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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 역사기행


오룡의 역사기행-발해를 가다.


-해동성국 발해는 여전히 거대한 청춘의 꿈이다 -
발해의 옛땅에서 삶과 죽음은 여전히 동행(同行)하고 있다.


 답사는 느끼는 것에 우선하여, 순서없음을 매력으로, 게으름의 타성을 즐기는 것이다. 가끔은, 모르는 길이 매혹적이다.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걸을 때 느끼는 짜릿함은, 정해지지 않은 길에서 무언가를 찾았을 때의 기쁨에 이르지 못함을 여러번 체험했기 때문이다. 어제는 영고(迎鼓)에 취한 부여인이었고, 오늘은 해동성국 발해의 영토에서 살기위해 북만주로 이동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위태롭다. 7세기 말에 일어난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은 무너진 질서의 회복이 아니라 변화를 위한 담대한 선택이었다. 대조영은 고구려가 아닌 발해를 통해 더 위대한 역사를 선택한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의 분노가 중원을 넘어 동북으로 몰아쳤지만 그녀가 보낸 이해고의 군대는 천문령에서 완벽하게 전멸했고 소리없이 흩어졌다. 698년, 대조영은 이곳 동모산(지린성 돈화시 성산자산)에서 건국을 선언했다.


 동모산 가까운 육정산에는 발해 왕족과 귀족들의 석실 및 석곽무덤 80여개가 모여있다. 1949년에 발견된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묘는 봉토석실분의 고구려 양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늦가을 달빛 밝은날에 무덤앞에 주저앉은 답사객은 1천 3백여년전의 37살을 살고있는 공주를 알현했다. 용정에 있는 서고성(발해 중경현덕부) 근처의 정효공주(문왕의 4녀)묘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그런대로 달랬다.


 훈춘으로 가는길은 권력화되지 않은 풍경의 연속이다. 그 끝점에는 발해가 건설한 팔련성(동경 용원부)이 있다, 신라로도 떠날 수 있고(新羅道), 일본으로도 갈 수 있었던(日本道) 훈춘의 땅은 넓고 기름졌다.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은 언제나 북적 였을것이다.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겐 끝나는 길이었으나 갈 수 있는 사람들에겐 또다른 길의 시작점이었을 동경은 어쩌다 가끔 찾아오는 먼 후손들의 무거운 발걸음만이 종종 거릴뿐이다.
 무참한 역사는 세월을 잠재웠으며, 소리없는 시간은 역사를 소각시켜 흙으로 품어버렸다. 무너진 팔련성 궁성터에 무성한 옥수수는 하늘높은 줄 모르게 자랐고, 조각난 기와들과 깨진 그릇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발해는 해동성국이었다. 잘나갔던 문왕은 도읍을 옮겼다. 그곳은 바람도, 흙도 부드러운 상경용천부(현재의 흑룡강성 영안시)였다. 홀한성(忽汗城)으로 불렸던 상경의 외성은 돌로 판축을 하고 그 위는 흙으로 쌓았다. 둘레가 16km가 넘는 외성의 안쪽으로 4.5km의 내성과 2km의 궁성을 건설했다. 제2궁전은 전면19칸, 측면4칸(동서 96미터,남북 28미터)으로 당시에는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 이었으리라. 웅장한 황궁이 사라진 상경성의 빈터에, 말라 비틀어진 수수들의 바스락거림이 망국의 울음처럼 낮고도 저리게 스며들었다. 사방으로 탁트인 평지성의 장엄함은 아름다웠으나 강력한 진지(陣地)의 역할은 될 수 없었다.


 발해 멸망에 대한 요사(遼史)의 기록은 짤막하다. ‘926년 정월에 1만기의 선봉군이 발해 노상(老相)의 병력을 깨뜨렸다. 대인선이 흰 옷을 입은채 새끼줄로 몸을 묶고 흰 양을 끌며 관리300여명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대인선은 묘호를 받지못했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영토를 ‘사방 5,000여 리’라고 기록했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영토를 ‘동서3,100리’, 남북 2,000리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영토를 ‘동서 1,000리, 남북 2,000리’로 기록했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큰 나라였다.


 그 큰나라가 단지 열흘만에 망했다는게 허망하다. 그렇다한들 ‘백두산 분화’로 인해 발해가 멸망했다는 주장은 망극하다.


 역사가 시간속에 조용히 허물어지고 있는 발해의 옛땅에서 삶과 죽음은 아직 동행하고 있다. 오랜 삶들이 켜켜이 묻혀있는 땅과의 만남은 ‘끌림’에서 머문 것이 아닌 ‘이어짐’으로 뭉클거렸다. 아직도 발해를 꿈꾸는가. 발해는 꿈이 아닌 현실이고, 현재이며 미래이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소장, 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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