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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의 영화이야기

<영화 이야기-4> 여왕 마고(La Reine Margot)

[용인신문]

<영화 이야기-4> 여왕 마고(La Reine Margot)

여왕 마고는 나바로 왕 앙리 4세와 정략결혼하였던 프랑스의 왕비다. 마고 퀸 마그리타는 국왕 샤를 9세의 여동생이다. 마고는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개신교 국가인 나바로의 왕 ‘앙리 드 부르봉’과의 정략결혼으로 프랑스를 통일하려는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발루아 왕조의 12번째 국왕 샤를 9세의 치하였다. 샤를 9세는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친형 앙리 2세가 사망하고 그의 장남인 프랑수아 2세가 급서하자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샤를 9세는 어린 나이로 인해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섭정을 맡겼다. 카트린 왕비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이었지만 본가가 몰락하여 교황 클레멘스 7세의 후견을 받아 프랑수아 2세의 차남인 앙리와 결혼했다.

 

차남으로 왕위와 거리가 멀었던 앙리는 황태자 프랑수아가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했다. 앙리 2세와 결혼한 카트린 왕비는 여왕(왕비)이 되었으나 결혼 초 10년간 후사가 없어 지위가 불안했다. 폐위될 위기에 처했던 카트린은 1544년 프랑수아 2세를 낳아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후 카트린은 샤를 9세 앙리 3세를 연달아 낳았고 마고로 유명한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발랑송 공 등 10명의 자식을 낳았다.

 

섭정 카트린은 궁중의 실세 중의 실세였다. 12년간 왕비로 있었고 이후 30년간 대비로 군림하며 2명의 아들을 왕위에 앉혔다. 당시로서는 70세 직전까지 69년 9개월을 살아 장수했다. 정치적으로는 카트린의 시대였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마고다. 그래서 마고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고는 1553년생으로 샤를 9세와 3살 터울, 앙리 3세와는 2살 터울의 연년생으로 태어났다. 밑으로 ‘에르퀼 프랑수아’가 태어났다.

 

마고는 영화에서 그려진 대로 두 오빠와 남동생을 비롯한 기즈 가문의 앙리 공작 등 궁중의 근친들에게 성적 노리개가 되어 문란한 생활을 해왔고 프랑스의 창녀로 불리울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았다. 마고는 정부(情夫)이자 오빠인 샤를 9세의 강권으로 나바로의 왕 ‘앙리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면 마고는 그야말로 형제와 4촌들의 배설구 역할만 하는 주체성 없는 여인으로 나온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마고의 존재는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을 만큼 저속하고 문란한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고를 창녀라고 욕할 수 없는 것은 그녀야말로 당시 프랑스 귀족 특히 왕족사회의 문란했던 성 풍습의 희생물이라는 것 때문이다. 당시의 유럽사회는 근친상간(近親相姦)이 공공연했다.

 

16세기 유럽은 남매간의 성관계는 필수코스이고 모자간 부녀간 성관계도 흔했던 시절이었다. 로마 교황 보르지아를 보면 자신의 딸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볼 수 있다. 개신교가 가톨릭의 부패상에 대한 반동(反動)으로 종교전쟁의 중요한 동력으로 부상하는 당시의 풍토를 보면 성적인 면에서 그야말로 종말에 가까운 풍속이 만연했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가 여왕 마고 역을 맡은 것이 (그나마 영화적으로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도록 배려한 것이) 영화의 충격을 다소 완화시켰다. 하지만 당시 실제 벌어졌던 궁중의 문란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결혼식 날 밤 애인이자 4촌인 기즈와 첫날밤을 보내려던 마고는 기즈가 오지 앉자 검은 눈가리개를 하고 직접 ‘길거리 헌팅’에 나선다. 타겟은 나바로 왕, ‘앙리케 부르봉’의 신행(新行)길을 수행하여 파리에 온 ‘라 몰로’라는 개신교 청년 장교, 둘은 눈길을 주고받기가 무섭게 엉겨 붙는다. 즉석에서 선 채로 격렬한 성관계를 마친 두 사람은 헤어진다. 청년은 자스민 향기로 여자를 기억한다. 결혼식 날 밤 일면식도 없던 남자와 살을 섞은 마고는 루브르 궁으로 돌아온다.

 

카트린 대비는 결혼식 날 밤에 신교도를 급습, 체포하여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는 음모를 진행하고 신교도 학살은 허수아비 왕 샤를 9세에 의해 내려진 문서에 의해 왕명으로 벌어진다. 물론 국왕은 자신이 서명한 문서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한밤중에 벌어진 가톨릭교도의 신교도 학살은 무려 6천여 명에 이르렀다. 나바로 왕 앙리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고와 타협한다. 다른 남자(4촌 기즈)를 사랑하는 마고는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받아들인다. 앙리케는 마고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샤를 9세의 호감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샤를 9세는 마고가 앙리케를 따라 나바로에 가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절한다.

 

샤를 9세는 오로지 마고를 정부로 더 오랫동안 잡아두기 위해서 앙리케를 보호한다. 카트린 대비에게 무속 점성술사는 불길한 예언을 한다. 앙리케가 살아 있으면 카트린 대비의 세 아들이 죽고 앙리케가 프랑스 왕위를 잇는다는 기분 나쁜 예언이다. 불길한 예언에 매몰된 카트린 대비는 앙리케를 암살할 기회를 집요하게 노린다.

당시 프랑스의 신구 교도 간의 종교전쟁은 결국 교회의 재산을 두고 벌어지는 전쟁이었다. 영국왕 헨리 8세가 가톨릭을 버리고 영국성공회(국교회)를 세운 것은 표면상 앤 왕비와 결혼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영국 세금의 40%를 가톨릭이 징수하는 것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재산이 얽혀있는 종교분쟁에서 상공업 종사자들이 주요 신도인 개신교의 교세는 점점 커졌다. 본질적으로는 봉건제와 자본주의의 충돌이 종교전쟁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영화와는 다르게 실제 역사에서 마고는 샤를 9세가 죽고 앙리 3세가 즉위하자 동생이자 왕위계승자인 알랑상 공 ‘에르퀼 프랑수아’를 지지하였다. 알랑송은 개신교와 온건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업고 반란군의 지도자가 되었다. 마고가 친동생인 알랑송과도 육체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아 밝혀지지 않았다.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마고는 동생이 반란군의 수장이 되자 그들과 협상 창구가 필요했던 앙리 3세와 카트린 대비는 마고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해주었다.

 

앙리 3세는 알랑송을 회유하기 위해 자신이 갖고 있던 앙주공의 지위와 영지를 양도했다. 영화에서는 비중있는 역할로 나오는 라 몰로는 앙리케 3세의 탈출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지고 마고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겼다. 마고와 결혼한 앙리케 3세도 자유로운 연애를 하였는데 이는 두 부부가 합의한 사항이었다. 두 사람은 적통의 후계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다시 합쳐 3~4년간 동거하였으나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후 마고가 나바로의 왕비, 프랑스의 왕녀 신분과 생활비 일체를 보장받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사실상 이혼에 합의하고 별거를 공식화했다.

 

마고는 알랑송을 돕는 것이 발각되어 앙리 3세로부터 파리에서 추방되었고 앙리케와 재결합을 원했으나 이것마저도 거부되었다. 마고에게 끝까지 충실했던 알랑송은 1584년 사망했다. 알랑송의 사망으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자는 앙리케 3세가 되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앙리 3세와 앙리케 3세 양쪽에서 용도 폐기된 마고는 1585년 3월19일 아키텐 지방의 아쟁으로 물러나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마고의 은둔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마고는 그녀에 반기를 든 아쟁 시민의 반란으로 상트랄로 쫓겨났고 1586년 앙리 3세의 포로가 되어 ‘오베르뉴 위송’에 감금되었다. 1588년 마고는 연인이자 후원자였던 기즈 공 앙리가 오빠 앙리 3세에게 암살되자 완전히 권력을 잃고 말았다.

 

1589년 건장했던 앙리 3세가 ‘자크 클래맹’에게 암살되자 프랑스의 왕위는 나바로의 앙리케 3세에게 돌아갔다. 이로써 앙리케 3세가 앙리 4세로 즉위하여 프랑스와 나바로는 통일되었다. 앙리 4세는 즉위 후 1593년 가톨릭으로 자진하여 개종하여 1594년 3월 22일 파리에 입성하였고 1598년 개신교에 대한 차별을 해소한 낭트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 종교전쟁은 막을 내렸다.

앙리 4세는 마고에게 정식으로 카톨릭 교회법에 의한 이혼을 요구하였고 1599년 그들의 결혼은 무효화 되었다. 앙리 3세를 끝으로 발루아 왕조는 13대로 막을 내리고 ‘앙리케’에 의해 부르봉 왕조가 시작된다. 부르봉 정통 왕가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으로 단절되었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몰락으로 부활하여 1830년 막을 내렸다.

방계 왕조인 스페인 왕가는 후안 카를로스 1세(1975~2014)의 아들인 펠리페 6세에 의해 입헌군주제로 이어지고 있다.

 

마고, ‘마고그리트 드 발루아’는 1615년 5월 27일 사망하였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비롯한 인문학에 능통했던 그녀는 참회록(懺悔錄)을 남겨 사후 더욱 유명해졌다. 참회록의 주요 내용은 샤를 9세와 앙주 공, 즉 앙리 3세와의 근친상간(近親相姦)을 밝히고 참회하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앙리 4세와의 사이에서 소생이 있었다면 루이 13세를 비롯한 부르봉 왕조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그녀는 여인의 최대 무기인 미모와 육체를 무기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러면서도 권력자들에게 이용만 당하는 불쌍한 일생을 살았다.

 

영화에서 당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자벨 아자니가 마고 역할을 맡아 실존했던 마고그리트가 실제 이자벨 아자니와 같은 미모를 지닌 여인으로 착각할 수 있다. 당시의 초상화를 보면 마고는 이자벨 아자니와 같은 미인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라틴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하고 지식이 풍부한 인텔리 여성이었다. 그녀가 남긴 참회록은 당시의 궁중문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1994년 발표된 여왕 마고는 웬만한 것에는 놀라지 않는 필자에게도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당시 유럽 상류사회의 성 풍속도가 그렇게 하드코어 한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여왕 마고를 계기로 영국과 유럽 귀족사회의 성 풍속도를 나름대로 연구한 결과 종교적 절제는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여성은 그냥 전리품이고 노리개였다. 재산을 늘려줄 대상이었다. 마고의 참회록은 빙산의 일각이었을 뿐 16세기 유럽은 여전히 중세시대와 같은 야만의 시대였다. 후일 이들에게 동양이 지배를 받아야 했다는 사실이 기분 나쁠 뿐이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