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농의 세설 풍패지관(豊沛之館)의 之를 보는 눈 사람을 보는 안목인 지인지감(知人之鑑)이란 뜬 후가 아닌 뜨기 전 발탁에 묘미가 있다. 38세의 표옹은 1593년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 숙소에 머문다. 숙소 부엌에서 청년이 문장을 흥얼대면서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표옹은 청년에게 화부(火夫)가 어찌 장주(莊周)의 남화진경(南華眞經)을 아는가.라고 묻는다. 표옹이 도가의 서(書)에 밝은 까닭은 스승인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영향이다. 우계는 백인걸의 문도인데 상서를 배우면서 도가의 서를 접한다. 우계의 일백문도 중 한명인 진천송후인(鎭川宋后人) 표옹(瓢翁) 송영구(宋英耉)가 도가의 서인 장자를 익히 아는 이유는 그런 학맥 때문이다. 이런 도학자들을 벼슬이나 권력을 탐하지 않는다하여 처사라 하는데 정승 3명이 대제학 1명만 못하고, 대제학 3명이 처사 1명만 못하다(三政丞不如一大提學三大提學不如一處士)고 했다. 표옹 물음에 청년은 벼슬 살려고 몇 년 전에 시골서 올라왔는데 매번 과거에 낙방하여 호구지책으로 장작을 패고 있습니다. 이에 무료하여 욉니다.라고 답했다. 그럼 문장을 지을 줄은 아는가 하며, 포옹이 청년 앞으로 지필묵을 내밀
우농의 세설 상소문 쓰는 법 공자는 말을 할뿐이다. 그 많은 말들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제자가 됐다. 제자가 된 자들은 스승의 말을 목숨 걸고 기억해서 후대에게 스승이 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말을 전했다. 그러므로 논어는 기억으로 전달된 책이다. 기억이란 똑똑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게으른 사람이 들고 다니기 싫어서 머릿속에 담아두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기억은 오래가지 못하는 맹점이다. 그래서 기록 한다. 기록하는 순간 기억은 사라진다. 조선 선비들이 일생을 통해서 추구했던 것이 바로 기억이다. 이는 조선 선비들의 공부 방식이기도 하면서 생존을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 그는 선비로서는 아웃이다. 조선 선비들은 집에서는 기록을 해야 했고 집밖에서는 기억을 해야 했다. 조정에서는 임금과 경연을 해야 했으므로 수많은 말들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어야했다. 또 궁궐을 나와 술 한 잔을 하더라도 입에서 시(詩)구절은 물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가 막힘없이 나와야 했다. 그렇게 하려면 머릿속에 엄청난 양의 기억이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선비로 산다는 건 결코 녹녹한 게 아니다. 돈이 있고 없고는 관심 밖이다. 당장 집밖에 나가서 상대방의 말에
우농의 세설 아직도 살아있는 자 전두환 남을 속인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속인다면 사기(詐欺)다. 어떤 일을 모르고 한다면 그는 순진하거나 멍청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면 영악하거나 그악스런 것이다. 외국인 신분의 외국거주자 가수 스티브 유(38유승준가 인터넷 방송을 통해 대한민국에 돌아오겠다고 국민감정에 읍소하고 있다. 그는 한때 일요일아침 TV프로에서 드림팀으로 출연해 아름다운 청년이란 미칭(美稱)까지 얻은바 있다. 그런 그가 매국노 급으로 전락한 것은 입대를 앞두고 미국으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이게 13년 전 일이다. 병무청 관계자야 법률적으로 안 된다고 펄쩍 뛰겠지만 대한민국 땅에서 안 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대한민국 남자로 태어나면 목숨 걸고 지켜야하는 것 중 하나가 군대 문제다. 얼마 전 임 병장과 윤 일병 사건이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때쯤 어느 지방 도지사의 아들이 군대 내에서 후배 병사에 대한 폭행과 성추행 문제가 불거져 시끄러웠었다. 아버지이자 현직 도지사는 엄중하게 법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말은 맞지만 정답은 아니다. 현직 도지사의 아들을, 그것도 차기 대권을 바라보는 잠룡 아닌가. 이럴 땐 도지사직을
우농의 세설 인생 그렇게 살지 마 권력이 주어졌을 때 맘껏 내두를 수는 있다. 하지만 본바탕이 글러 먹었다면 언젠가는 그 바닥은 드러나게 된다. 남간정사에서 동춘당(宋某浚吉1606 선조39-1672 현종13)이 그의 감히 허여불가 고제 약천(1629 인조7-1711 숙종37)에게 했던 말이라 한다. 동춘당은 약천을 일러 훼예(毁譽)에 동요됨이 없고 득실(得失)에 한결 같았으니 참으로 공자(孔子)께서 이른바 직도(直道)로 임금과 백성을 섬긴다 함이 이 사람을 이른 말이라 하겠다. 조선 선비들의 처세술 신궁장에 의하면 벼슬하는 관리가 부귀를 알면서도 물러가지 않으면 반드시 위태로움과 욕을 당하여 치욕이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노자는 도덕경 32장에서 말한다. 처음 만든 것에는 이름이 있고, 이름 또한 이미(천하에 알려졌으면)있으면 대체로 그칠 줄 알아야 하나니 그침을 알면 이른바 위태로움이 없다(始制有名 名亦旣有 夫亦將知止 知止所以不殆). 이를 도덕경 44장에서 좀 더 쉽게 풀어서 말했는데 명예와 신체 중에 부모의 것은 어느 것인가(名與身孰親), 몸과 재물 중에 중한 것은 어느 것인가(身與貨孰多), 얻음과 잃음 중에 (몸을)병들게 하는 것은 어느 쪽인가(得與亡
우농의 세설 그래도 쪽(?) 팔린 것만은 분명하다. 남루한 선비가 향리의 골목에 들어섰는데 때마침 비가 내려 급한 김에 뛰어든다는 것이 좌수(座首)댁 처마 끝이다. 대청마루에는 열댓 명의 선비들이 술동이 하나씩 낀 채로 시회(詩會)중이다. 세상사에 관심 없고, 벼슬에 뜻을 놓은 지 오래된 선비는 행색이 초라할 밖에. 처마 끝 구석자리에 엉거주춤 선채로 시회중인 선비들에게 인사를 하니 일순 시회의 분위기가 잠시 깨지는듯하더니 이내 한 선비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묻는다. 뉘시기에 시회에 끼어들어 흥을 깨시는가? 갑자기 비가오기에 명색이 양반 끄트머리라 오는 비 맞을 수는 없고 해서 무례를 했소이다. 하니 지금 운자(韻字)에 맞춰 시를 짓고 있으니 한수 지어보시게 말한다. 그럼 앞 운자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니 성광문(成狂問)이네. 그럼 제가 미천하나마 앞 운자까지 맞춰 보렵니다. 성, 문무(文武)를 두루 배웠으나 둘 다 성공하지 못했네 그려. 광, 선비도 아니고 장수도 아닌 것이 반미치광이가 됐네 그려. 문, 행여 선비님께서 한양에 오시거든 나란 사람에 대해 물어봤으면 하네 그려. 욀송. 한양 땅에는 주막집 아이들 조차도 내 이름을 외우고 다닌다네 그려. 그러자 한
우농의 세설 버티는 자가 아닌 필요한자가 되라 맹자는 말한다. 양주는 자기만 위했으며, 털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한다고 해도 하지 않았다(孟子曰 楊子 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孟子盡心章句上). 맹자의 눈에 비친 양주는 극단의 개인주의자다. 이는 사회 통념의 윤리를 저해한다. 윤리는 법이 아닌 예를 먹고 자란다. 사람은 혼자 살수 없기에 예가 존재한다. 루신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예가 있다며 그 예에 거하고 싶다 고 했다. 양주는 국가와 사회 질서의 상징인 군주의 존재 자체를 거부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양주의 나만을 위해 산다는 위아설(爲我說)이다. 분노한 맹자는 등문공장구하에서 묵자와 싸잡아 성토한다. 양씨는 나만을 위하여 군주를 업신여기고(楊氏 爲我 是無君也) 묵씨는 겸애를 주장하여 부모를 모른다(墨氏 兼愛 是無父也)고 했다. 군주를 모르고 부모를 모르면 이는 짐승이다(無父無君 是禽獸也 孟子滕文公章句下). 개인의 행복이 국가의 권익에 우선한다며 내 몸의 터럭 하나가 천하의 이익보다 더 소중하다는 게 양주의 생각이다. 열자는 옛사람 백성자고(伯成子高)의 입을 빌려 말한다. 천하를 줘도 행복하지 않으면 받지 않으며, 저마다 입으로만 백
우농의 세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 했건만 스승 공자는 제자 증삼(曾子)에게 말한다. 선왕은 지덕과 요도가 있어 천하 백성을 따르니 백성은 화목하고 위아래 모두 원망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진도 팽목항을 찾았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은 사실상 외면이 아닌 거부했다. 국민투표로 선출됐고,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대통령께서 오셨는데 거부한 것이다. 어쩌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어서 이정도 쯤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닐지도. 비록 대통령의 권좌에는 올랐지만 국민들로부터 이렇게까지 미움을 받을 줄은 꿈엔들 생각했으랴.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이순천하민(以順天下民) 즉,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 악재가 또 터졌는데 혹자가 죽으면서 남겨놓은 메모가 화근이 된 것이다. 그 메모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들의 이름이 올라있다고 한다. 본래 자살이라는 것은 유가(儒家)에서는 절대 금기 사항이다. 공자는 이를 훼손이라 바꿔 부른다. 공자는 또 증삼에게 말한다. 다시 앉거라. 내가 너에게 말한다(復坐吾語汝부좌오어여).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受之父母수지부모)이니 감히 이것들을 훼손하지 않음(不敢毁傷불
우농의 세설 정치의 기본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연주한다. 가난한 나무꾼이 나무 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연주소리에 발을 멈추고는 한참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내려가곤 했다.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는 사람이 있음에 기뻐 나무꾼이 나무하고 내려가는 시간쯤이면 연주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무꾼이 보이지 않는다. 수소문 끝에 그의 이름은 종자기(鍾子期)였고 병들어 죽었음을 안다. 백아는 그의 무덤에서 곡(哭)하고 거문고 줄을 끊는다. 세상은 이를 백아절현(伯牙絶絃)이라 불렀다. 백아는 초나라 사람이지만 진나라에서 고관을 지낸 불운한 정치가다. 백아와 종자기는 본래 친구사이가 아니다. 고관을 지내던 백아가 나무꾼과 친구가 된다는 얘기는 후대의 설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천하제일의 명인 백아를 알아주는 군주는 없었다. 그를 알아준 건 산중에서 나무해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롱초(聾樵) 귀머거리 나무꾼이었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여자는 자기를 예뻐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고친다(士爲知己者死女爲悅己者容)는 말이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쓴 야사(野史) 사기史記에 나온다. 본래 이 말의 시발은 만사분
우농의 세설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민에 의존한다. 조선시대 맹자를 잘 아는 인물이 둘인데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과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다. 율곡 이모(李某)께서 23세에 장원급제했을 때 썼다는 천도책(天道策)을 혹자가 배우고자 하니 구봉에게 물어보라고 하자 혹자 왈, 노비에게 어찌 친구처럼 묻느뇨 했다. 이에 율곡 왈, 제하자(諸下者)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라. 구봉은 스승은 될지언정 감히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師可焉敢不可友. 하였다 하니 그 온축(蘊蓄 학문의 깊이)을 미뤄 짐작하겠다. 우암의 고제 권상하를 일러 호남 제일 문장이라 하며 우암 사후(死後) 그에게는 구름떼처럼 따르는 문도가 있는데 그중 주자학에 정통한 8명의 제자를 일러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라하며 한수재(寒水齋 아호는 주자어록 인데 스승 우암께서 지어줌)는 이들 강문팔학사와 맹자를 배강(背講 책을 안보고 묻고 답하는 공부)하는데 시작은 언제나 맹자이루하(孟子離婁下) 3장으로 부터다.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게 말한다. 군주가 신하를 자신의 손과 발처럼 여기면 신하가 임금을 마음 깊이 존경할 것이고, 군주가 신하를 개나 말처럼 여긴다면 신하는 임금을 평범한 백성 보듯이
우농의 세설 장무상망 도와자사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해낼 수 없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해낼 수 없다.(知之者不如好之者好之者不如樂之者論語雍也) 구멍 난 벼루가 열 개, 닳아 없어진 붓이 천개, 이 모두 약관이전 나이에 이뤄낸 추사의 자기기록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번암 채제공은 일생에 두 번 놀랐다는데 추사가 유학(幼學-10세 이전)에 썼다는 입춘첩과 다산 유학 때의 독서력이라 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룬 추사는 전각은 마음을 새기는 일이라며 제주 유배생활을 전각으로 마음을 추스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제자 이상적은 책을 가져다주는데 그중 한권이 학산당인보(學山堂印譜). 명말 정호가 인장 전각을 모아 엮은 책이다. 사마천은 술로 사귄 친구 술 다하면 끝나고(以酒交者 酒盡而交亦盡) 권력과 돈으로 사귄 친구 권력과 돈 다하면 끝난다.(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流)고 했다. 고마움에 뜨거운 여름날 가장 추운 세새한(歲塞寒)을 그려준다. 추사의 삶은 산수화가 아닌 뜻 그림이라는 세한도(歲寒圖)로 압축된다. 산도 물도 없는 한기(寒氣)만 감도는 산수화의 상식을 깡그리 깬 그림. 특이한 점은 오른쪽 하단 낙성관지(落成款識) 장무상망(長毋相忘)은 윗사람이 아랫
우농의 세설 찌질이 루저의 칼질이 테러라고? 박학불무택(博學不務擇) 특정 학문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학문을 공부하는 것의 달인 양천후인(陽川后人) 미수 허목은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 1513-1592)의 문인이다. 서자 출신으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문도인 그는 솔잎만 먹고 살았으며 곡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한다. 의복은 딸랑 한 벌의 베옷으로 잠을 잘 때는 책을 베개 삼아 15일은 좌로 눕고 15일은 우로 누워서 자는데 베옷은 언제나 방금 풀 먹여 다림질한 듯 벼리가 서있었다 한다. 하루는 제자 미수 문(問), 어찌 주무시고 났음에도 옷이 후줄근하지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수암 답, 지천명의 나이가 되면 옷을 어떻게 입어하는지 잠을 어떻게 자야하는지 알게 될 걸세. 모름지기 남아는 오십이 되면 옷에 주름이 잡히면 안 되지. 남아는 옷의 태가 살아 있음을 보고 수양(修養)의 고저를 알지. 남아의 옷은 곧 강기목 벼리이니라 강기목야(綱紀目也). 얼마 전 현 정권에게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마치 울고 싶은데때려준 꼴이 발생했다. 오십 중반 왼손칼잡이 미제가자(未齊家者) 기초생활수급대상자인 혹자의 칼질에 미국 대사 얼굴이 80바
우농의 세설 시인들이 가난한 까닭은 시를 아는 어려움이 시를 짓는 어려움보다도 더하다. (知詩之難甚於作詩之難) 쉽게 말해서 시를 짓는 것보다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이다. 시를 안다는 것은 시인이 시 한편을 지을 때 어떤 환경에서 무슨 생각으로 지었을까 하는 그 감정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는 곧 독자가 시인의 환경과 처지에까지 도달을 해야 만이 시를 제대로 이해 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흔히 시를 일러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는데 남송 때 학자 조희곡(趙希鵠1195-1242)은 시를 쓰는 자의 입장에서 말하길 가슴 속에는 만권의 책이 들어 있고 흉중유만권서 胸中有萬卷書, 눈으로는 앞 시대의 전적을 봐야하고 목포전대기적 目飽前代寄蹟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우차철마적반又車轍馬迹半 천하의 반쯤은 다녀본 후 비로소 붓을 든다천하방가불필天下方可不筆라고 했다. 한편 소철 북송 北宋(1009-1066) 소순의 아들이며 소동파의 아우은 시를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두 가지를 말한다. 독만권서(讀萬卷書)와 행만리로(行萬里路)가 그것이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밖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에 시를 보면 보인다는 말이다. 시인은 말한다. 시(詩)란 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