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30초 이수진 설산 고산 모두 일어나 바람의 혼돈에 물을 줄 때 우리를 지켜주던 산과 들의 잔별들 그리고 골목의 화초들 죽을 힘 다해 죽어가던 남국 우리는 꾸욱꾸욱 걸어 바다에 이르러서야 봇물처럼 하얗게 피어나는 밤하늘 볼 수 있었다 이수진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9년 『현대시』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 날 30초」는 시인의 상상력이 즐겁게 펼쳐진 시다. 산다는 것은 지극히 짧은 시간들의 연속이다. 그 짧은 초단위의 시간이 연속적으로 다가와 하루가 만들어지며 한 달이, 일 년이, 십 년이, 일생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수진 시인의 30초는 그녀의 일생에 닿는다. 그녀가 보려는 것은 하얗게 피어나는 밤하늘이다. 죽음의 하늘인 것이다. 하얀 밤하늘은 죽음의 상징으로서의 하늘이다. <여우난골> 간 『우리가 사과처럼 웃을 때』중에서. 김윤배/시인
제비집 - 동탄1 손택수 제비 한 쌍이 처마 아래서 한참 정지 비행중이다 빨랫줄이나 벽에 박아놓은 못에라도 잠시 앉으면 좋으련만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있나 체념한 듯 돌아섰다가 다시 와선 또 가쁜 날갯짓 올려다보니 처마 깊숙이 마른 진흙자국이 있다 제비집이 붙어 있다 떨어진 자리 명절만 오면 헛걸음인 줄 알면서도 신도시로 바뀐 고향에 와서 옛 논과 들과 마을을 떠돌다가는 사람들이 있다 손택수는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 『목련 전차』 『나무의 수사학』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 『붉은 빛이 여전 합니까』 등이 있다. 「제비집-동탄1」은 손택수의 근무처인 <노작 홍사용문학관>과 무관치 않다. 근무처가 동탄에 있는 것이다. 해마다 찾아와 처마 깊숙한 곳에 제비집을 짓는 한 쌍의 제비와 명절만 오면 신도시로 변해버린 고향 동탄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문학동네> 간 『어떤 슬픔은 함께 할 수 없다』중에서. 김윤배/시인
슬픈악기 이대흠 노래방에 가서건 결혼식에 가서건 노래를 하려고 보면 꼭 생각나는 건 서러운 곡조뿐이네 기쁨을 말해야 하는데 신나는 노래도 많은데 몸속 어디에 슬픔의 청이 숨어 있나 이대흠은 1994년 『창작과비평』에 「제암산을 본다」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슬픈악기」는 시인의 몸이다. 그의 몸속에는 서러운 노래뿐이어서 어디서나 어느 때나 슬픈 노래가 떠오르는 것이다. 시인의 삶이 그랬던 것이다. 창비 간 『코끼리가 쏟아진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새마을떡방앗간 송진권 늙어 꼬부라는 졌지만 아직도 정정한 늙은이와 풍 맞아 한쪽이 어줍은 안주인과 대처 공장에 나갔다가 한쪽 손을 프레스기에 바치고 돌아온 아들과 젊어 혼자 된 환갑 가까운 큰딸이 붉은 페인트로 새마을이라고 써놓은 무럭무럭 훈김이 나는 미닫이문 안에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며 뽀얀 절편을 뽑아내고 있습니다 송진권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2004년 창비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새마을떡방앗간」은 붕괴 직전의 가족들이 떡방앗간을 꾸려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늙은 남편과 풍 맞은 아내와 도시로 나갔다가 프레스기에 한쪽 손을 절단한 아들과 젊어 혼자 된 환갑 가까운 큰딸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다. 창비 간 『원근법 배우는 시간』 중에서. 김윤배/시인
모든 안식일 유혜빈 모든 안식일의 나 자는 할머니 코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한다 얻어온 햄스터의 이름을 지으며 울기도 한다 강아지를 처음 데려온 날 강아지의 죽음을 계산해보기도 한다 나는 매일 안식을 취한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분할된 고통 속이다 유혜빈은 2020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모든 안식일」은 무료한 화자의 일상에 관한 시다. 날이면 날마다 안식일이니 무료할 것이다. 자는 할머니의 코에 손가락을 대보기도 하고 얻어온 햄스터의 이름을 지으며 울기도 한다. 매일 안식을 취하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분할된 고통 속이다. 창비 간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중에서. 김윤배/시인
생활 최지인 아픈 사람이 많아서 오래 기다려야 했다 진료실 바깥에서 환자들 서로 힐끔거리며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 믿음이 안 간다 언젠가 내 곁을 떠나더라도 경건히 벌써 몇 해가 흘렀다 최지인은 1990년 경기 광명에서 태어났다. 2013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생활」은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환자가 겪는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작품이다. 화자는 간병이었던 것이다. 환자의 가족들이 하는 말들은 믿을 수 없었다. 그때 화자의 곁을 떠나더라도 경건하게 보내겠다고 생각한 화자다. 그러나 몇 해가 흘렀지만 떠나지 않았다. 창비 간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중에서. 김윤배/시인
슬픔은 유병록 양말에 난 구멍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 유병록은 198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201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 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슬픔은」은 2행으로 된 단시다. 이 시처럼 단시에서는 시 제목도 한 행의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슬픔은 양말에 난 구멍 같다 들키고 싶지 않다’라고 읽히는 것이다. 들키고 싶지 않은 슬픔이라면 어떤 슬픔일까? 부모 때문에 오는 슬픔이라면 들켜도 상관없을 것이다. 이 슬픔은 아마도 사랑의 상실 혹은 이별의 슬픔일지 모른다. 창비 간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중에서. 김윤배/시인
여름 해는 얼마나 긴가 송진권 여름 해는 뜨겁고 길다지만 우리 소 배 속보다는 헐씬 작아 쇠풀 뜯기러 갈 때마다 엄마는 해가 저만치 달아산 넘어가면 집에 오랬는데 해는 져서 어두워졌는데도 우리 소는 아직 풀을 뜯어 송진권은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2004년 창비신인시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자라는 돌』 『거기 그런 사람 살았다고』가 있다. 「여름 해는 얼마나 긴가」는 농촌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유년의 정취다. 소는 농가의 커다란 노동력이며 자산이었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했기에 대학졸업장이 우골탑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긴긴 여름날 소 풀을 뜯기는 소년의 모습이 선명하다. 창비 간『원근법을 배우는 시간』 중에서. 김윤배/시인
문신 정호승 새벽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홀연히 일어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날카롭게 바늘을 찔러 이마에 새 한 마리를 문신했다 문신을 끝내자마자 새는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다 바늘을 입에 물고 나를 데리고 초승달이 뜬 새벽하늘로 정호승은 1959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성장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문신」은 사모곡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한 노래인 것이다. 새벽꿈이었을 것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만나 불을 켜고 창을 열고 바늘을 찔러 이마에 새 한 마리를 문신했다. 문신을 끝내자마자 새는 바늘을 입에 물고 화자를 데리고 초승달이 뜬 새벽하늘로 날아갔다. 창비 간『슬픔이 택배로 왔다』 중에서. 김윤배/시인
망종 안희연 며칠 만에 돌아온 그는 어딘가 변해 있었다 눈동자에는 밤의 기운이 가득했다 대제 어딜 다녀온 거예요? 한참 동안 말없이 서서 한참 동안 볕을 쬐더니 앞으로는 돌을 만지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했다 다음 날부터 그는 돌을 주워 오기 시작했다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돌과 보냈다 마당에는 발 디딜 큼 없이 돌이 쌓여갔고 그는 자주 돌처럼 보인다 나는 그가 돌이 되어버릴까봐 겁난다 눈부시게 푸른 계절이었다 식물들은 맹렬히 자라났다 누런 잎을 절반이 넘게 매달고도 포기를 몰랐다 .....하략...... 안희연은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이 있다. 「망종」은 24절기 중의 하나로 소만과 하지 사이에 들며 이맘때가 되면 보리는 익어 먹게 된다. 며칠만데 돌아온 그는 변해 있었다. 눈동자에 밤의 기운이 가득할 정도로 밤일을 했던 것이다. 어딜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앞으로 돌을 만지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돌을 주워오기 시작한 그는 하루 종일 돌과 시간을 보냈다. 마당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돌이 가득했다. 눈부신 계절이어서 식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