와 학원을 전전하며 재도전했지만 아예 포기해야 했다. 지난 1972년 용인시에서 공무원에 도전했다. 임시직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고 1973년 시험에 합격해 면사무소 발령을 받으며 정식으로 공무원이 됐다. 2001년 사무관으로 승진하면서 동장은 물론 교통행정과, 회계과, 재난안전과 등 시청에서 근무했고 2008년 서기관으로 진급, 상수도사업소장직을 1년 동안 수행하고 2009년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재직시절을 돌아보니 오지노선에 마을버스 33대를 개통시켰던 기억이 새롭다. 마을주민들에게 받은 감사패는 그 어떤 상장에
서력 13년, 공무원미술대전서 국무총리상 수상 취미로 시작한 서예, 이제는 제자 기르는 스승 ▲ 꽃담 구정옥 수상자 제 25회 공무원 미술대전에서 꽃담 구정옥 작가가 서예한글부문 최고상인 금상으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고 지난 9일 상장을 전수받았다. 출품작은 남도진 작 낙은별곡으로 서체는 궁체고전이었다. 그는 이렇게 큰 상은 기대도 안했는데 금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며 앞으로도 우리글에 더욱 관심을 갖고 배우는 자세로 열심히 공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꽃담은, 스승인 동탄서예아카데미 오광석 원장이 지어준 구정옥 작가의 호다. 꽃으로 장식한 옛 궁궐 산책로의 담을 칭한 것으로 우리 한글을 아름답게 알리라는 스승의 뜻을 담았다. ▲ 수상작과 함께 처인구 양지면에서 태어났고 처녀시절 용인시청 공무원으로 일했으며 결혼 후에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자녀들이 제 몸을 건사할 수 있을 즈음인 지난 2004년, 노블카운티에서 실시하는 서예 강좌를 접하고 그저 취미삼아 등록했다. 점점 흥미를 느낀 구 작가는 기흥구 영덕동 자택 근처의 서실을 찾았고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마음으로 정식 등록했다. 당시 오 원장은 우리글을 아름답게 묘사해보라는 주문과 함께 한글 서예를 권했
▲ 좌로부터 복지팀 오세현 사회복지사와 박상윤 단장, 김익균, 채승식, 이범목, 박학문 단원과 사진에서 빠진 김종학 단원이 함께하고 있다 인생2막/드림핸즈봉사단(단장 박상윤) 단원이 합심하면 헌집이 새집으로 허름한 집을 새집처럼 뚝딱… 단원들은 사랑의 마술사 드림핸즈봉사단은 저소득 장애인이나 저소득 독거노인들에게 일상생활의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주거환경 종합개선지원을 목적으로 준 고령 또는 고령 은퇴자들로 조직을 만들었다. 신체나 경제적 제약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웠던 수혜자들에게는 크나큰 복을 전해주고 준 고령 또는 고령인 은퇴자들에게는 사회참여와 전문기능의 재 생산화를 도모하게 됐다. 이들은 대상자의 욕구와 의견을 존중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며 차량을 이용해 신속히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용인시기흥장애인복지관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대상자의 욕구에 필요한 세부내용을 상의하고 필요한 일체를 준비한 후에 진행하므로 대상자에게 대만족을 선물하고 있다. 박상윤 단장(1945년생)은 서울시에서 공직생활 정년을 마치고 지난 2006년 용인으로 이주했다. 현역시절 수서지구에서 장애인이 많이 거주하는 곳의 동장을 역임한 그는 군포지역아동보호센터에 근무하며 어려운
▲ 정화경 웃음운동지도자 하하하~ 웃으면 건강해지고 예뻐져요! 음악 꿈접고 전산공부, 은행원 교육담당 결혼후 음대 성악과 지원, 노래인생 활짝 이제는 웃음지도자 교수로 후배들 양성 고령화시대 건강은 필숩니다. 병든 고령자는 너무 안타깝습니다. 스트레스? 웃음으로 날리고, 얼굴화장? 웃음이 화장품인걸요. 행복해서 웃나? 웃으면 행복한 것을... 한국 속담은 웃으면 복이 와요. 중국속담은 웃지 않으려거든 상점 문을 열지마라. 암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뭔지 아세요? 바로 웃음이랍니다. 하하하~ 경남 사천에서 진주여중으로 유학했다. 중학교 시절 교내 콩쿨대회는 모두 출전했고 진주 개천예술제에도 참가할 정도로 노래 잘 부른다고 인정받았다. 생활기록부에도 노래를 잘한다고 선생님이 인정했다. 부산 경남여고 시절, 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상 접고 당시 우리나라에 처음 보급되기 시작한 컴퓨터를 배웠다. 한국금융전산센터에서 엘리트 은행가들의 전산 연수를 지도했다. 당시 연수자들과 야유회 기회가 있었다. 야유회 도중 노래한 것이 사회자의 눈에 발탁, 그 사회자는 지금의 남편이 됐다. 결혼 후 못 다한 음악공부를 위해 빨간펜 영업을 시작했고 승진하면서 음대 소원을
접었던 한국무용... 장수무용으로 거듭나 생각을 몸으로 표현하는 세심한 움직임 한국무용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여서 장수무용이란 동아리를 만들었지요. 한국무용에 입문했던 제가 함께 배운다는 마음으로 동아리 단원들을 지도하며 용인시처인노인복지관 내외의 행사가 있을 때면 공연봉사를 펼칩니다. 한국무용은 우리 나이 정도의 시니어들에게는 체력단련의 커다란 효과를 보는 일종의 운동이랍니다. 김신나 무용가는 어릴적 동네에 서커스단이 들어올라치면 부모님을 졸랐다. 어린 김 무용가는 공연을 유심히 관람한 후 집에 돌아와서 그대로 재현했다. 줄 타는 모습은 물론 춤사위나 공굴리기 등 보는 대로 따라했다. 보면 따라하는 타고난 재능은 무용 강사라는 직업을 갖게 했고 당시 처음 도입된 에어로빅을 보급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했다. 지난 1969년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직업을 바꾼 그는 불어나는 몸매를 관리한다는 차원으로 수영에만 관심을 가졌고 무용과는 일절했다. 어느덧 자녀들이 장성하고 여유가 생겼을 즈음, 편안한 인생을 꿈꾸던 중 마침 용인지역을 지나던 길에 자연에 묻힌 아파트를 발견하고는 여기다 싶어 지난 2004년 용인에 정착했다. 생각보다 훨씬 탁월한 선택이란 생각이 드는
모범군인으로 33년... 보국훈장 수훈 인생2막... 사회복지사로 어르신공경 ▲ 사회복지사 문길천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하사관 생활을 하면서 병사와 부대시설 등 관리에 철저했고 근면, 성실을 신조로 생활했습니다. 지휘관이 눈여겨 봤는지 빠르게 진급했고 그 덕에 긴 시간을 주임원사로 일하면서 주요보직을 섭렵했습니다. 군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감했고 지금은 고령화 시대를 맞아 어르신 공경에 빠졌습니다. 사랑을 드리니 더 크게 받습니다. 행복합니다. 문길천(56세) 사회복지사는 하사관으로 33년의 군 복무를 마쳤다. 성심을 다한 군 생활은 성공적인 군 생활을 했다는 마음 속 자부심과 함께 보국훈장 수훈이란 명예도 얻게 했다. 현재 문 사회복지사는 처인구 고림동 자신의 집에서 처인구 백암면 옥산리 상산마을에 위치한 노인요양시설 천상의집에 출근, 어르신들을 보살피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유독 귀여움을 많이 받았고 전역할 때쯤에는 그분들을 잘 모시고 싶다는 마음에 사회복지과를 전공하게 됐다며 고령화 시대를 준비해야 하는 우리나라는 이런 종사자가 앞으로 무한히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군 정년을 2년여 앞두고 일반인으로서의 사회생활을 준비했다. 생각한 바가
▲ 바리스타 박송자 씨 각계각층 손님과의 만남은 뒤늦은 깨달음 줘 사회 일원이란 자부심과 노후 생활의 활력소 지금요? 제가 1944년생이니까 일흔 두 살이지요. 바리스타 교육은 떨리고 어려웠지만 재밌게 배웠어요. 실수를 해도 웃었고 만든 커피가 조금 덜 맛있어도 웃었어요. 같은 또래 교육생들이고 모두 저와 같이 처음 다루는 일이었기에 같이 웃어 줬지요. 지금은 그분들과 바리스타로의 새로운 인생을 맛보고 있답니다. 결혼 후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남매를 키우며 집안 살림에만 전념했다.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킨 후에는 부부만의 오붓한 생활을 꿈꾸며 지난 2006년 용인시 동백으로 이사했다. 교회 가는 일 외에는 외부 나들이가 거의 없이 집에만 있다 보니 오붓하다는 생각보다는 무료함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지난 2011년, 우연히 노인복지관을 방문해 회원증을 만들었고 나들이 겸 활동하며 또래의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니, 바쁘게 활동하는 모습이 무척 부럽게 느껴졌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 마음을 먹었고 바로 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동화 구연이었다. 교육을 받던 중, 바리스타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시니어클럽의 노인일자리 창출
▲ 목에 걸려 있던 작은 하모니카로 연주하는 장만수(프란체스코) 촌장 태어나 부양할 가족이 생기기 전 즉 결혼 전까지가 제1의 인생입니다. 결혼 후 가족 부양을 위해 직장 생활로 접어들어 어느덧 정년을 맞아 퇴직할 때까지의 직장생활이 제2의 인생이지요. 이제 퇴직 후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순간까지를 제3의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제3의 인생이 행복해야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삶이 괴로워 술로 풀었던 시절도, 결국 우울증이라는 병으로 약이 없으면 견딜 수 없었던 시절까지 하모니카가 명약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 하모촌 입구 장만수 촌장이 제2의 인생이라 일컫는 경찰관 복무시절, 학생시위를 진압했던 의경이 군대생활을 마치고, 복학 후 대학생 시위대가 됐다. 돌을 투척하다가 알아보고는 함께했던 시절을 생각해 돌 피하라고 외치지만 돌은 이미 이마를 때렸다. 버스와 버스 사이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온몸이 부서지는 아픔도 경험했다. 젊은 나이에 진급하는 장 촌장을 시기하며 뒤에서 수군거리며 따돌리는 왕따도 경험했다. 모두 잊으려 술도 진탕 마셨지만 몸은 망가지고 정신도 망가졌다. ▲ 하모촌 방문자를 위해 촌장이 직접 제작한 각종 쉼터
▲ 색소폰 연주 재능봉사로 더불어 행복찾는 김완영(71세) 행복전도사 맹호부대 소속 참전 화랑무공훈장 뒤늦게 목회자로 새인생 연주봉사 처인노인복지관 최고의 인기스타 1967년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습니다. 수색작전에 40명이 투입됐고 한 순간적의 기습으로 거의 사망했습니다. 1967년 맹호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참전했습니다. 수색작전에 40명이 투입됐고 한 순간적의 기습으로 거의 사망했습니다.저는 살아남은 3인의 병사 중 1인으로 전우들의 시신을 후송시킨 뒤 지원 병력과 함께 작전에 투입돼 적1787명을 생포했습니다. 베트남전쟁 역사에 빛나는 화랑 67-6호 작전이었고 이때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수색작전에서 우박 파편을 맞고 우측 어깨가 부서졌으며100여개 파편을 어깨에 간직한지 20년이 지난1987년, 6급 상이군인으로 판정받았습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시작한 사업이 실패하면서원유탱크와 송수관을 제조하는 리비아 공사장파견근무에 참여하는 등 기울어진 가세를 바로세우기에 노력했다.귀국 후 공장 신축 등 공사장을 따라다니며 막일을 하던 도중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듯 실신했고 깨어난 즈음 독실한 신심으로 신학대학에 입학, 4
▲ 견광수 숲해설가 직분에 맞는 정신으로 최선 인생1막 공직, 2막 자연알림이 ▲ 두창초등학교 강의 저에게 인생1막이 국가와 가족을 위한 삶, 현실 세계의 공직생활이었다면 인생2막은 자연을 알리며 건강을 생각하는 삶, 숲을 알리는 동시에 산림을 이용해 인간의 질병을 치유하고 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들에게 숲속 자연과 곤충의 오묘한 생존 지혜를 알려서 건강한 나라를 이끌라는 뜻으로 미래를 향해 사랑을 베풉니다. 물론 숲을 상대하다보니 제 몸과 마음의 힐링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견광수 숲해설가는 경기도 공무원시험에 응시했고 지난 1974년 성남시에서 첫 공직생활을 시작했으며 의정부, 안성을 거쳐 1986년 용인군청 축산과에서 용인시의 공직생활이 시작됐다. 용인시 경제환경국장으로 재직시절, 38년 공직생활의 명퇴를 결정하고 지난 2011년 10월 31일 청사를 떠나며 이미 퇴직 후의 삶을 설계했기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 가시칠엽수 씨 견광수 숲해설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준비가 됐었기에 이전 생활에 대한 미련은 물론 머릿속 생각까지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새로운 생활에 대한 부푼 마음이 더욱 나를 적극적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