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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역사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상>

<편집자 주>
용인에는 다수의 성터와 절터 도자기터가 산재해 있다. 그러나 그간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이들 문화유적에 대한 정리가 이뤄졌을 뿐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접근이 전무했다.
용인시는 지난해 년말부터 올 봄까지 용인의 중요 성터, 절터, 도자기터에 대한 구체적인 지표조사를 실시해 학술적 접근이 최초로 이뤄지고 있다. 현재 용인의 성터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가 나왔고 연이어 요지와 사지에 대한 결과물이 나올 예정이다. 향토사학자나 문화유적에 관심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용인에 이같은 중요한 역사 유적들이 산재해 있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용인연합신문사는 시민에게 우리 고장의 문화 유적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일환으로 3권의 보고서를 발행 순서대로 요약 소개한다.

<1>용인의 옛성터(처인성, 할미산성, 보개산성)-조사는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맡았으며 용인시와 문화원 향토문화연구모임 시사편찬위원회가 협조했다.

#처인성

남사면 아곡리 산43번지 일대에 소재한 처인성터. 고려 고종때인 1232년 12월 16일 몽고족의 침입을 물리친 곳으로 77년 경기도 지방기념물 44호로 지정됐다.
처인성은 수주, 즉 지금의 수원 소횬?처인부곡의 치소가 있던 소규모 성으로 읍성류에 속하며 창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주변 백성들은 이 작은 읍성으로 피난해 몽고장군 살리타이를 사살했으며 지도자 김윤후는 신분을 초월해 백성을 단결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인성은 아곡 2리의 마을 입구 구릉상에 남아있다. 처인성은 북쪽이 성들이라 불리는 전답지대고 안쪽이 아곡동 마을이다. 아곡동 마을의 북서쪽은 해발 306미터의 함봉산에서 해발 171.4미터에 이르는 화성산에 이르는 산줄기고 거기서 낮아진 구릉 가운데 하나가 처인성이 위치한 곳이다. 또 그 북쪽의 것이 살리타이를 사살한 사장터라 불리는 구릉으로 이 두 구릉 사이의 거리는 직선으로 200미터쯤 된다.
둘레가 360미터고 해발 70미터 남짓한 구릉의 선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과의 상대고도가 15~20미터에 불과한 낮은 구릉이다. 성벽은 구릉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서남벽에서 북동쪽으로 낮아지는 완만한 경사면을 이용해 토루가 마련됐으며 전체적인 평면이 사다리꼴에 가깝다. 이 성은 79년 남서쪽 성벽 120미터를 복원하고 80년 동남북 방면의 성벽 205미터를 수축했다. 성곽 복원공사의 자문은 고 이선근 박사가 했는데 그가 이 성?백제때 축성된 것이라고 확인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인성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물로 그릇류는 주로 신라부터 고려시대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기와류는 통일신라 등 고려 이전의 것이 주류다.

#할미성

할미산성은 구성면 동백리와 포곡면 마성리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49.3미터의 백현이라 불리는 산위에 있다. 할미성은 북쪽에서 광주 남한산의 산줄기가 봉우리와 고개를 번갈아 이루며 남하해 석성산으로 높아지는 마지막 봉우리에 있다. 용인지역의 고대 문화의 보고로 여겨지는 할미성은 현재 석축의 성벽이 대부분 붕괴된 상태다. 할미성이 위치한 산은 가파른 경사면이 있으나 아주 험준한 산은 아니다. 할미성은 산의 정상과 그 남쪽 사면 일부를 에워싼 사모형에 가까운 테뫼식 석축산성. 석축은 내외 겹축의 기법을 채택했으나 경사면이 이중으로 되거나 현저히 내외 고저차가 있는 곳에서는 일부 내탁의 방법을 취한 곳도 있다. 할미성에는 성안에 건물터로 여겨지는 평탄면도 있고 성밖으로는 외환도가 돌아가고 있으나 성벽에 덧붙여진 치성이나 곡성의 시설은 없고 성벽을 보완한 시설도 발견되지 않았다.
성벽은 주변에 많은 화강암류를 사용해 대체로 직장방형으로 다듬어 사용했고 축조에서 특이한 방법은 없다. 할미성은 성내가 크게 두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실제로 내외로 구분된 성곽으로 존재한 것인지 당초 내성 부분이 있다가 후일 석축과정에서 확대돼 축조됐는지 판단은 어렵다.
한편 이 성에서 수습된 토기는 이웃한 보개산성(석성산성)의 것보다 오래된 것들로 할미성은 보개산성보다 전에 사용됐던 산성으로 볼 수 있다. 할미성에서 수습된 유물은 대체로 삼국시대에서 통일 신라에 걸친 유물들로 할미성의 경영은 삼국시대 이래의 것이라고 잠정적인 결정을 해도 무리가 없다. 이 성은 앞으로 문화재로 지정해 보존하는 것은 물론 시민이 쉽게 답사할 수 있는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개산성

보개산성(석성산성)이 위치한 보개산(석성산)은 해발 471.5미터로 구성면과 포곡면 및 기흥읍에 걸쳐있다. 할미성이 석성산의 북쪽 능선에서 빤히 내려다 보인다. 성석산은 주변 평야지대를 건너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다. 이 때문에 일찍이 산위에 봉수대가 설치돼 있었다. 보개산 봉수는 동남쪽의 죽산 건지산에서 받은 신호를 북쪽의 광주 천천현 봉수로 이어주는 곳이었다. 이런 통신상의 요충은 이 산이 한강 유역에서 차령산맥을 잇는 최단거리에 있는 산으로서 매우 요충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석성산은 거대한 암반이 많고 산세가 가파르다. 보개산은 광주 남한산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의 남단에 우뚝 솟은 것으로 흔히 성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성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암반과 할석을 이용해 축조됐다. 이점에서 가공해 축조한 할미성과 축조 방법이 다르다. 이런 특징은 현존하는 보개성은 할미성이 고대적 축성법에 가까운데 반해 고려시대에 흔히 나타나는 축조법을 따른 것을 보여준다. 다만 정상부로 향해 분포하는 유물을 통해 중앙의 가장 높은 위치를 에워싼 천연의 석벽을 이용한 별도의 초기 성벽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점칠 수 있다. 보개산성의 축조 유형과 유물로 미뤄 보개산성이 대개 신라말에서 고려초기까지 소급된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정상부를 이용한 성의 존재 여부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산성은 용인에서 최대규모로 성내에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 인근 주민들이 유사시에 입보할 수 있는 산성으로 사용됐다.
한편 현재 보개산 봉수의 터전은 보개산성의 북쪽 끝에서 남쪽으로 뻗은 높은 산능선상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음이 확인됐다. 당초 봉수대터는 군용 통신시설의 건설과정에서 파괴됐을 것으로 염려됐으나 통신 시설은 봉수대보다 남쪽에 건설됐다. 봉수터는 남쪽으로 거대한 암반 노두로 되고 북으로 작은 안부를 이룬 사이에 타원형에 가까운 석축의 흔적이 있으며 그 북동쪽으로 건물터의 기단처럼 일부의 석축 흔적이 있다. 특히 남쪽의 암반노두는 사방을 전망하기에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