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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의 문화유산 산책

풍전등화 고려를 구한 토성

몽골 2차 침입시 적장 살리타이 사살 승전고 울린 항쟁터

 

 

 

경기도기념물 제44호

 

[용인신문] 풍전등화의 고려를 구출한 처인성.

 

처인성은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에 있으며 둘레 425m, 높이 3~6m 가량의 작은 평지토성이다.

 

처인성은 당시 거침없이 유라시아를 재패하던 몽골 2차 침입시(1232)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하면서 승전고를 울린 유서 깊은 항쟁터다.

 

그러나 그동안 처인성의 위치가 맞느냐 아니냐를 놓고 오랜 논의가 있어왔다.

 

논의의 시발은 1990년대 말, 본보가 처인성이 산성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데서 비롯됐다.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의 ‘고산성’ 표시를 근거로 한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위치비정 문제가 확실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이다.

 

용인신문은 그 후에도 한국지명총람의 자료를 근거로 해발 238.9m의 산성임을 주장하는 등 간간이 관련 자료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국지명총람 기록대로 답사해보니 남사면 아곡리, 북리, 완장리 경계지점의 ‘십자봉’ 정상 부근은 한눈에 봐도 천혜의 요새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용인신문이 고지도 등 문헌을 찾기 시작한 이유는 당시 몽골의 기세를 꺾기에는 야트막하고 조그마한 평지성이 과연 가능하겠냐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같은 의구심이 가능했던 것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 당시의 전투성이 모두 해발고도 수백미터의 험준한 산성이었기 때문이다.

 

즉, 몽골군을 맞아 싸웠던 고려성의 일반적인 특징은 해발고도 300~500m에 이르는 산간오지의 산성으로서 전투성보다는 도망가는 피난성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종과 무신정권이 모두 강화도로 천도 한 상황에서 내륙은 힘없는 백성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살기 위해 산성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즉, 전투력이 열세인 상황에서 몽골군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가파른 성이어야 했다. 그래야 적의 접근이 어렵고 소수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피난처가 될 수 있었다.

 

몽골의 침입 때 피난성으로 이용했던 양평의 함왕성(해발 740m)과 가평의 운악산성(해발 935.5m)이 대표적인 예다.

 

처인성의 승리를 이끈 김윤후 승장이 21년 후인 1253년 또 하나의 승전보를 울렸던 충주산성 역시 험준한 산성이다. 우리라도 평지성을 피해 산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다.

 

얼마전 처인성에 가보니 역사공원화 작업이 거의 마무리 단계로 보였다. 처인성 전투가 있은 이래 789년의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오래된 나무도 거의 베어지고 깔끔하게 단장된 곳에서 과연 당시 치열했던 전투가 상상될 수 있을까.

 

처인성의 정체성 연구보다는 보여주기식 관리 영역만 만들어놓는 게 아닌가 싶다. 바로 앞에는 한옥으로 교육관 건축공사가 한창인데 교육으로 진실을 구현할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