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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문화유산 산책

남편따라 죽은 열녀들… 양성평등 시대 ‘가치 퇴색’

용인의 문화유산 산책_지난시절 여성들의 억압을 상징하는 열녀비

사진 출처 : 이인영 편저 효제충신의 고장 용인 '삼강행실록'

백암면에 있는 열녀 연안이씨 정려각(사진 출처:이인영 편저 효제충신의 고장 용인 '삼강행실록')

 

연안이씨 열녀비

 

열녀 연안이씨 명정 현판

 


조선시대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따라 죽어 열녀가 됐다.

 

모현면 일산리에 있는 열녀 강화최씨 묘문비(좌측)와 정려비(우측)

 

용인지역에 30여명의 효부·열부… ‘남존여비’ 구시대 유물 치부 유실

 

[용인신문] 용인이라는 지명이 생긴지 600년이 넘었지만 기록에 남아있는 대부분 인물은 남성들이다. 용인의 여성 인물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시대적으로 조선시대에 효부를 비롯해 열녀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혼인 후 남편, 시부모 봉양이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여성들에게 조정에서 내려진 정려문이나 정려각, 열녀각, 열녀비 등이 기록과 함께 남아있다. 그러나 현시대와는 맞지 않는 버려져야 할 구시대 유물로 간주돼 건설 공사 등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고 남아있더라도 자리가 옮겨지는 경우가 있어 위치를 찾기조차 어렵다.

 

열녀는 조정이 개입해 규범을 전파시킨 것으로 오늘날 양성평등 시대에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극도로 불평등한 조선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용인에 전해오는 조선시대의 열부, 효부와 관련한 기록이 읍면지 등에 남아있다. 동네에서 정려문이나 효열비, 효부비, 순절비, 효열비각 등 실물도 간간이 접할 수 있다. 1970년대, 혹은1990년대에 세워진 효부비도 있어 눈에 띈다. 그만큼 현모양처, 며느리의 역할을 강조하는 남녀차별의 규범이 근래까지 이어져왔음을 보여준다.

 

‘효제충신의 고장 용인 삼강행실록’(이인영 편‧저자)에 의하면 용인에 30여 명의 효부, 열부가 전해지고 있다. 남편에게 절개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한 효열부가 상당수다. 이같은 내용은 전설로 전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조정에 상신 되지 않아 효열부였음에도 기록에 남겨지지 못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미천한 종복 계층이어도 표창을 하는 게 당시 제도였으나 종복의 표창을 상신해 줄 사람이 쉽게 나설 수 있는 여건이 안됐을 것이다.

 

양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사례가 있다. 권석기의 처 순흥안씨의 경우 그녀의 효부로서의 행실이 찬양할만한 것임을 알면서도 아무도 상신을 하지 않다가 절 창건을 계기로 뒤늦게 상신을 한 사례다.

 

열녀, 효부들이 행한 내용은 대부분 비슷한 면이 있지만, 배경이나 환경은 제각각이다. 대체로 남편과 시부모 공양을 위해 몸이 부서질 정도로 일을 하면서 받들어 모시는 것이 기본이다. 남편이든 시부모든 만일 병이 났을 경우에는 병 구환을 위해 손가락을 절단해 피를 먹이거나, 허벅지살이 효혐이 있다하여 이를 도려내 구워서 먹이기도 했다.

 

가장 절정은 자결이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 아내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으니 실로 무섭고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편이 죽었을 때 따라 죽으면 열녀비를 세워주는 제도가 있다는 것 자체가 여성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고 보여진다.  남편이 죽었는데도 용기가 없어서 따라죽지 못하는 여성들은 평생 그 마음의 부담과 죄책감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이같은 포상 제도의 존재는 여자는 당연히 죽어야 된다는 마인드를 체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했을 것이다.

 

심지어 16세의 꽃다운 어린 나이에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남편이 죽자 독약을 마시고 따라 죽은 열부도 있다. 아이를 낳지 못해 부덕이 없음을 죄스러워하면서 남편의 뒤를 따른 부인도 있다. 남편이 죽은 뒤 한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따라죽은 여성도 있다.

 

또 딸을 정성스럽게 키워 출가시킨 뒤 극약을 먹고 남편을 따라 죽기도 했고, 병자호란을 당해 산에 피신해 있을 때 오랑케가 다가오자 혹여라도 몸을 더럽힐까 두려워하다가 지레 물에 빠져 죽기도 했다.

 

늙은 홀시부모나 어린 자녀라도 있어서 그것을 이유로 살아남은 여성은 혹여라도 밤에 봉변을 당할까 걱정하여 칼과 낫을 옆에 놓고 밤새도록 실을 짰고, 낮에는 종일토록 길쌈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졀개를 지키기 위한 몸짓은 비참하기 그지 없었다. 물론 가족들이 자결을 못하도록 감시하거나 설득을 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결국 자결로 종결됐다.

 

조선 후기에 규합총서 등의 저술을 남긴 여성 지식인 빙허각이씨의 경우도 남편 서유본이 앓아눕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였고, 마침내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식음을 전폐하다가 죽음에 이르렀을 정도다. 빙허각 이씨의 경우는 여성 주체의식이 강했고 인간으로서 자각을 했던 지식인이었던 터라 사회적 인식의 늪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열녀라는 말은 조선시대에 생겨났다. 고려시대에는 열녀 대신 절부(節婦)라는 말이 있었다. 절부는 남편이 죽었을 때 재가하지 않고 졀개를 지키는 것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도 의부(義夫)라고 해서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재혼하지 않는 것을 말했다. 고려시대는 남녀가 평등했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서 성리학 이념 하에 남녀차별이 생겨났고, 아예 남편이 죽으면 따라죽는 열녀라는 말이 생겨났다. 결혼한 여성을 의미하는 열부라는 말대신 열녀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모든 여성을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뿐만 아니라 여성이 재가해서 낳은 자식은 관리로 임명하지도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의부라는 말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대를 잇는다는 이유로 재혼, 삼혼, 사혼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같은 남녀차별적 가치관이 현 시대와 맞지 않다보니 이와 관련한 비문이나 정려각 등 과거 시대를 증명하고 보여주는 문화유산이 폄훼되거나 별 보호 조치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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