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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112) 마지막회

“반성없는 역사에 미래는 없다. 특권을 지키려다 나라가 망했다”

오룡의 역사 타파(112)

 

반성없는 역사에 미래는 없다. 특권을 지키려다 나라가 망했다

 

능력있는 인재들이 신라를 떠났다. 골품제도는 진골이 아닌 신라의 젊은이들을 좌절 시켰다. “우리 신라는 사람을 쓰는데 먼저 골품을 따지므로 정말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도를 넘지 못한다.”며 설계두가 당으로 떠난 7세기의 신라는 진골의 나라였다.

9세기 헌강왕 시기 귀족들은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에서 놀았다.’고 할 만큼 풍요로웠다. 왕이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의 민가가 줄지어 늘어섰고, 가악(歌樂)소리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왕이 시중에게 지금 민간에서는 집을 기와로 덮고, 밥을 숯으로 짓는다는 말이 사실인가물으니 시중 민공이 역시 일찍이 그렇게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토황소격문>으로 당나라에서 문장력을 인정받은 최치원이 귀국한 시기가 헌강왕 때였다. 선진적인 정치철학을 신라의 개혁을 위해 활용하려던 6두품 출신 최치원은 열정적으로 일했다.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린 최치원은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는 기존 진골귀족들의 특권을 축소하는 대대적인 개혁안의 첫출발이었다. 진골들은 시무책을 거부했고, 최치원은 정계를 떠났다.

신라의 마지막 탈출구는 지배층의 자기반성과 철저한 개혁실천이 필요했다. 수백 년 골품제의 특권에 젖어있던 진골들은 강력히 저항했고, 사회의 모순은 결국 폭발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사방에서 봉기했다.

삼국 중에서 가장 열악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비주류였던 김춘추와 가야계였던 김유신이 신분보다는 능력을 우선하는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통일 후에 폐지했어야 했던 골품제는 진골의 특권을 강화하는 폐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잠복해있던 불만은 터지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분출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9세기 후반의 신라처럼 위기 상황이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청맹과니만이 위기상황을 모를 뿐이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 것 같다. 무능과 황음으로 나라를 망하게 한 의자왕에 대한 비판은, 존재하지도 않은 삼천궁녀의 이야기로 남아 있다. 망국에 대한 모든 책임은 여전히 의자왕, 그에게 있다.

* * *

정의가 승리 하는지, 승리한 것이 정의인지를 판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불의도 일단 승리하고 나면 정의가 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거나왜곡하거나삭제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성공해서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고, 어쩌다가 역사앞에 까발려져서 반역이 되고 쿠데타가 되기도 하지만 그 또한 영원하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정의니, 불의니 하는 것들도 시대의 산물이어서 그때 그때 마다 평가가 달라진다. 그동안 오룡이 연재한 <역사타파>의 가치는 역사의 이면(裏面)을 알아보는데 있었다. 이면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흔들림 없는 판단의 기준이 나올수 있다. 부족한 필력을 가지고 좌충우돌 달려 온 5년간의 <역사타파>는 이면의 방향만을 대략 보여주는데 만족했다. 정의(正義)와 불의(不義) 사이에서 정확한 방향을 잡는 것은 정의를 찾는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그동안 오룡의 <역사타파>와 함께 동행해 준 독자들에게 무한의 감사를 드린다. 언제가 다시 나설 그날에, 오늘은 아름다운 역사로 남아있으리라.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