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7 (금)

  • 맑음동두천 7.6℃
  • 맑음강릉 14.6℃
  • 박무서울 11.4℃
  • 맑음대전 14.3℃
  • 맑음대구 11.3℃
  • 구름조금울산 10.1℃
  • 구름조금광주 13.8℃
  • 맑음부산 15.2℃
  • 구름조금고창 ℃
  • 맑음제주 18.9℃
  • 맑음강화 9.6℃
  • 흐림보은 11.1℃
  • 맑음금산 9.1℃
  • 구름많음강진군 10.3℃
  • 맑음경주시 8.1℃
  • 구름조금거제 16.0℃
기상청 제공

최은진의 BOOK소리 5 _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일기

살인자의 기억법 (저자 김영하)

최은진의 BOOK소리 5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일기
   
◎ 저자 : 김영하 출판사 : 문학동네 정가 : 10,000원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기억을 잃어가는 이 책 주인공의 치매에 대한 묘사다.

현대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병은 암도, 심장마비도, 뇌졸중도 아닌 치매라고들 한다.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인 연쇄 살인범의 일기는 잠정적 치매 환자일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의 하루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소설가 김영하. 그동안의 다소 무겁고 잘 안 읽히는 문장으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이 책에서 살인자의 문장은 아주 쉽게 잘 읽힌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자의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일기는 현실과 허상의 경계를 맴돌며 숨 쉴 틈 없이 책장을 넘기게 만들지만, 그 재미의 끝에는 후유증이 있다. 재밌고 쉽게 읽히면서도 반야심경, 니체, 오디세이, 오이디푸스, 금강경, 몽테뉴 수상록 등의 잠언을 인용함으로써 농담처럼 쉽고 담백한 문장들에 깊은 철학의 옷을 입혔다.

정갈하게 다듬어진 유머로 일기를 쓰는 살인자를 보며 웃을 수 없는 이유는 그 섬뜩한 삶의 법칙에 우리가 공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조금의 가책도,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떠올리게 한다.

아무렇지 않게 툭툭 던지는 잠언들, 돌발적인 유머와 위트, 마지막 결말의 반전까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짜여진 이 소설은 삶과 죽음, 시간과 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풀어놓는다.

기억을 잃어가는 살인자가 삶의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붙들고 싶어하는 기억은 우리가 삶의 끝까지 마주해야 할, 마주하고 싶은 기억과 같은 종류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