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신문] 관중은 자신의 책 관자 목민 편에서 네 개의 줄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을 쓰고 있다. 하늘은 나라를 보살핌에 있어 그 나라 사방, 네 귀퉁이에 끈을 묶어 나라가 기울어지거나 엎어져 망하지 아니하게끔 끈의 균형을 유지토록 한다. 이를 전한 시기의 공자라 칭송받은 한나라 무제 때 춘추 박사를 지낸 동중서는 이 네 개의 줄을 일러 나라를 지탱하는 예의염치라 풀었다. 여기서 예라고 하는 줄 하나가 끊어지면 나라의 질서가 엉망일 것이고, 의라는 줄마저 끊어진다면 나라가 휘청할 것이고, 염이라는 줄마저 끊어진다면 나라가 기울 것이고, 더 나아가 치라는 줄마저 끊어진다면 그때는 나라가 망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아예 멸滅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예의염치는 물과 같아서 반드시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위에 있는 것은 오직 목민관이 전부라 했거늘 목민관이라 함은 분명 직위는 높은듯하나 하는 일에서는 백성들에게 봉직하는 공직자를 말함인데 이러한 목민관을 일러 모심청관이라 한다. 엄마의 마음으로 백성의 소리를 듣는 관리라는 말이다. 엄마란 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곧 목민관은 백성의 아픔을 들어 해결해 줄 수 있어야 한다
[용인신문] 사마천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공자께서 존경하셨던 인물이 몇 분 계셨는데 주왕실 서고 책임자 노자, 위나라 대부 거백옥, 제나라 재상 안평중, 정나라 재상 자산. 노나라 가신 맹손작 <논어에는 맹공작으로 표기됨>이나 논어만 놓고 본다면 거백옥을 가장 존경한 듯하다. 거백옥의 인물됨은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을 했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벼슬에 물러나 자신의 몸을 돌아보는 것으로 수기와 치인의 균형을 이뤘던 인물이다. 한번은 공자께서 노나라에 계실 때 거백옥은 하인을 보내어 공자께 안부를 전한 일이 논어 헌문편 14-26문장에 기록되길 “거백옥이 공자께 하인을 보내니 공자께서 그와 더불어 자리하시면서 묻기를 대부 거백옥께서는 어찌 지내고 계시는가?” 이에 하인이 답한다. “저희 대부님께서는 사소한 잘못이라도 줄이려고 무척 애는 쓰시는 것 같은데 그게 잘 안되나 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당시 거백옥의 나이는 대략 졸수를 육박하는 나이라 했다. 그쯤 나이에 잘못한들 뭘 얼마나 하겠으며 줄여야 할 만큼의 사소한 잘못인들 있으랴. 유안이 쓴 회남자 원도훈 편에 따르면 거백옥은 50살이 되니 49년 동안 살아온 인생이 많은 부분 잘못됐음
[용인신문] 중국 진나라 사람 장화가 쓴 박물지 문적고 6편에 따르면 성인의 말씀을 경이라 하는데 본시 성인의 말씀은 먹물이 남아서 더 쓴 것도 아니고, 먹물이 모자라서 덜 씀도 아닌 그야말로 꼭 필요한 말씀만 쓰신지라. 무릇 일반 범부가 그 말씀을 이해는 고사하고 읽기에도 어려운지라, 이에 밝으신 현자가 나셔서 그 성인의 말씀을 풀어주셨는데 이를 전이라 한다. 그리하여 후학들은 이를 성경현전聖經賢傳이라며 줄여서 경전이라 불렀다. 성인의 말씀이라는 것은 그리 특별할 게 없는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 곧 그것이다. 그중 하나가 관자일립이라 불리는 신년 첩일 것이다. 관자는 논어에도 몇 번씩이나 언급되는 인물로 제나라 환공을 도와 최초로 춘추오패를 이룬 인물이요, 변방의 척박한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제나라를 부국강병의 국가로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하다. 관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압축하여 말한다면 “백성들을 잘 먹고 잘살게 하라.”가 전부다. 여기에 대한 실천방안으로 백성들의 삶에 백년지대계를 세우는데 그의 말을 쉽게 풀어쓰면 “일 년을 살기 위한 계획으로 가장 좋은 것은 곡식을 심는 것이 으뜸이고, 십 년을 살기 위한 계획으로 가장 좋은 것은 나무를 심는 것이며, 백
[용인신문] 하루는 제자 원헌이 부끄러움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이렇게 답한다. 나라에 도가 있음에도 딱히 하는 일 없이 녹봉만 받아먹는 것이 부끄러움이요. 나라에 도가 없음에도 능히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녹봉만 받아먹는 것 이 또한 부끄러움이니라. 이를 좀 더 완곡히 풀어놓은 이가 맹자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일정량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공자 맹자보다 앞선 옛글은 이를 후안무치라하여 얼굴이 두꺼워서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의미이다. 맹자표현에 의하면 세상에는 두 개의 무리가 있다는데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선을 행하는 순임금의 무리들과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이고 닭이 울면 일어나서 부지런히 이익을 찾는 도척의 무리와 같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후학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주석을 단다. 저들이 저리도 순임금의 무리처럼 선을 행하든 도척의 무리처럼 이익을 찾든 거기에는 일정량 섬겨야 할 의무가 있고 지켜야 할 본분이 있다는 것이다. 섬기는 것 중에 가장 큰 일은 어버이 섬기는 일이요, 지키는 것 중에 가장 큰 일은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부모님 봉양을 잘해드리는 것이 섬김의 근본이고, 자
[용인신문] 공자의 제자 자공이 정치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는 세 가지로 답한다.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며, 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며, 이를 기반으로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받아내는 것이라 했다. 정치를 일러 군치덕 민유득이라 한다. 군주는 덕으로 정치를 베풀고, 백성은 실질적 이득을 얻음이다는 말이다. 정치란 것은 어려울 것도 그렇다고 복잡할 것도 없다. 그저 덕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고 백성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백성들이 원하는 그것을 안 해주려니 나라가 시끄러운 거다.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한유의 말 중에 평평하지 못하고 기울면 운다는 말이 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은 배고프면 신음을 낼 수밖에 없다. 허기가 졌거늘 어찌 웃음이 나오겠는가. 노나라 군주 애공은 가족과 측근들에게만 훌륭한 군주였다. 그러니 백성들은 늘 춥고 배고프니 나라가 시끄러울 수밖에…. 하루는 공자께 묻는다. 어떻게 해야 백성들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는 이렇게 답한다. 오로지 백성만 위하는 바른 사람을 쓰고, 오로지 제한 몸 위하는 굽은 사람을 버려두면 됩니다. 고래로 덕치를 베풀면 민심을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정치란 수기 이후에 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용인신문] 19세에 이른 공자는 송나라 여인 올관씨를 아내로 맞아 아들 공리를 낳고, 이십 삼사 세쯤에 이르러 무슨 연유에선지는 모르나 아내와 헤어진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공자 출처’, 곧 ‘공자는 아내를 내보냈다.’라는 글자이다. 한나라 문제 때 박사를 지낸 한영이 쓴 한시외전에 따르면 맹자는 ‘휴처’ 했다고 기록한다. 출처는 ‘아내를 내쫓았다’라는 의미에 가깝고, 휴처는 ‘아내의 직분을 그만두게 한다.’에 가깝다 하겠다. 어쨌거나 성인들의 아내 관은 일반 범부들의 생각과는 분명 결이 다르긴 하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공자의 아내에 관한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공자께서 14년간 철환주유 중 위나라에 계실 무렵 68세쯤에 이른 어느 날 출처한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아들 공리가 죽는다. 서너 달 후 제자 염백우가 문둥병에 걸려 스승 공자께서 병문안을 가신다. 염백우는 병이 전염될 수 있다며 방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공자께서는 창문 너머로 제자를 향해 말한다. ‘이리도 훌륭한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몹쓸 병에 걸리다니’라며 탄식을 한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기독교 경전에도 기록되어있다. 기독교 경전 누가복음 5장 12~
[용인신문] 갈릴리 호수 가의 작은 어촌 가버나움에 사는 어부 베드로에게 청년 예수는 먼저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이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고 성서는 기록한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제자 베드로는 스승 예수보다 장장 10년 이상의 연배였다. 가정을 가진 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는 십계명의 율법이 버젓이 살아있는 유대 사회에서 모셔야 할 부모까지 남겨두고 나이 차를 개의치 않고 따를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당시 예수에 대한 평가는 싸늘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으로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세리 마태의 기록이라 전하는 마태복음 11:19 절이나 의사 누가의 기록이라 전하는 누가복음 7:34 절에 따르면 참 민망하기까지 하다. 완곡히 풀어쓴다면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먹는 것만 밝히고, 술만 퍼 마셔대는 주정뱅이쯤으로 인식했다. 기껏 친구라야 세리와 죄인들이 전부인 그저 그런 정도의 인물이다. 예수의 막내 제자 요한의 기록은 더 가관이다. 요한복음 7:15 절의 기록은 이렇다. “유대인들이 기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용인신문] 제나라 선왕이 맹자께 물었다. “신하가 임금을 치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까?” 이에 맹자는 답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있기도 하지요.” 그러자 선왕은 놀라서 되묻는다. “신하가 임금을 죽인다는 게 될 법이나 한 소리입니까?” 맹자가 답하기를 “인을 해치는 사람을 도적이라 하고, 의로움을 해치는 사람은 잔악한 자라 하고, 세상은 그런 자들을 그냥 필부라고 합니다. 저는 필부에 불과한 주왕을 베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주 임금을 시해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맹자다운 우문에 대한 현답이 아닐 수 없다. 맹자의 일화를 살펴보면 공자를 변호하고 오로지 공자만 존경한 인물 한 사람을 들라면 맹자가 유일하다. 맹자 양혜왕하편에 따르면 ‘탕방걸 무왕벌주’라는 고사가 나온다. 탕이 걸왕을 추방했고, 무가 주왕을 벌주었다는 말이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 할 때는 신하였던 자와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그 임금을 벌 주기도 한다. 맹자 이루장구상7-9문장에서는 걸왕과 주왕이 권좌에서 쫓겨난 장면을 꽤 완곡한 문체로 기록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잃은 것은 그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며 그 백성을 잃은 것은 그 들
[용인신문] 위나라 군주 영공은 위나라 32대 군주다. 춘추좌씨전 소공 7년조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는 드물게 출생 기록이 전해지는 인물이다. 위 영공은 공자와 동시대 인물로 공자보다는 나이가 무려 11세나 연하다. 그는 기원전 534년 그의 나이 7세 때 군주의 자리에 올라 기원전 493년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장장 42년에 걸쳐 군주의 자리를 지킨 인물이다. 그가 죽을 때 공자의 나이 59세다. 7세부터 48세 나이에 이르도록 군주로서 위나라를 다스렸는데 권모와 술수의 시대였다. 폭력과 전쟁이 정당화되는 패도의 세상에서 무지하기 짝이 없고, 혼미하기 이를 데 없는 위영공임에도 나라가 망하지 않고,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게 살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을 잘 써서였다는 게 논어의 평가다. 공자께서 노나라 실권자 계강자와 시국을 논하는 장면에서 위나라가 망하지 않는 이유가 대화 중에서 나온다. 논어헌문편 14-20문장에 그 기록이 있으니 공자께서 위나라 영공은 무도한 자라고 말하자 계강자가 이렇게 되묻는다. “그 정도의 무도한 인간이 군주로 있는데 어째서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겁니까?” 이에 공자는 “제1대부 공문자가 외교를 다스리고, 제
[용인신문] 백성들의 안녕과 백성들의 넉넉한 삶을 최우선 목적으로 하는, 이를 실천하면서 무력이나 법의 논리가 아닌 예와 덕을 통해 백성들을 돌아보는 정치, 이른바 맹자가 말한 ‘왕도정치’다. 그래서 내가 저지른 행동이 내 마음에 비추고 너의 마음에 비추어 봐도 결코 부끄러움이 없을 때 비로소 남을 다스릴 수 있다는 데서 맹자가 말하는 민본주의 기본은 시작된다. 나도 부끄럽고, 너도 부끄럽다면 그런 사람은 누군가를 다스리는 위치에서는 곤란하다. 맹자가 말하는 민본이라는 것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은 그다음이며, 군주는 가장 가볍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백성들보다 못한 도덕률과 청렴성에 한참도 못 미치는 오염(?)의 의혹이나 받는다면 백성들은 그가 갖는 권력에 두려운 나머지 입 다물고 고개 숙일 뿐이지 마음으로는 아닐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첫 번째 덕목으로 수신을 말한다. 요즘이 어느 땐데 아직도 수신제가 운운하느냐 하겠지만 인류가 공자를 말하고 맹자를 말하는 데는 단 하나의 이유만 존재한다. 인류는 아직도 공자나 맹자를 대체할 인물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작금의 우리나라는 그 옛날 케케 묵었을 것 같은 치자
[용인신문]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 못 한다.”라는 말을 마치 경전의 한 부분인 양 입에 달고 살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도 남도 아닌 가난 당사자 백성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가난은 백성들의 몫이고, 가난은 백성들만이 해결해야 하는 숙제와 같은 것으로 당연시되는 임금이 주인이던 시대에는 이 말이 일견 타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민이 주인인 시대에는 조금은 달리 해석될 수도 있는 부분 이기도 하다. 지금은 패도니 왕도니 이런 시대가 아니다. 그야말로 민주사회다. 국민이 주인이 된다는 세상인 것이다. 문제는 주인으로서의 생활을 사느냐에 방점이 있는 거다. 왕도시대든 패도시대든 백성들의 의사에 관계없이 군주가 선다는 점이고, 요즘 세상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권좌에 오르는 세상이다. 그 사람이 똑똑하든 아둔하든 그건 그리 중요치 않다. 무슨 짓을 하든 국민 개개인으로부터 선택의 증명 낙인 도장 한 개만 받아내면 누구든 법이 정한 임기 년 수 만큼은 떵떵거리며 산다. 이 땅의 관련 법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다수의 국민들도 동의한 거고 선택당한 자의 과거가 어떻든 그건 별개다. 국민 개개인으로부터 도장 한 개를 받아냈느냐 아니냐의 결정만 존재할 뿐
[용인신문] ‘공부는 끝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공부하는 사람은 많으나 끝이 없을 정도로 공부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공부는 늘상 반복인 것 같으면서도 실상은 꼭 새로움에 방점을 찍는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술이편7-27문장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술하는 폐단이 내게는 없다. 많이 들어서 그중에 옳은 것은 따르고, 또 많이 읽어서 이를 마음에 새긴다면 이것이 진실로 아는 것에 그 다음쯤 될 것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자신은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아니라 오로지 배워서 아는 자라고 밝히고 있다. 공자는 하루를 몸을 깨우고 지성을 깨우는 것으로 시작한 인물이다. 인류에 각 나이별로 이른바 10년의 법칙 열길 우물론 같은 10년 터울로 어떻게 살다 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간 인물 또한 공자이다. 그가 70세에 이르러 고백했다는 자술에 따르면 그는 15세에 이르러 공부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30세가 되니 서는데 부족함이 없었으며 40세가 되니 그 무엇에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비로소 50세가 되어서야 하늘을 알았다고 했다. 60세가 되니 다양한 인생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했고, 70세가 되어서야 마음이 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