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무서운 것이다.” 한비자는 그의 책 외저설 좌상에서 말한다. 이익이 있는 곳에 백성들이 몰리고, 이름을 날릴 수 있는 일에는 선비들이 목숨을 건다. 외저설 우하에서 또 말한다. 현명한 군주는 관리들만 감독할 뿐 백성을 직접 다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능한 자를 쓰면 천하가 잘 다스려지고 못난 자를 쓰면 백성은 힘들고 천하는 어지러워진다. 한비자의 이름은 한비인데 그에게 자(子)를 붙인 이는 친구인 이사이며 그를 죽인이도 이사다. 한비가 죽고 이사는 한비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워 그의 책을 깡그리 찾아내어 없앴는데 그중 일부가 살아남아 한자(韓子)란 이름으로 천하 쟁패를 꿈꾸는 잠룡들 사이에 몰래 숨겨두고 읽는 명불허전의 명저로 전해진다. 한비자 책 한권을 읽으면 한 나라를 다스리고, 두 권을 읽으면 두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 제후들 사이에서 명언처럼 통용되던 시기다. 본래 자(子)는 일국의 스승이라 할 만한 종사(宗師)에게 붙여주는 칭호인데 이들의 말과 글에는 넘침도 모자람도 없음이 전제 된다. 이들의 말을 적은 글을 경전(經典)이라 하는데 경전은 성경현전(聖經賢傳)의 줄임 말이다. 성인의 글과 현자의 주석이란 뜻이다. 그 한자(韓子 한비)
“나의 아버지는 친일파가 아니다” 영조는 11세 때 13세 신부와 혼인을 한다. 신부는 진사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후일 정성왕후가 된다. 첫날밤 영조가 신부의 손을 잡으며 “손이 참으로 곱구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는 “귀하게 자라서 그렇사옵니다.”라고 답변했다. 이에 발끈한 영조 왈, “뭐라고? 귀하게 자랐다고?……” 뒷말을 속으로 삼킨다. ‘내 어미가 종년이라고 비웃는 구나…’ 영조는 비록 왕손이었지만 어미 출신이 워낙 천출이라 일개 진사 댁 아낙네에게까지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일후로 영조는 그녀 방 출입이 소원해 진다. 한중록 중간쯤에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아버지가 과거에 합격한 일을 말하면서 당시 인원왕후(조선 제19대 숙종의 계비) 집에도 과거에 합격한 이가 없고, 정성왕후(조선 제21대 영조의 원비)집에도 없으며, 사도세자의 외가야 말할 것도 없다 했다. 궁녀를 모시는 하녀인 무수리를 어미로 둔 시아버지 영조로서는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다산 정약용의 후견인이며, 당시 내의원제조로 있던 번암 채제공은 자신의 문집인 번암집 독노중련 전에서 자신이 목격한 금등지사를 기록했는데 팔십을 넘긴 영조는 시도 때도 없이 잠자
혹자의 댓글 왈 키가 오척 단구인 고시(高柴)는 제나라 사람으로 자를 자고(子羔)라 하는데 노나라 후읍(邑)의 읍재(費宰)를 지내기도 했지만 공자는 자고를 배움이 없다하여 어리석다했다. 그런 자고를 위(衛)나라 계씨(季氏)의 재상으로 있던 자로가 노나라 비읍(費邑)의 읍재(費宰)로 추천을 하니 “남의 자식을 망치지…”라며 못마땅해 한다. 자로는 이에 “유민인언(有民人焉)이 있고, 유사직언(有社稷焉) 사직이 있습니다. 어찌 꼭 책을 읽어야만 배웠다 합니까”라면서 대든다. 말인즉 벼슬도 배움인데 꼭 책을 읽어야 공부냐. 뭐 그런 얘기다. 일종의 중사이경학(重思而輕學) 선사이후학(先思而後學) 주사이종학(主思而從學)的 소박(小薄)경험론으로 덤빈 것이다. 이에 공자는 박학이신사(博學而愼思) 선학이후사(先學而後思) 주학이종사(主學而從思)的 술이부작(述而不作)的 경험론의 책(責)이다. 예기에 보면 정(鄭)나라 대부 자피(子皮)가 지인의 아들에게 영지를 맡기자 그 왈, “저는 아직 젊은데다가 배움이 짧아 남을 다스릴 수가 없다”하니 대부 자피 왈, “정치를 하는 것이 곧 배움이며 수양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대부 자산(子産)이 옆에서 듣고 왈, “내 평생 학문을 한 연후에
부전녀전-그 애비에 그 딸? 수(隨)나라 문제(文帝) 양견(楊堅)때 대신 두의(竇毅)는 버르장머리 없는 딸로 인해 적지 않은 세월을 맘 고생한 인물이다. 성질머리가 지랄 같은 딸은 시집갈 나이가 됐음에도 여전히 괄괄했다. 책상머리에서 글만 읽은 선비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딸을 감당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애물단지 딸을 시집보내는데 엄청난 출혈을 한다. 공작새를 만들어놓고 성인 걸음으로 천보가 훨씬 넘는 거리에서 활을 당겨 공작새의 눈깔을 맞추면 내 딸과 내 재산의 반을 주겠다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목적(눈목目 과녁적的)이라는 고사가 나왔다. 장안에 난다 긴다 하는 젊은이들이 구름떼같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천보가 넘는 거리에서 활을 당긴다는 것은 보통 체력으로서는 가당키나 하랴. 결국 이연이란 젊은이가 공작의 눈깔을 맞췄다. 두의는 젊은이 이연에게 딸과 재물을 주자 불석천금대장부(不惜千金大丈夫)라며 재물은 놔두고 타고 왔던 말에 딸만 훌쩍 태워서 데려갔다. 이 처자가 훗날 정관의 치 당 태종 이세민을 낳은 여인이다. 예기(禮記)라는 책에 이런 글귀가 있다. 남자가 처음 성인이 될 때는 아버지가 교훈을 주며, 여자가 시집을 가면 어머니가 교훈을 준다
이맹희 행장기 외전 지난달 8월14일 삼성그룹 회장의 큰형 이맹희 CJ그룹 명예회장의 부고가 떴다. 죽어서 이별은 소리조차 없고(死別已呑聲) 살아 이별은 슬프기만 하다(生別生惻惻). 두보(杜甫)의 몽이백 이수(夢李白 二首)가 가당키나 하랴마는 84세란 결코 작지 않은 향수를 누렸다. 그런데 태어난 고국이 아닌 먼 타국 중국 북경에서 죽었다 전한다. 자식이 수천억을 쥐락펴락하는 굴지 그룹의 회장이요, 선대 아버지가 천문학적 숫자에 달하는 재산을 물려주고 죽었거늘 그런 집안의 큰아들이 멀리 타국에서 그렇게 죽어 갈 줄을 꿈엔들 생각이나 했으랴. 세상은 그를 일러 비운의 황태자라 했지만 없는 놈은 있는 것 마저 빼앗긴다는 마태복음(
장삼이사 왈, 사위가 뽕 쟁이랴. 1600년대 전후, 중국 명나라 신종 때 사람 유학자 홍응명(洪應明· 자성 自誠)은 독특한 처세훈을 담은 생활 철학서를 내놓는데 채근담(菜根譚)이다. 채근담은 대장정 때 팔로군 사령관 주덕이 읽었다 하고, 화국봉이 15세 때 읽었다하고, 등소평이 프랑스 유학 때 배안에서 읽었다고 하며, 시진핑이 16세 하방조치 당해 산속 토굴로 떠날 때 가져갔던 세권의 책 중에 하나라 전한다. 홍자성의 생몰연대가 분명치 않아 됨됨이는 알 수 없으나 강호제현의 문집에 언급된 글들을 종합해보면 처음으로 돌아가는 나그네라는 뜻의 환초도인(還初道人)으로 속세 인들은 그를 ‘처음처럼’이라 불렀다 한다. 책 제목의 채근이란 말은 소학 외편 선행 장 끝부분에 나오는 문장으로 사람이 풀뿌리를 씹을 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 이루랴.(人常能咬菜根卽百事可成) ‘훗날 백성들 사이에 얻어 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하늘의 가호다로 회자됐다함’에서 따온 말인데 이 문장은 송나라 유학자 왕신민(汪信民)의 말로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며 고지식한 제자를 일깨우면서 했던 말이라 전한다. 본 책은 모두 2권으로 섭세 편 도심 편 자연 편 수성 편으로 구
사관의 붓끝에는 눈이 없다. 임금 이 편전에 계신데 민린생이 문밖에서 엿보고 있었다(上御便殿 閔麟生從戶外以窺). 임금이 왈, “엿보는 자가 누구냐(上見之問於左右曰 彼何人耶)” 하니, 좌우에서 “사관 민린생입니다(左右對曰 史官閔麟生也)”라고 말했다. 감시당하는 것이 불쾌했던 임금은 말한다. 이제부터 사관의 입궐을 금하라(自今史官毋得每日詣闕). 그러자 사관은 경연 때는 병풍 뒤에 숨어서 엿들으며(經筵窺何屛障), 연회 때는 절차도 없이 숨어 들어왔다(又直入內宴). 태종은 극도로 사관을 싫어했고 두려워했다. 어느 날. 태종은 사냥을 갔다. 친히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져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한다.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그러나 얼굴을 변장하고 몰래 미행했던 사관(掩面面從)은 이렇게 기록한다. 사관은 알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말에서 떨어진 것이 뭐 그리 큰 실수라고 사관이 모르게 하라 했을까. 이는 평생을 말 타고 천하를 누빈 강골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 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했고 창피했으리라. 그러나 사관의 붓끝에는 눈(?)이 없었다.
시진핑과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자장이 공자께 인을 묻자 공자가 말한다. 천하에 다섯 가지를 행할 수 있으면 그것이 인이다. 그것이 뭐냐고 묻자 공자는 말한다. 공손· 관대함· 믿음· 민첩함· 베품인데(曰, 恭寬信敏惠) 공손하면 욕을 당하지 않고(恭則不侮), 관대하면 군중을 얻고(寬則得衆), 믿음직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일을 맡기고(信則人任焉 신칙인임언), 민첩하면 성공하게 되고(敏則有功), 베풀면 남을 부릴 수 있다(惠則足以使人). 그런데 논어양화편17-6문장인 이라는 문장은 논어 요왈 편 1문장 맨 끝줄에서는 이라고 썼다. 똑같은 문장이지만 양화편과 요왈편의 차이라면 인(人)과 민(民)의 차이다. 논어양화편에서는 이라 했고, 논어요왈편에서는 이라 해서 인(人)과 민(民)을 달리 썼음을 기억해야 한다. 논어 양화편의 에서의 인은 ‘국민들이 당신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주십시오’ 라고 일을 부탁하는 것이고, 논어 양화편의 에서의 민은 지도자가 아랫 사람한테 일을 맡겨서 시키는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자공이 정치에 관해 묻는다. 자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子貢問政) 공자는 답한다. “먹을 것을 풍족히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면 민(民)은 신(信)할 것이다” 족
친일 후손이 펄펄 나는 시대에 퇴계 이황은 경서문리(사서삼경으로 깨우침)가 난 선비이고, 남명조식은 경서문리와 사서문리(사마천의 사기로 깨우침)가 두루 통달한 선비이다. 그런 연유로 사람을 보는 안목인 지인지감이 퇴계하고는 많이 다르다. 한번은 퇴계 문하에 공부하겠다며 어린 선비가 찾아온다. 퇴계는 제자를 받을 때 꼭 시험을 치는데 일주일간 숙식을 함께 하며 그 성품을 본다. 어린 선비는 퇴계 문하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간절했던지 시험에 합격할 요량으로 일주일동안 밤을 세워가면서 사서삼경을 재독삼독하며 준비를 한다. 시험 당일 날 퇴계는 말한다. 일주일간 지켜본 결과 야성(野性)이 인성(人性)을 이겼구나. 그깟 시험이 무슨 그리 대수라고 낮에 일하고, 밤에 쉬는 것이 하늘의 이치이거늘 하늘의 이치를 거역하는 밤을 세워가면서까지 공부를 한단 말인가. 그런 강한(剛寒)을 난 감당할 수가 없네라며 내 친다. 그러자 어린 선비가 무릎을 꿇고 울면서 말한다. 선생님 문하에서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강할 뿐이지 야성이 인성을 무너뜨릴 만치 그런 강한은 아닙니다라고. 금오랑이 부의 판관(判官)을 체포(逮捕)하는 장면. 해동소학(海東小學)때 배움 당시 제자들과 함
우농의 세설 어디서 뭘 하든 일제 강점기 때 고문으로 사지가 절딴 난 사람은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님이시다. 그의 아호 벽옹(躄翁 앉은뱅이 노인 고문당해 앉은뱅이 됨)에서 보듯이 그는 앉은뱅이다. 조선총독부를 향해 눈길도 줘서는 안 된다며 총독부와 반대 방향으로 집을 지은 사람은 만해 한용운님이시다. 심산처럼 고문을 견딜 수도 없고 만해처럼 집을 돌려지을 만치 강단도 없기에 난 죽을 때까지 일제에 허리를 숙이지 않으리라며 선 채로 세수를 했던 이는 단재 신채호님이시다. 이 세분을 일러 세상은 일제 강점기 3절(三節)이라 불렀다. 대한민국 땅에서 숨을 쉬고 사는 모든 분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정부분 이분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음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시에는 음풍농월이 없고 오직 우국충정뿐이다. 어찌 이 땅엔 3절만 있으랴.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수많은 우국충절의 선비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지만 그중에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1910.9.8) 선비를 비껴 갈순 없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대사성을 지낸 이휘준(李彙濬)의 둘째 아들이며, 고종3년 1866년 약관(25세)에
우농의 세설 롯데가(家)와 제환공 평소에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같다가도 결정적인 상황이 닥치면 한사람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책이 있다. 세상은 이를 인문학(人文學)이라 한다. 관상학을 몰라도 사람을 보면 그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 풍수지리를 몰라도 땅을 보면 살만한 땅인지 놀만한 땅인지 공짜로 줘도 갖지 말아야 할 땅인지를 알 수 있는 것. 또한 인문학이다. 인문학과 고전(古典)은 분명히 다르다. 고전은 말 그대로 오래된 책이다. 오래됐다고 다 보물은 아니다. 명품이 오래돼야 보물인 것이다. 인문학은 글속에서 사람을 배우는 학문이다. 그 초보적인 책이 사서(四書)이다. 해제지동(孩提遲童)의 나이 3세 때 이미 글을 듣기 시작했으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動席) 나이 7세부터 읽기 시작하여 10년 공부라는 방년(芳年 꽃다운 나이) 16세에 마친다는 사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이다. 조선시대는 이를 성리학(性理學)이라 불렀다. 사람의 본성을 배우는 학문이란 뜻이다. 인문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과 답인데 벼슬아치가 되어 권력을 잡는 길. 돈을 무지무지하게 무진장 많이 벌어 거부가 되는 길. 권력도 돈도 아닌 초야에 묻혀 음풍
삼복과 경신수야 공명의 스승 사마 휘 수경 선생 왈, 삼욕(三慾)을 물리치면 신과 겸상한다했다. 삼욕은 식욕(食慾) 색욕(色慾) 수욕(睡慾)이다. 북송 초에 간행된 도교의 대장경 운급칠첨 권81 경신부(庚申部)를 간추려 뽑아 엮은 삼시중경(三尸中經)에 삼욕을 담당하는 충을 삼시충이라 하는데 뇌를 담당하는 상시(上尸)는 팽거(彭倨)요, 배꼽중간부분을 담당하는 중시(中尸)는 팽질(彭質)이요, 허리 아래를 담당하는 하시(下尸)는 팽교(彭矯)라 했다. 삼시 충은 일 년 중 일곱 번을 하늘의 신께 올라가 그 사람의 죄과를 일러바치는데 섣달 그믐날을 시작으로 그믐날을 제외한 60갑자 중에 57번째 일진이 경신일로 이날 사람이 잠든 틈에 몸에서 빠져나와 하늘에 가서 일러바치고 온다. 신은 사람 몸에서 몰래 빠져나온 삼시충의 고변을 근거로 죄의 경중을 따져 수(壽)와 명(命)을 부여하는데 명은 팔자로서 앞에 오는 범은 속여도 뒤 따라오는 팔자는 못 속인다하여 이때 팔자는 사주를 이기는 고약한 팔자가 된다. 수(壽)는 사람의 등급을 세 단계로 나눠 사(士)와 공(工)과 구촌(口寸)으로 분류한다. 사(士)는 남이 뼛골 쑤시게 벌어 놓으면 편히 놀고먹는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