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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농길은 어디로 갔을까?

김태근(용인문화원 부설 용인학연구소 소장)

 

[용인신문] 사람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이 땅에도 이름을 붙인다. 사람들이 이름으로 서로를 구분하듯이 땅에도 이름을 붙여 편리하게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지명 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녹아있다.

 

얼마 전까지 김량장동 남구의 골목길을 ‘석농길’이라 불렀다. 이 명칭이 붙은 것은 김량장동 남쪽 노고봉 산록에 독립운동가 석농 유근 선생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사거리 부근 도로 이정표에는 ‘석농길’이라는 표지판도 있었다.

 

석농(石儂) 유근(柳瑾, 1861~1921) 선생은 언론인이며 독립운동가로 용인시 처인구 마평동에서 태어났다. 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으며 만민공동회를 주도하다 체포되기도 했다.

 

1898년 4월에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주필이 되었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 신문에 을사 오적을 꾸짖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 이 일로 언론계를 떠나 잠시 교육활동과 민족의 역사서 편찬에 전념하였다.

 

1907년 황성신문 사장으로 추대되었지만 경술국치로 신문은 폐간되고 만다. 한편으로 선생은 대종교의 국내 책임자로 남도본사를 이끌며 해외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성 정부를 세우기 위한 13도 대표 국민대회에도 참여하였다.

 

1920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을 때 편집 고문에 추대되었다. 다음해 6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으며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용인 출신 대표적 독립운동가를 기려 이름을 붙인 ‘석농길’이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2010년 경 지번을 도로명 주소로 바꾸며 ‘금령로 00번길’로 바뀌어져 있다. ‘금령로’는 조선시대 역북동 역말에 있었던 ‘금령역’에서 따온 것으로 짐작된다.

 

그 지역 인물을 선양하고 자부심 진작 차원에서 인명을 지명이나 건물명에 붙이는 경우를 흔히 본다. 예를 들면 서울의 충무로는 일제 때 본정통을 대신하여 붙였다. 이곳에서 멀지않은 건천동이 이순신 장군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인명을 붙인 지명은 그 인물과 더불어 하나의 상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석농길이란 이름으로 유근 선생의 독립 운동을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묘소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준다. 선생은 일찍이 언론의 본분을 일깨우고 100년 전에는 앞장서서 독립국가 수립을 주창한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석농길’을 되살릴 수 없다면 김량장동 중앙공원이라도 ‘석농 유근공원’으로 명칭을 변경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