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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훔치다, 요동과 만주를 다녀오다


-역사를 훔치다, 요동과 만주를 다녀오다-

고구려의 성벽은 견고해서 무서웠고담백해서 외로웠다. ’

 


고구려를 보기 위해 요하를 건넜다. 천리장성 아래로 펼쳐진 발해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비사성 벽을 타고 황해로 넘어갔다
 

645 ᆞ당전쟁에서 당태종 이세민은 말했다. “건안성을 얻으면 안시성은  손아귀에  것이나 다름없다.” 1400년을 견뎌온 건안성의 외벽은 굳건했고 성안은 여전히 아늑하고 평온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성벽의 백암성에서 한걸음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잤다.  수양제의 백만대군을 조롱한 강이식 대장군과 만여명의 요동성 수비대는 살아서 아름다웠다. 찾을  없는 성터 앞의 해자는 깊게 흘렀다.
 

시조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해 비류곡에 도착했다추모왕은 거기서 홀본 서쪽  위에 올라 성을 쌓고 도읍을 정했다.” 밀물처럼 달려오는 오녀산성의 능선  깊숙히 파고 들었다턱밑으로 찾아  가뿐 숨소리보다  빠르게 2천년전의 주몽이 살아서 달려오는 듯한 산성은 경이롭도록 완벽하게 남아있다.
 

시간속에 풍화되지 않은바람에도 날려가지 않은 아득한 성위에서 외쳐본다. “나는하느님의  손자이며물의  하백의 외손자다.” 저멀리 비류수와 혼강은 말이없다물고기와 자라도 없어보이는  환인호에서 바람이 포개져 메아리로 솟을뿐이다.
 

통구분지의 의산임수 형세에 자리잡은  국내성과 환도산성은 짝을 이룬 고구려 도성 체계의 전형이다.
 

돼지가 일러준 곳으로 도읍을 옮긴 게 서기3 유리왕 시대였다평양천도한 427장수왕 시기까지 400년간의 국내성은 거대한 완성을 향해 성장하던  고구려의 지향성을 보여준다.
장엄한 끌림이다. 웅장하고 강고한 것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이기에 마땅히 강렬했다찬란하지만 엄숙한  광개토대왕 비석은 세상에 홀로 초연히 빛나는 아우라를 뿜었다.‘태왕릉은  뫼처럼 안정되고 산처럼 굳건했다.’ 7층으로  이루어진 기단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호령했던 고구려 태왕들을 흉내내는 어줍잖음은 도리가 아닌데도 어깨가 들썩거렸다.
 

정교한 돌들을 들여쌓은 장군총 앞에 동방의 피라미드 수식어는  당연하므로 겸손한 표현이다.  한치의 흐트러짐 없는 기단은 ‘살아 있는  기어이 살아서 15백여년을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유의 유역을 넘어  부자유의 영역을 경계로 1800리를  흘러 황해로 나아가는 강물은모순이며  비애다. “흘러가는 것은 저러하구나 공자와  ‘압록강은 흐른다 이미륵은  생성의 위화도와 소멸의 철교를 만들었다. 길은 여기에서 멈추어진 채 나아가지 못하고 느려터진 답사객의 발길을 다시 광활한 만주 벌판으로 돌려 세웠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소는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진 분단의 끝점이다.


고구려의 길은 느리고도 질겼다. 고구려의 성은 점점이 박혀 빠지지 않고 살아 남은 굳센 성이었다.  길과 성들은 굽이굽이 돌고돌아 요동과 만주를  그물처럼 엮었다.
 

고구려의 옛땅은 광활한 만큼 장엄했고넉넉한 만큼 고즈넉했다. 무너진 700년의 시간은 멈추었으나 사라지지 않았다폐허로 남았으나 거룩했으며아무도 없었으나 누구인지   있었다.
 

길은 여전히 사람을 향해 있다.  길위에서 나와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멈출  없는 역사의 길위에서 나와 우리가 굳세게  딛고  있다.
 

새로운 역사는, 새로운 길은 거듭,  고구려의  위에서 쓰여질 것이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소장, 평생학습교육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