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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에 가면. . .

걸음걸음 마다 신라가 말을 건다


명작들은 보고 또 보아도 그립다


걸음걸음 밟히는 경주에 가면 천년의 신라가 말을 건다.


 “절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탑은 기러기 떼처럼 솟아있다.”는 일연스님의  말씀은 확실하다. 경주는 발길닿는 곳마다 신라를 보여준다.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역사가 다시 천년을 이어져 거의 완연한 모습으로 숨쉬는 곳이 경주다.


 경주에 갈 때마다 가장 먼저 박물관에서 한나절을 보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박물관 뜨락에 있는 석조물들의 아우라에 빠져서 걸음을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라진 절을 옮겨온 것같은 고선사터의 3층석탑 앞에서 원효대사의 ‘무애가’를 읊조려야 화쟁(和諍)과 일심(一心)을 조금이라도 터득한 중생(衆生)이 되어 경주를 볼 혜안(慧眼)이 생길 것 같다.     근처의 월지(안압지)에는 빛도 사람도 가득찼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한가로운 풍류가 사라진 곳에는 달빛보다 강한 조명이 화려하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궁내(宮內)에 못을 팠다는 문무왕 14년(674)과 경덕왕 19년(760) 시기는 신라 국운의 전성기였다. 도성 한가운데 거대한 태자의 궁궐과 유흥지를 마련했다는 것은 왕실의 사치가 정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신라인의 손끝에서 알알이 여문 부처의 나라(불국토)인 불국사에는 수많은 중생들이 와서 인증샷을 날린다. 오르지 못하는 청운‧백운교와 범영루의 긴 석축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있는 학생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해탈에 이른 얼굴들처럼 자유롭게 흩어졌다. 흙을 주무르고 구슬린 듯 오묘한 다보탑과 뚝뚝 잘라낸 통돌을 비례적으로 줄여서 쌓은듯 날렵하고 단아한 석가탑은 경주의 일품이다.


 감포로 가는길은 환상의 코스다. 덕동호가 그림같이 펼쳐지고 그 사잇길로 가다보면 어느샌가 푸른 동해에 이른다. 신라의 호국신을 자처한 문무왕 김법민은 “내가 숨을 거둔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힘써 검소와 절약을 쫓으라.”고 유언했다. 그가 죽은후 산골(散骨)했을 감포 앞바다 대왕암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답사객을 품는다. 대종천을 타고온 바람은 감은사터에 빛나는 의연한 3층의 쌍탑위에 머문 듯 하다. 기운차고 튼튼하며, 질박하면서도 장중한 석탑은 안정적인 삼국통일의 위엄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삼국사기 속의 7세기는 “수급 500을 베었다. 수급 1000을  베었다.”의 연속이다. 수사적 문장이 사라진 단문은 발가벗은 죽음의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다.  철제 신무기가 난무하던 120년간의 싸움터에선  떨어져 나간 목의 숫자만이 기억될 뿐이다. 감은사는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누어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되었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은 평화롭게 살게 되었다.”고 선언한 문무왕의 마음을 이어받은 신문왕의 효심이 발현된 곳이다. 살아 남아야만 아름답다. 존재 해야만 장엄하다. 무너졌을지라도 기어코 살아남은 분황사 석탑은 2만평의 황룡사터의 빈자리는 담장으로 연결되고 담장으로 분열된다. 답사객은 황룡사의 남문을 열고 중문을 지나 80여미터의 거대한 목탑을 상상하며 걷는다. 백제의 아비지도, 자장대사도, 선덕여왕도, 몽골군도 잡히지 않는 빈터에는 초석과 심초석만이 뒹글(?)뿐이다. 경주엔 무덤이 참 많다. 무덤들은 삶속에 깊숙하게 들어와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며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무덤이 있다. 그 무덤앞을 지키는 우람한 사내는 두눈 부릅뜨고 내려다 본다. 어디서 와서 여기에 정착했을지 모를 서역인의 생생한 몸통 아래로 네 마리의 사자는 딴전을 피우며 답사객을 맞이한다. 십이지신상의 힘찬 조각과 독창적인 화려함으로 둘러진 호석과 수십개의 돌기둥으로 난간을 만든 괘릉(원성왕릉으로 추정)은 섬세했지만 호방했고, 고즈넉했지만 수려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울리지 않는 성덕대왕 신종앞에서 줄지어 사진찍던, 흰피는 커녕 붉은 핏자욱도 보이지 않는 이차돈 순교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경애왕의 비극이 서린 포석정에는 견훤의 후백제군은 커녕 그 많던 답사객도 보이질 않았다.


용장골 깊어 오가는 사람없네/보슬비에 신우대는 여울가에 움돋고/비낀 바람은 들매화 희롱하는데/작은 창가에 사슴 함께 잠들었네/의자에 먼지가 재처럼 깔렸는데/깬 줄 모르네 억새 처마 밑에서/들꽃은 떨어지고 또 피는데 김시습이 머물렀던 금오산(남산)에 눈내리면, 진달래꽃 만발하면, 다시 찾아와 잰 걸음으로 오르기전에 <용장사>를 외워야겠다.


시간을 거스르고 과거로 달려야만 볼 수 있는 경주에서 외쳤다.


"아, 서라벌이여, 계림이여, 금성이여, 동경이여, 천년의 신라여..."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소장, 적폐역사 개념역사 저자)


감은사터 3층석탑은 빼어난 풍광을 배경으로 위풍당당하게 서있다.

괘릉앞을 지키는 서역인 닮은 무인석


그랭이 기법으로 쌓아올린 불국사의 석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