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박신규 달맞이꽃처럼 순식간에 터져요 참지 않는 울음은 봉선화 씨앗처럼 간지럽게 뿌려요 눈물 매단 웃음은 열매 감춘 씨방보다 연하게 나무를 새긴 씨눈보다 완고하게 사철 지치지 않고 활짝, 무궁한 꽃이 피었습니다 흔들리고 주저앉을 때 귀신같이 쪼르르 달려오는 꽃은 배고프다는 그 꽃은 친히, 목젖 찢어져라 피어납니다 꽃을 품고 굽신굽신 밥벌이에 단내가 납니다 박신규는 꽃을 슬픔으로 노래한다. 꽃은 슬픔의 은유이며 상징이기도 하다. 참지 않는 울음이 달맞이꽃처럼 순식간에 터지고 눈물 매단 웃음은 봉선화 씨앗처럼 간지럽게 뿌려지는 공간에서의 울음이나 웃음은 슬픔의 다른 이름이다. 그에게 무궁한 꽃으로 활짝 피어난 꽃은 ‘열매 감춘 씨방보다 연하게/나무를 새긴 씨눈보다 완고하게’ 사철 지치지 않고 피는 꽃이다. 연하고 완고하게 피는 무궁한 꽃이라면 몸이다. 몸만이 무궁하게 피는 꽃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몸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열매를 감춘 씨방’은 연한 몸을,‘나무를 새긴 씨눈’은 완고한 몸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문장이다. 연하고 완고하게 ‘사철 지지 않고 활짝’ 피어 있는 무궁한 몸은 우리들의 몸이어서 순식간에 터지는 울음을 가진 몸이고 눈물 매단
장 미 이경림 너는 젊고 아름답다 너는 젊고 웃는다 너는 젊고 웃지 않는다 언제부터 너는 젊고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너는 웃고 아름답지 않는다 언제부터 너는 웃지 않고 아름답지 않는다 그리고 너의 칠요일은 온다 아침이 오지 않는다 저녁이 오지 않는다 저녁만 시작된다 아침만 시작될 것처럼 더듬더듬 한 이파리씩 이경림은 장미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어 있다. 장미를 향해 ‘너는 젊고 아름답다/너는 젊고 웃는다’라고 노래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도취 이상이다. 그러나 장미는 도취에 머물게만 하지는 않는다. 장미는 쉬운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유자철망을 치고 있다. 그것이 가시다. 가시가 있어 새침하고, 새침해서 언제나 웃어주는 것은 아니다. 장미에 그녀의 서정이 얹히는 순간, 그녀는 이미 장미였으니 새침해지는 것은 그녀이기도 하다. 장미는 언제부턴가 젊었고 아름다운 사랑이 시작되었지만. ‘언제부터 웃고 아름답지 않는다/언제부터 웃지 않고 아름답지 않는다’고 아름다움의 연원과 아름답지 않음의 연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웃고 있지만 아름답지 않은 장미는 이제 아름다움의 절정을 지나기 시작한 장미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했으니 장미인들 다르겠는가. ‘아름답지 않는다’는 문장은
취산화서聚散花序* 송재학 수국 곁에 내가 있고 당신이 왔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 인 채 나에게 왔다 수국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잠깐 숨죽 이는 흑백사진이다 당신과 나는 수국의 그늘을 입에 물 었다 정지 화면 동안 수국의 꽃색은 창백하다 왜 수국이 수시로 변하는지 서로 알기에 어슬한 꽃무늬를 얻었다 한 뼘만큼 살이 닿았는데 꽃잎도 사람도 동공마다 물고 기 비늘이 얼비쳤다 같은 공기 같은 물속이다 * 수국의 꽃차례는, 꽃대 끝에 한 개의 꽃이 피고 그 주위 가지 끝에 다시 꽃이 피고 거기서 다시 가지가 갈라져서 그 끝에 꽃이 핀다. 송재학은 꽃차례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 미시적 풍경에 대한 그의 애정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서정적 이미지의 운용에 남다른 미학을 보여온 그는 수국의 꽃차례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나는 지금 수국 곁에 있다. 수국의 공간을 고유한 나는 이미 수국이기도 하다. 수국에 시인의 시선이 머물기 시작하면 시인의 서정이 투사된 것이어서 수국과 시인은 등가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 공간에 개입되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다. ‘당신의 시선은 수국인 채 나에게 왔다’고 노래하는 것으로 보아 당신은 오면서 수국
나무 아래 고요히-오규원 선생님을 그리며 임후남 소나무인가, 굴참나무인가 발목에 달고 있는 작은 번호표만 보느라 미처 그것들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 이젠 돌아가야지 다시 길을 물어 와야지 앞으로도 뒤로도 젖은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는다 맞아도 아픈 것은 나무가 아니라 비다 그래도 나무들아, 누가 그를 잠재우고 있느냐 돌아서서 소리치려는데 그의 이름이 빙긋이 웃는다 이름표를 가슴에서 찾아야지! 큰 소나무가 이름표 하나 달고 물기 머금은 몸을 열어 제 집에 잠든 그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진흙투성이 내 신발을 닦아주고 있다 임후남은 오규원의 서울예대 제자다. 스승의 수목장지를 찾아가 나무에 매단 번호표를 확인하는 중이다. 나무의 발목에 스승의 번호표는 달려 있을 것이지만 나무들은 번호표를 선듯 내어놓지 않는다. 제자의 안타까운 마음은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길을 물어 와야지’에 이른다. 그렇게 다시 오르는 영혼들의 숲에는 ‘앞으로도 뒤로도/젖은 나무들이/길을 가로막는다’. 젖은 나무는 스승의 은유일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눈물을 차마 볼 수 없어 되돌려 보내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나무들은 비에 젖어 숙연하고 스승의 영혼이 숨쉬고 있는
내죄는 무엇일까 김사이 밥을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를 낳고 젖을 주고 흙을 다지는데 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 따닥따닥 붙은 콜센터에서 상냥하게 친절하게 보이지 않아도 웃고 보이지 않아도 참아서 나는 아무 것도 안하고 있다 직업소개소를 찾으니 학력 미달 경력 없고 나이 많고 애도 있어 손가락 하나로 끌려나왔다 끌려나가도 그 자리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아이 손을 잡고 광장에 나가지 못한다 네가 죽어도 일을 해야 해서 누가 죽어도 나는 살아야 해서 기약 없는 먼 훗날을 끌어당겨서라도 지금 살아야 해서 촛불을 들 수 없는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 쪼들려서, 악착같이, 외로움에, 지책감으로 찌든 수척한 감정들이 들러붙어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는 파란색일까 까만색일까 붉은색일까 내가 여자를 입었는지 여자가 나를 입었는지 나를 찾아 출구를 더듬거리며 오늘을 걷는다만 여자의 시간은 어디쯤에 머물러 있다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고 한다 김사이는 구로노동자문학회에서 시 공부를 했다. 그의 시가 삶과 밀착되어 있는 것은 그의 젊은 날의 가난과 착취와 분노와 절망과 실의를 견디어 낸 체험이 있기 때문이다. 각 연에 배치된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있다’는
벽제화원 빅소란 죽어가는 꽃 곁에 살아요 긴긴낮 그늘 속에 못 박혀 어떤 혼자 연습하듯이 아무도 예쁘다 말하지 못해요 최선을 다해 병들 테니까 꽃은 사람을 묻는 사람처럼 사람을 묻고도 미처 울지 못한 사람처럼 쉼 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비 한 마리 그 주린 입에 상한 씨앗 같은 모이나 던져 주어요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박소란은 도시를 배경으로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는 시인이다. 그녀는 사회적 약자와 시대적 아픔을 개성적인 어법으로 끌어안는다. 독자들이 그녀의 시를 즐겨 읽는 이유다. 「벽제화원」은 죽은 자를 위한 화원이다. 산자 들은 죽은 자를 위해 꽃을 바친다. 그러므로 벽제화원의 꽃들은 죽어가는 꽃, 혹은 죽은 자들 곁에 피어 있는 꽃이다. 죽은 자들의 영혼이 떠나고 나서 살아남은 자들이 혼자를 연습하듯이 그렇게 ‘긴긴날 그늘 속에 못 박혀’ 피어 있는 꽃이 벽제화원의 꽃이다. 벽제화원의 꽃을 두고 ‘아무도 예쁘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꽃들도 사람처럼 생로병사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으면 벽제화원의 꽃은 사람이다. 최선을 다해서 병들어 떨어지는 꽃이어서 아름다운 사람인 것이다.
앵 무 이기인 앵무는 몇 개의 단어로 하루치의 버릇을 벗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말을 버리고 소리를 배우는 조롱 속에서 머리를 가슴에 수수께끼를 모이통에 넣어주듯이 오랫동안 가르치지 않는 말을 쏟아 놓는다 너는 누구야 아무것도 아니야 사라지는 농담이야 농담이 이어붙이는 앵무가 이상하다 안녕하세요 진짜로 안녕하세요 사라지는 느낌도 안녕하세요 안녕은 두 마리로 갈라지는 농담이야 이기인은 시적 실험을 치열하게 하는 시인이다. 그는 언어의 알쏭달쏭한 의미의 추구와 알쏭달쏭한 표현으로 언어규범의 해체를 시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시적 감각과 시적 의미의 의도적인 교란을 통해 착란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언어의 규범을 부수려는 시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앵무」는 그의 착란이 난센스에 이르는 도정의 시편으로 읽힌다. 이 때의 착란은 사실적이어서 그의 감각과 의미가 뿌리 깊은 착란임을 보여준다. 앵무는 시적 화자와 동격이니 시인이 곧 앵무라고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앵무의 말이거나 시적 화자의 말이거나 시를 이해하고 느끼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다만 시문이 거기에 있으니까, 그 시문이 수많은 이미지들을 거느
이 도시의 트럭들 나희덕 돼지들은 이미 삶을 반납했다 움직일 공간이 없으면 움직일 생각도 사라지는 분홍빛 살이 푸대자루처럼 포개져 있다 트럭에 실려가는 돼지들은 당신에게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 짝짓기 직전 개들의 표정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들의 눈망울에서 당신은 어떤 비애를 읽어내는가 아니, 그 표정들은 당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이 도시의 트럭들은 너무 많이 싣고 너무 멀리 간다 엿가락처럼 휜 철근들과 케이지를 가득 채운 닭들과 위태롭게 쌓여 있는 양배추들과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 같은 원목들을 싣고 트럭들은 무엇을 실었는지도 잊은 채 달린다 커브를 돌 때마다 휘청, 죽음쪽으로 쏟아지려는 것들이 있다 나희덕의 시가 달라지고 있다. 이미 달라져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생에 대한 성찰을 서정적인 문장으로 담아내는 시인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 이 시대의 고통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도시의 트럭들」은 탐욕으로 얼룩진 인간들의 집단 거주지인 도시를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트럭들의 난폭한 욕망과 죽음의 그림자를 노래한다. 트럭들은 ‘분홍빛 살들이 자루처럼 포개’진 돼지를 싣고 도시의 도로를 달려가고 있다. 돼지들의 모
백색 공간 안 희 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한참을 서 있다 사라지는 그를 보며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된다 그는 불쑥불쑥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 절벽이라는 말 속엔 얼마나 많은 손톱자국이 있는지 물에 잠긴 계단은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한다는 뜻인지 내가 궁금한 것은 가시권 밖의 안부 그는 나를 대신해 극지로 떠나고 나는 원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 다음 장면을 상상한다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밤 나는 눈 뜨면 끊어질 것 같은 그네를 타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을 만든다 안희연의 시는 소멸과 몰락이 동시에 진행되는 어두운 세계의 삶 속에서 쓰여진다. 소멸하는 것은 그녀의 세계며 몰락하는 것은 그녀를 그녀이게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소멸과 몰락의 세계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어두운 세계에는 폭력과 불의 혹은 지배논리와 구조적 모순이라는 근원적인 부정성에 편입되어버린 세계를 의미하는 바 그녀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 자체다. 그녀의 시가 실종된 삶과 삶 자체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무감각하고 무기력한
호박 넝쿨 김 길 나 호박 넝쿨을 넝쿨 채 끌어당긴다 얽힌 시간이 호명되어 나올 때 얼기설기 엉킨 기억의 줄기 끝에서 호박불빛이 흐르는 기차역이 딸려 나온다 가방을 들고 여러 번 역사를 드나들었다 달리는 선로 밖으로 달아난 풍경들이 순간 순간 두서없이 꿈속으로 들어왔지만 바람 몇 장이 덧 발려 생시 기억의 벽화 속에서는 형체 없는 점묘로 넌출거렸다 점은 이미 형체가 삭아버린 무덤이지만 점은 새로 몸의 곡선을 세워놓는 자궁이기도 해서 네가 사라져 버린 점은 네가 어디선가 살아나는 발육의 자리인 것 얽힘으로 경계를 지운 호박 넝쿨에는 그러므로 어제와 오늘이 병행하는 시계가 달려 있다 추억과 현실이 뒤섞인 추상화가 나붙어 있다 어제의 넝쿨에 열린 마지막 호박 한 덩이 오늘 넝쿨 채 끌려온다 김길나는 늦은 나이에 『문학과사회』에 시집 한 권 분량을 투고해서 시단에 나온 시인이다. 1997년, 문지에서 발간된 『빠지지 않는 반지』가 그것이다. 그녀의 시세계는 단아하고 서정적이며 삶의 현장에서 길어올린 따뜻함이 있다. 「호박 넝쿨」은 그녀의 시세계를 잘 드러낸 작품이다. 호박 넝쿨을 넝쿨 째 끌어당기면 얽힌 시간과 함께 호박불빛 따스하게 빛나는 기차역이 딸려 나온다
부재중(不在中) 김 경 주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안에서 저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몇 십 년 전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두고 바닥에 내려놓은 수화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댕강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빈 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충혈된 빗방울이 창문에 눈알처럼 매달려 빈방을 바라본다 창문은 이승에 잠시 놓인 시간이지만 이승에 영원히 없는 공간이다 말하자면 내 안의 인류(人類)들은 그곳을 지나다녔다 헌혈 버스 안에서 비에 젖은 예수가 마른 팔목을 걷고 누워서 헌혈을 하며 운다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않았나니 너희는 평생 내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 예수가 내 방의 창문 앞에 와서 젖은 손톱을 들어 유리를 박박 긁는다 성혈이 얼굴에 흘러내린다 나는 돌아온다
간결한 그리움 박 후 기 가장 간결한 그리움은 편지 봉투에 쓰인 너의 주소다 가장 간결한 슬픔은 되돌아온 편지에 적힌 너의 이름이다 묘비명처럼, 우리의 그리움은 이름으로 가슴에 남겨지는 것이다 이 시는 몇 번이고 다시 읽게 한다. 다시 읽으며 젊은 날의 닿지 않았던 편지를 생각하게 한다. 절절하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 끝내 이루어진 사랑이 있을까? 아프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 애닳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 그리하여 미칠 것 같은 몇 날이, 아니 몇 달이, 아니 몇 년이 가고도 불현듯 가슴이 저미듯 아려오는 통증을 누군들 겪지 않았을까? 박후기의「간결한 그리움」은 그러므로 그리움의 노래가 아니라 슬픔의 노래다. 슬픔의 극점은 상실이다. 상실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머물지 않는다. 상실은 세상 모든 것의 상실에 닿는다. 너로 하여 볼 수 있었던 봄이거나 여름, 혹은 가을이거나 겨울의 느낌들을 어찌 하란 말인가. 너로 하여 들리기 시작한 바그너의 장중한 느낌은 어찌 하란 말인가. 너로하여 찾았던 산사에 군락을 이루어 피었던 상사화의 연분홍 꽃무더기는 어찌 하란 말인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던 너의 눈동자는 어찌 하란 말인가. 네 머릿결이 눈부시던 날의 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