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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

‘김량장 할아버지’ 김인호 선생의 생애·예술세계 조명

학술발표회’ 용인문화예술원서 열려
이병옥 용인대 명예교수 기조 발제
소중한 지역 문화자산 콘텐츠화 필요

 

[용인신문] ‘김량장 할아버지’로 불리는 용인 백암 출신의 재인 김인호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학술발표회가 용인시 주최로 29일 용인문화예술원 마루홀에서 있었다.

 

임미례 (사)한국전통춤협회 용인시지부장 사회로 진행된 이날 학술발표회에서 기조발제는 이병옥 용인대학교 명예교수가 ‘용인 태생 김인호의 생애와 예술세계-스승 이날치의 예술생애와 관련하여’를, 주제발표 ‘일제강점기 구극 배우 김인호의 활동’은 김영희 전통춤 이론가가, ‘오래된 재인춤의 미학-김인호, 이동안, 박정임의 계보를 중심으로’는 김기화 한국체육대학교 연구교수가 각각 발표했다. 지정토론은 조춘영 성균관대학교 한국철학문화연구소 선임연구원과 이보름 성균관대학교 겸임교수역임이 했다.

 

이병옥 교수는 “줄타기의 명수라고 전해지는 이날치(1820~1892)와 제자 김인호(1858년 경 출생 추정)는 남사당패의 근거지 안성지방에서 만나 사제지간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특히 조선시대 백암은 안성군(죽산)에 속해 있어 남사당패와 유랑광대들의 연희 활동 지역이었으며 백암은 안성과 밀접한 문화권으로 이날치와 김인호의 상면이 가능했다”고 발표했다.

 

이 교수는 “이날치는 쉰 목소리와 같이 컬컬한 소리인 수리성으로 성량이 매우 컸으며 울리고 웃기는 형용 동작으로 사람들을 매혹시켰는데 코믹한 김인호의 재담소리와 유사성이 높다. 그 외 줄타기, 판소리, 재담소리 등을 사사받았다”며 “이날치가 전국적인 줄타기 명인이었던데 비해 김인호는 수원, 용인, 안성 등 화성재인청 문화권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1900년대 초 화성재인청 출신들이 서울 중앙무대를 주도하게 돼 협률사, 광무대 등 근대극장 겸 연희장의 주도권을 가졌고, 협률사를 통해 지방공연까지 장악하게 되면서 김인호의 비중이 높아졌다”고 했다.

 

이 교수는 “김인호 별명이 김량장 할아버지와 복돌이 두 개다. 김량장이라는 이름은 금학천변 전통시장인 용인 5일장, 김량장에서 따온 것으로 김인호가 김량장에서 노후까지 주름잡던 명인이었기에 김량장 할아버지라는 명칭이 붙게 됐다”고 했다. 또 “복돌이는 복(福)에 돈(錢)을 합친 글자”라며 “김인호 제자 이동안이 증언에 따르면 1920~1930년대 나이 2, 30대에 광무대에서 줄타기를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 위에서 식사를 할 정도로 온종일 줄을 타면 줄 막대에 걸어둔 푸대자루 속에 돈이 가득찼다. 스승 김인호도 20대 젊은 시절인 1870년경에 백암장과 김량장 등 큰 장을 돌면서 줄 타고 땅재주 넘고 재담소리에 돈복이 쏟아졌다”고 말했다.

 

이어 “김인호는 나이 들어 협률사 단원 및 기녀들과 한양의 여러 권번에 초청돼 춤 사범으로 활동했고 1915년 광무대와 연흥사에 있던 경성‘구파’배우조합 부조합장을 역임할 때까지 돈을 정말 많이 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 시기에 김인호는 광무대의 대표적인 예인이었고 전국 광대들이 경쟁하던 광대사회에서 부조합장의 중책을 맡은 것은 그의 지위를 짐작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구파라는 용어는 기생조합 신파에 대응하는 것으로 용인, 수원 등의 광대인 김인호와 그의 제자 이동안은 전통적 방식을 넘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전통춤을 만들어 상당한 흥행성을 획득했다”고 해석 했다.

 

한편 1930년 매일신보는 김인호가 중타령(판소리 흥보가와 심청가 중에서), 주리타령 등의 노래, 중춤, 법고 등의 춤, 땅재주, 탈놀음, 재담, 웃음거리 화극 등을 했다고 기록했다.

 

특히 김인호는 1920년부터 광무대에서 발탈 보유자였던 이동안의 춤 스승으로 전통무용의 장단과 악기(젓대, 해금, 꽹과리, 북)와 춤을 사사했다고 했다. 이동안이 사사받은 춤은 궁중정제와 승무, 검무, 입무, 살풀이춤, 태평무, 진쇠춤, 성전무 등이다.

 

한편, 오늘날 무용계에서 근대 전통춤의 선구자로 칭해지고 있는 한성준은 1920년 경 김인호의 춤반주를 했으며, 권번에 나가서도 김인호는 춤을 가르치고 한성준은 장단을 잡아주었다고 했다.

 

“근대 최고의 전통무용가 한성준이 광무대에서 김인호의 춤교육과 춤반주를 하면서 많은 춤을 익혔다가 말년에 100여 종의 춤을 전승시킬 수 있었다. 그 밑거름은 김인호였다”고 주장했다. 한성준의 고수 생활이 50년이었고, 말년 10여년 미만을 무용에 전념해 100여 종의 춤을 정립할 수 있던 배경은 김인호와 경기재인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거듭 강조 했다.

 

“한성준은 유랑광대로 전국 수많은 춤을 반주하며 익힌 춤에 김인호의 춤교육과 반주에서 익힌 교수법으로 수많은 전통춤을 정리했다. 한성준은 김인호 은퇴 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조직해 춤을 뒤늦게 가르쳤는데 짧은 기간에 많은 춤을 정립할 수 있던 것은 스승 김인호가 남긴 다양한 재인청춤이 있었기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김인호는 대한제국시대에 순종 앞에서 재주를 연희할 정도로 기예가 뛰어났던 예인이다. 용인 태생이며 재인청출신이며 궁중에 출입하던 어전광대였고 광무대 시절 스타요 만능재주꾼으로 춤, 재주, 만담 등 끼가 넘치는 재인광대, 권번 춤선생 등 김인호의 이력을 일일이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라며 “김인호(복돌이) 대로, 김인호 문화제, 김인호 아트홀로 개명해야 한다. 또 용인복돌이축제, 용인김량장축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인호를 용인문화예술콘텐의 핵심으로 삼고 세계전통예인축제를 특례시 용인에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