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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탐방


소멸되지 않은 역사를 품고있는 강화도
꽃보다 예쁜  강화에는 너무나 절절한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 강화는땀과 눈물로 억척스럽게 지켜낸 민초의 땅이다. 고인돌을 품고, 38년동안 임금을 지켜낸 강화는 섬 전체가 박물관이다. 고난과 영광이 공존하는 우리 역사의 집약체이다.

 

민족사의 고비마다 등장한 강화에 온 답사객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것을  기록할  없으리라. 눈에 익혀서 가슴에 담고 가는게 순리이다. 강화에는 많은 길이 존재한다. 화려하거나 사납지 않은 무던한 길을 묵묵하게 걷다 보면 시간은 앞으로만 가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살기 좋았을 부근리에는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이 자리잡고 있다. 역사교과서에 나오는, 세계문화 유산의 상징적인 53톤 덮개돌은 계급의 위력을 보여주는 청동기 시대 족장의 무덤이다.

 

12326, 고려의 무신 집권자 최우는 섬으로 들어왔고, 강화는 강도(江都)라 불렸다. 왕도, 귀족들도 건너왔던 염하(鹽河)를 세계 최강의 몽골군은 건너오지 못했다. 지금은 사라진 고려궁터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피란처로, 강화유수의 집무실로 사용됐다.

 

정조 6(1782)에 준공되어 왕실관계 기록을 보관했던 외규장각은 18669월에 1000여명의 프랑스 극동 함대에 의해 강화부의 건물과 함께 태워졌다. “겉으로 보기에 꽤 가난해 보이는 강화읍에는(···)조선 국왕이 간혹 거쳐하는 저택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340권을 수집하였는데, 기회가 닿는 대로 프랑스로 발송하겠습니다.”라고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의 기록이다. 이때 간신히 살아남은 외규장각 도서 297책이 지난 2011년 임대 형식으로 돌아왔다.

 

김포의 문수산성이 보이는 강화의 갑곶부터 걸어서 이동했다. 섬의 남쪽으로 이어진 길은 바다를 보며 걷도록 되어있다. 갑곶에는 정묘호란 이후 적의 상륙을 막기위해 심었다는 탱자나무가 있다. 갑곶은 1636년의 청나라 군대도,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들어온 일본의 구로다 전권대신도 상륙했던 곳이다.

 



돈대 아래에 세워져 있는 67기의 비석들은 사연도 다르고, 모양도 여러 가지였다. 강화에 내려왔던 유수, 군수, 판관의 선정비와 청나라와 싸우다 죽은 충신들의 사적비의 기록은 잡히지 않는다. ‘가축을 놓아기르는 자는 곤장 100,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는 금표비문은 살아있는 경고문처럼 선명하게 전달됐다.

 


광성보 용두돈대에서 바라본 바다는 강물처럼 소리났지만 쓸쓸하고 애처롭게 들렸다. 로저스가 이끄는 1200여명의 미 해병대는 18714월에 이곳으로 올라왔다. 어재연은 350 병사들과 함께 죽었고, 영원히 살아남았다. 손돌목 돈대에서 외쳐본다. ‘타국선은 어떠한 경우에도 통과할 수 없다.’(海門防守他國船愼易過)
 

바다를 향해 한 뼘 더 나아간, 영종도에서 올라와 처음 만나는 초지진에는 햇살이 바짝 내려 앉았다. 일본군함에서 발사된 포탄은 1875년 늦가을의 마른 햇살보다 더 강렬했다. “마실물을 구한다.”던 운요호의 일본군은 초지진을 불태웠다. 성벽과 소나무에 남아있는 과거의 포탄자국은 외면할 수 없는 현재의 역사이다
 

눈물의 역사와 맞닿아 있는 바닷길을 뒤로하고 전등사 숲길 속으로 나아갔다. 강화에서 만나는 가장 큰 절이다.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의 동문을 들어가면 병인양요의 승장 양헌수 장군의 비석이 아담하게 서있다. 포근한 흙길 사이로 제멋대로 자란 울창한 나무사이로 부는 바람은 청량했다.

 

웅장하지 않은 대웅보전은 다포식의 화려함을 살짝 숨겨놓고, 빛바랜 단청의 속살을 조금씩 보여준다. 창방뿌리에 연꽃을, 공포 위 보머리에 도깨비를, 네 귀퉁이 추녀밑에는 모습이 다양한 벌거벗은 네명의 여인들이 힘들게 앉아있다. 광해군 시절에 대웅보전을 중건하던 도편수와 사하촌 주막집 여인과의 이야기가 그 먼 소수림왕 시기에 아도화상의 창건설과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을 시주한 내용보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겁게 가라앉은 저녁 안개가 정족산성을 감싸기 시작했다. 서둘러 길을 재촉했다. 더 깊숙한 강화의 내륙에 있는 이규보를 만나러 가야했다. 풍수지리를 모르더라도 그가 잠들어 있는 묘소는 명당같았다. 주변으로 펼쳐진 잔솔들과 묘 입구에 수문장처럼 서 있는 소나무들은 수려하고 늠름했다. 명당이 주는 대범한 때문인지, 묘는 소박하고, 봉분은 야트막해서 정겨웠다. 망주석은 조촐했고, ·무인석은 겸허하고 소박했다.

 

휘청거리는 마음으로 역사의 시간속을 거닐었다.


 강화의 역사를 품고있는 흙길을 연모하며 느리게 걸어다녔다.

 

소멸되지 않은 역사가 공간으로 존재하는 강화는 아프지만 아름다운 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