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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용인(龍仁)의 역사와 전통

강창희 경기도교육위원



용인(龍仁)이라는 말의 어원(語源)부터 살펴보면, 태조(太祖)6년(1397)에 행정구역 개편 당시 수원부(水原府)의 처인부곡(處仁部曲)을 처인현(處仁縣)으로 고쳤고, 조선 태종(太宗)13년(1413)에 드디어 용구현(龍駒縣)과 처인현의 두 고을을 합칭한 이름으로 용구현의 ‘龍’과 처인현의 ‘仁‘ 두 자를 합쳐 용인현(龍仁縣)이라 불렸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용인의 지역적 특성으로써 ‘왕도와 접근돼 있기에 빈객이 많이 모여 든다’했고, 조위(曺偉)의 시에 ‘용인은 본래 적현(赤縣)이라 모여드는 곳 / 관개(冠盖)가 벌집같이 총총하구나’하는 대목이 있다. 적현이란 중국에 있어 왕도의 직할 군현(郡縣)을 의미한다. 곧 과객고을이지, 투기고을은 아니었다.

본래 고구려 땅이었던 이 지역에는 두 개의 성(城)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구성(駒城)이요, 다른 하나는 처인성(處仁城)이다. 그후 고려초에 용구현(龍駒縣)으로 ‘용’자를 덧붙였는데, 망아지(駒)보다 빼어난 준마(龍駒)가 좋고, 또 장래가 촉망되는 영재(英才)를 용구봉추(龍駒鳳雛)라고 한 데서 미명화한 것인지 모르겠다. 조선조 태종때 용구(龍駒)의 용과 처인(處仁)의 인을 합쳐 용인(龍仁)이란 지명이 탄생된 것이다.

공직자 재산 공개로 드러난 부동산 투기지역으로 서울 인근의 용인(龍仁)이 부각되고 있다. 용인은 투기지역으로써가 아니라 자랑스런 역사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만약 외적의 장수가 이 용인의 두 성(城)을 잇는 전선을 넘어 남하를 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터부(禁忌)가 있어내린, 그래서 호국정신이 절절이 스며있는 땅이라는 점이다. 고려 고종19년(1232) 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온 몽고군 원수(元帥) 살알(살례탑(撒禮塔) : sartai)은 처인성 남쪽으로 더 쳐들어 갔다가 살아 돌아온 외국 장수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풍문을 듣는다. 이를 묵살하고 처인성을 넘어서는 순간, 누가 쐈는지 모르는 비시(飛矢)에 맞아 즉사하고 말았다. 병자호란 때도 호군이 용인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호국인의 보우로 합리화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보기드문 호국신명인이 처인신(處仁神)을 탄생시킨 용인이기도 하다.

또 용인은 벼슬에 연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숨어 사는 것도 아니며 서울 나들이 하면서도 그곳에 득실거리는 권부(權富)의 때가 묻지 않고, 또 누항(陋巷)에 묻혀 산다하여 비열하지 않으며 지나가는 행객에게 후하게 인심이나 베푸는, 그러고서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런 이미지의 고을이요,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용인처사(龍仁處士)라 했다. 고려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용인에 사는 과거동창생 이석지(李釋之)의 생활철학이 바로 그 용인처사의 전형인 것이다. ‘선생은 숨어사는 것도 아니며 밭도 갈고 관혼상제에 쓰임도 족하니 세리(世利)에 무심하지만 숨어산다고 자처하지 않는다. 서울에 나들이 할때면 파리한 아이종과 여윈 말을 채찍질하며 시를 읊조리는데, 흰수염은 눈발처럼 날리고 붉은 볼에는 광채가 넘친다.’ 이석지의 두 아들도 세리(世利)를 등지고 덕을 쌓고 살아 용인처사의 인맥을 잇고 있다.

이렇게 용인의 역사와 전통을 따지고 보면 용인(龍仁)이 투기고을로 세상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이고 신문지상의 투기광고를 보면 용인사람으로서 억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