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매일 아침 체크 해온 것이 국내외 코로나19 발생 현황이다. 확진자와 사망자 추이를 보면 주식시장보다 더 변화무상하다. 예측 가능한 ‘변이’라는 또 하나의 변수 때문에 모든 속단은 금물이다. 이제 전문가들은 최고점을 찍고 내려오는 중이라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바이러스 세력들이 대체로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하락장의 숫자뿐이다. 2019년 말 최초 발견된 코로나19는 2020년 초 하루평균 한 자릿수에 불과했던 것이 2년여 만에 100만 명(잠정 집계)에 육박했다. 지금은 분명 급하강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4월 초인 현재 30만 명을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숫자는 처음엔 상상조차 못 했지만, 치사율이 떨어지면서 초창기의 극심한 공포감은 상당 부분 사라졌다. 전 세계에서도 백신 접종률이 매우 높은 우리나라는 사회적 거리 두기 완화와 함께 노마스크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미 많은 나라가 제한을 풀면서 해외여행까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전으론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확신한다. 마스크 착용 의무나 사회적 거리 두기는 사라질지 몰라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 우리 앞에 다가온 역사의 변곡점’은 절대 과거로
[용인신문] Q. 용인에서 4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주요경력과 근황은? = 주요경력은 미래한국당 대표, 자유한국당 사무총장, 한나라당 대변인,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 KBL 한국프로농구 총재 등을 역임했다. 약 2년 전 제21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용인지역을 지켜보는 시간을 가졌다. Q. 2020년 총선 불출마 선언과 함께 사실상 정계은퇴 의사를 밝혔다. 이후 자유한국당(현 국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 대표 역임하기도 했지만, 다시 현실 정치에 나선 이유는? = 국회의원은 정치인, 지자체장은 행정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불출마 선언을 하고 약 1년여 동안 시장직 도전에 대한 준비보다 고민을 많이 했다. 중앙정치에서 보고 배웠던 행정적인 경험을 19년 살아온 용인에 쏟아붓는다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16년 동안 한 지역의 국회의원을 만들어 주신 것에 대한 봉사가 아닌, 보답으로써 이번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Q.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면됐는데 정치적 연계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닌지? = 박 전 대통령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할 정도의 경험치를 쌓았다고 생각한다. Q. 용인시장에 도전하는 이유는? =
[용인신문] Q. 중앙지 기자 출신 정치인이다. 정치에 입문한 이유는? =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측이, 4년 뒤 17대 총선 때엔 최병렬 대표 측이 정치를 권유했다. 그러나 언론인으로 계속 활동하겠다며 고사했다. 2006년 1월 중앙일보 워싱턴특파원으로 부임하기에 앞서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이듬해 대선 준비 차원에서 도와달라고 했으나 사양하고 미국 워싱턴으로 가서 3년 6개월 간 특파원으로 활동했다. 귀국해서 약 2년간 중앙일보 정치부장으로 일한 뒤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인 2012년 3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19대 총선 중앙선대위 대변인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다. 25년 가량의 언론인 생활을 마감하고 정치에 뛰어드는 게 좋은지 고민하다 6년 전 박근혜 당시 대표의 부탁을 뿌리친 데 대한 미안함, 2012년의 경우 총선에 이어 대선까지 치러야 하는 정치적 상황의 엄중함을 고려해서 대변인직을 수락했다. Q. 2016년과 2020년 총선 당시 용인지역 선거구에서 연속 출마했다. 2년 만에 용인시장으로 노선을 바꾼 이유는? = 19대 국회의원 시절인 2014년 용인 기흥의 용인을 당협위원장을 맡았고, 시민들과
[용인신문] 용인시 전역을 돌아볼 때면 아쉬움과 놀라움이 교차할 때가 많다. 급속한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빠른 도시발전과정이 정상인지 의구심마저 들기도 하지만 자칫 급조된 도시공동체의 전형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난개발 오명 때문에 아파트 분양도 힘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용인은 수도권의 핫플레이스로 부상했다. 지난 대통령선거 결과에서도 보았듯이 이미 강남 수준에 버금가는 지역들도 꽤 있다. 최고급 브랜드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고, 전국에서 인재들이 몰려들 정도로 살기 좋은 곳이 용인이다. 예로부터 ‘사거용인’이라고 했지만, 이젠 ‘생거용인’이라는 말이 더 자연스럽다. 부동산 투자의 메카로도 용인 만한 곳이 없으니까. 용인은 1996년 군 단위에서 시로 승격할 때 만해도 ‘도농복합시’라고 했다. 26년이 지난 현재는 ‘특례시’라는 다소 무거운 이름이 덧붙여졌다. 하지만 특례시보다는 ‘도농복합시’가 더 어울릴 정도로 도시면적과 인구비율로만 따져본다면 도시양극화가 극명해 보인다. 처인구는 면적으로 볼 때 농촌 비중이 크다. 그만큼 기회의 땅이기도 하지만 방치된 곳이기도 하다. 안타깝지만 아직도 도시기반시설이 미비하거나 엉망인 곳이 허
새누리당 IT분야 인재로 영입 정치 첫발 세계적인 반도체 시티 조성 적임자 판단 대기업 경력 25년·정치경력 10년 쌓아 시민이 원하는 ‘지역발전’ 준비된 후보 [용인신문] Q.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은? = 19대 공천을 위한 새누리당 인재영입위원회에서 IT분야 인재로 영입되면서 정치를 시작했다. 2012년 19대 대구 북구갑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미래창조과학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새누리당 대변인, 바른미래당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는 국민의힘 평당원이다. 첫 직장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었다. 1986년부터 KT에 근무하면서 전 국민이 많이 사용하는 1588, 080, 콜렉트콜 등 다양한 통신서비스를 개발, 사업화했다. 그 성과로 두 번째 여성 임원이 되었고 총 24년을 근무했다. 주요 경력은 ‘19대 국회의원과 KT 상무’라고 할 수 있다. Q. 대구광역시 출신이다. 2012년과 2016년 총선에서 대구 북갑에서 출마했다. 용인을 선택한 이유는? = 용인에는 2011년 이사 왔다. 19대 공천 과정에서 IT분야 인재영입 케이스로 추천되었다. 당연히 비례대표를 받을 줄 알았지만 대구에서 초, 중, 고, 대학까지
20년 언론인 생활 접고 1998년 정치 입문 문재인 정권 실망 민주당 탈당 국힘 입당 정치력·경륜·정직·국제감각 등 최대 강점 용인의 잠재된 힘 이끌어내 성장가도 확신 [용인신문] Q.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과 근황은? = 1998년 10월, 20년 가까운 언론계를 떠나 김대중 총재의 새정치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시사저널 워싱턴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와 정치부장을 맡고 있을 때인데, 여당 부대변인으로 스카웃 된 것이다. 제17대, 18대 총선에 출마했고, 대한건설협회 상임감사, 한국감사협회 회장, 한국외대 외래교수, 한국청소년운동연합 경기도지부장, 용인시 부시장을 역임했다. Q. 용인시 첫 제2부시장을 지냈지만, 현 민선 8기 출범 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현 백군기 시장과 관계는?) = 용인시 제2부시장의 직위는 정확히 말하면 정무직이 아니라 개방형 임용직 공무원이다. 법적으로 임기가 보장되어 있다. 함께 일한 시장을 따라 나가야 한다? 그 생각 자체가 잘못 된 거다. 누가 시켰는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두 사람이 제 사무실 앞에서 ‘부시장 물러가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번갈아 시위를 했다.
[용인신문] 산티에고에 이어 제주의 길 이야기까지 김젬마 시인이 두 번째 시집 『와랑와랑』(천년의시)을 펴냈다. 산티에고 기행기인 산문집 『프렌즈 온더 로드』를 펴낸 바 있는 김 시인이 이번엔 제주의 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집 『와랑와랑』에는 시인이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그들의 흔적이 남긴 바람의 기도와 편지로 가득하다. 시인은 길에서 만난 초록 그늘에 모여 이사 가는 개미들의 발자국에서 지구를 떠받치는 개미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긴다. 그리하여 세상의 무수한 길을 걸으며 사진가의 눈으로 모든 것이 조락해 가는 11월에서 역설적으로 “모두 다 사라진 것이 아닌 달”(「달랑 남은 나뭇잎」)을 발견해 낸다. 이번 시집의 중반부 이후에 배치된 제주 시편들에서 시인은 탁월한 음성적 가락으로 길에 스민 삶의 애환과 정겨움을 발랄한 리듬에 실어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리는 여기서 탁월한 음유시인이란 길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람 많은 제주의 올레길과 그 속에 담긴 삶의 내력을 청각적 결합으로 표현한 “와랑와랑”도 그 한 예라 여겨진다. 문학평론가 오민석은 해설에서 “김젬마는 디스토피아의 시궁창에서 유토피아를 꿈꾸는 시인”이라며 “동화
1990년 공직 입문… 요직 두루거쳐 용인부시장 재임시 각종 현안해결사 정치 신인이지만 역량만큼은 베테랑 특례시 원년 맞아 자급자족 도시 초석 [용인신문] Q. 고위 공직자 출신이다. 주요경력과 근황은? = 행정고시 33회로 1990년도에 공직에 입문하여 일반직의 최고위직인 경기경제자유구역청장(지방관리관, 1급)까지 역임했다. 32년간 용인부시장, 화성부시장과, 경기도청의 기획조정실장, 경제투자실장, 문화관광국장, 투자진흥관 등 재정, 경제, 외국자본유치, 문화체육 등 다양한 업무를 기획하고 추진하였다. 또한 행정안전부 국가정보개발원 기획조정실장을 맡으면서 정부부처와도 인적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1년여 동안 용인시의 각종 현안과 현장들을 둘러보고, 전문가 그룹의 자문을 받는 등 지방선거 출마 준비를 해왔다. Q. 공직생활 마감 후 야당인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보수성향 정당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가? = 사실 정당을 선택할 때 고민을 많이 한다고 하는데 저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개인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하고, 어려운 사람들은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즉 따듯한 보수라고 생각한다. 민주당 정권이 펼친 정책 중 탈원전, 부동
용인시의원·경기도의원 값진 경험 GTX·SRT 조기 완공·광역버스 연계 사통팔달 교통망 구축 시민불편 해소 준비된 후보가 시장선거 나서야 승리 [용인신문] Q. 정치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주요경력과 근황은? = 1982년 군대를 다녀온 뒤 여주, 이천, 용인 민정당 청년회장을 정동성 국회의원 시기에 시작했고,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제3, 4대 용인시의원 활동을 했다. 2014년부터 경기도의원을 지냈다. 농업정책에 관심이 많아 경기도4H연합회장 등 농업인의 대변 역할을 해왔다. 또 용인중앙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역임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19, 20,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선거대책본부장과 부위원장을 맡아 지역활동을 지원했고, 최근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당선인의 용인시 총괄조직본부장과 용인시 후원회 회장을 맡았다. Q. 2006년 지방선거 이후 건강이 악화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건강 상태는? = 지금 현재 건강상태는 굉장히 양호하다. 2008년도에 간이식 수술을 진행하여 지금은 완전히 회복하여 활동하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평소 주변 분들과 생활체육활동 교류로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용인신문]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제2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윤 당선인은 24만 7000여 표 차이로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직선제 선거 이후 가장 근소한 표 차로 당선되었다. 이번 대선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제6공화국에서 실시된 8번의 선거 중 가장 인기 없는 인물들이 보수 양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재명 후보는 당내 경선 과정부터 이른바 대장동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집권당의 선거인단들은 문제 제기를 무시했다. 이재명 경선 후보는 지난해 10월 10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제1야당 국민의힘은 11월 5일 윤석열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검찰총장을 사퇴하고 정치에 입문한 지 4개월 만에 제1야당의 대선 후보가 된 윤석열은 검증되지 않은 정치 신인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설화는 윤 후보의 인기를 바닥까지 끌어내렸고 배우자 김건희 씨를 둘러싼 의혹은 선거 기간 내내 윤 후보를 괴롭혔다. 상대인 이재명 후보 배우자 김혜경 씨도 불법 의전과 법인카드 부당 사용의 혐의를 받아 유력 대선 후보 배우자들이 나란히 대국민 사과를 하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벌어졌다. 김혜경, 김건희
용인지역서 윤석열 당선인 48.34% 득표 47.90% 얻은 이재명 후보에 초박빙 승리 6월 지방선거서 ‘2라운드’ 민심 향배 촉각 [용인신문] #윤석열 당선인 협치와 대통합 과제 20대 대통령 선거가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윤 당선인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보다 24만 7000표(0.73%p) 차로 앞서는 초박빙 결과를 보였다. 이번 대선은 역대 가장 치열했던 선거전으로 기록될 만큼 두 후보 간의 공방은 막판까지 뜨거웠다. 선거 막바지에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이슈 또한 큰 변수 중 하나였다. 다당제를 부르짖던 안 후보의 사퇴와 합당 예고는 양당제 구도를 더욱 고착화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번 선거 결과에서 정의당을 비롯한 소수정당들에 대한 민심 이반도 두드러졌다. 20·30세대의 젠더 이슈는 성별 갈라치기라는 고도의 정치 프레임으로 덧씌워졌다. 1, 2위를 차지한 윤-이 후보는 선거전 내내 네거티브 공세를 펼쳤고, 그 결과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두 후보자의 배우자 리스크 역시 선거판에 심한 요동을 불러왔다. 역대 최대 비호감 선거가 되는 주요 원인으로도 작동했다. 선거는 끝났지만, 후유
[용인신문]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초박빙의 득표율차(0.73%p)로 당선됐다. 1, 2위 후보 지지자들은 환희와 안도 쪽보단 슬픔과 절망 쪽의 무게감이 더 컸을 것이다. 세상 이치가 얻은 것보다는 잃어버린 상실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패자인 이재명 후보는 초박빙이라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곧바로 인정했다.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패배를 한동안 인정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그래서 대한민국은 위대하다. 국민은 촛불정권 5년 만에 다시 탄핵을 당했던 정권에게 정부를 맡겼다. 이 또한 국민의 상실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선거 기간 내내 국민은 거대 양당의 공허한 말 잔치 때문에 괴로웠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성별, 세대 간 갈등 부추김이다. 정치인들이 이를 선거전략으로 활용했다는 게 문제였다. 정치권이 앞장서서 젠더 이슈를 성별 갈라치기로 사회적 분열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대남(20대 남성)만을 타킷으로 소위 ‘성별 갈라치기’를 하는 바람에 이대녀(20대 여성)의 반발을 불러왔다. 정치권이 총성없는 전쟁을 부추긴 꼴이다. 다음 결과를 보면 득보다는 실이 컸음을 알수 있다. 지상파TV 3사의 출구조사 결과 20대 남성 표심은 윤 당선인에게 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