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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역사의 아버지… 잠든 보물·문화재를 깨우다

용인의 문화예술인 18. 용인향토사학자 이인영 선생

 

[용인신문] 용인 향토사의 대부 이인영(78) (사)전승문화연구원 이사장. 그가 있었기에 오늘날 용인의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있었다. 살아있는 용인문화사, 용인학 박사, 용인문화의 거인, 움직이는 용인백과사전 등 그가 청년의 혈기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따라다니던 별칭이 그를 설명해준다. 그의 문화재 발굴 기사가 연일 지방지, 중앙지에 특종을 제공했으며 대서특필 됐다. 용인이 다른 어느 시군에 비교할 수 없는 문화재의 보고임이 그에 의해 속속 밝혀졌다. 그는 선사시대부터 시대별, 장르별로 켜켜이 쌓여있는 용인을 최초로 드러내고 알리기 시작한 인물이다. 비단 향토사뿐만 아니라 그는 한중일 동양 3국의 역사를 비롯해 고고학, 도자사, 미술사, 초상화, 민속학에 이르기까지 전문지식이 다방면에 걸쳐있다.

 

용인시청 공무원시절 그는 ‘채제공 어제뇌문비’ 현장 설명으로 김용래 전 경기도지사에게 발탁돼 야전침대를 놓고 밤을 새워가며 경기도향토사료관을 개관시켰고, 경기도박물관 기본계획 입안 및 용인 유치를 이끌어낸 것은 물론, 용인시향토사료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최초 발견해 지정한 보물, 문화재가 45점에 이르며, 저서도 내고장용인(용인지역 전란사-몽골침입, 임진왜란, 병자호란 최초 발굴), 용인 의병항쟁 및 독립항쟁사, 용인문화유산총람, 지지총람, 인물총람, 금석문총람 등 28권에 이른다.

 

훗날 용인문화제, 처인성문화제 등으로 명칭을 바꾼 용구문화제(1986년 1회)를 창안하기도 했다. 또 다수의 논고 논문 중 특히 ‘몽골 제2차 침입과 처인성 대첩 소고’는 전국향토문화연구논문공모 우수상에 선정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상을 수상 했으며, 이는 경기도문화상 학술부문상 수상과 함께 그의 자부심이다. 그는 이때 비로서 향토사학가가 아니라 향토사학자로서 자리매김했다고 생각한다.

 

향토사와 관련된 활동만 해도 시군읍면지 등 집필활동, 각종위원회 활동, 용인문화원장 등 사회단체장 등 실로 다양하며,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그가 평생을 천착해온 향토사와 관련한 업적과 일화는 일일이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다. 용인향토문화진흥협의회, 용인향토사학회 등 민간 향토사연구단체를 창립시키기도 했다.

 

향토사 외에 문화예술적 능력까지 겸비했다. 태성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 취주악단 콘닥터, 트럼펫 연주, 피아노 연주, 미술활동 등 넘치는 끼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시립도서관이 없던 때라 유일한 용인문화원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많이 읽어 문화원장의 눈에 든 촉망받는 학생이었다.

 

공직에 들어간 후부터 용인군청합창단, 교회 성가대 등의 지휘와 반주를 했고, 용인 최초의 합창단인 용인문화원 인성합창단 창단 주역이기도 했다. 황근숙 전 용인시여성단체협의회장의 웨딩마치도 그가 쳤다. 그는 용인의 근대사를 밝힌 주인공 중에 하나였다.

 

그가 문화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공무원에 몸담고부터였다. 그후로 20대의 청년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50여년 동안 문화재와 책을 끼고 살았다.

 

“나에게 본병과 객병이 있었어요. 내 직업은 공무원이었지만 본병(공직)보다 객병인 향토문화연구 쪽에 더 열의를 가지고 살았으니 기실은 본병이 객병이고, 객병이 본병이었던 셈이죠.”

 

1960년대 중반부터 용인군청 공보실에서 근무하게 된 이인영 선생은 그때부터 문화재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용인약사라는 책을 기반으로 공보지에 문화재를 소개하는 난을 채워나가면서 현장에 나가 사진 찍고 실물을 대하는게 흥미로왔다.

 

기흥면에 발령 받은 후 공세리 5층 석탑을 최초 발견하면서 진짜 문화재 사랑에 빠졌다. 한국의 석탑이라는 책을 뒤지니 국내에 5, 6개 정도 남아 있는 고려 후기 석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한 탑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신기했다.

 

게다가 68년 즈음, 문교부 소관이던 문화재 업무가 공보부로 이관될 때 용인교육청에 가서 업무 서류 인수를 받아온 게 그였고 실무자가 됐다. 업무가 이관되니 지시가 떨어졌다.

 

“정몽주선생 묘에 가서 뭘 조사해 와라. 문화재 업무를 취급하니까 상당히 공부를 하게 됐죠. 옥편이 너덜너덜 해질 정도로 한문 공부도 했죠.”

 

취미도 있고 지시도 있었기에 그는 포은 묘소나 심곡서원 등의 자료를 수집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업무를 봤다. 경기도에서 최초로 지방문화재를 지정할 때 그동안 축적해놨던 자료로 1착으로 가서 신청했다.

 

“정몽주 선생 묘소가 그때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거에요. 심대장군 묘가 3호, 심곡서원 7호, 충렬서원 9호 등 10호 이내로 내가 낸 게 다 지정 됐어요. 그 외 조광조 묘, 이재 묘 등 유명한 묘들도 그 당시 지정됐죠.”

 

당시 공보실에 지프차가 배정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직접 오토바이를 사서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쇠당나귀(오토바이) 타고 안다닌 데 없어요. 산도 다 올라갔고 엄청나게 탁본도 했죠. 문수산 마애보살, 까막딱다구리도 내가 찾았어요. 오토바이가 안가는 데가 있어요. 지나가다가 멀리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가보면 다 문화재였죠. 고기리 이종무 장군묘, 창리 선돌도 그렇게 지정됐어요.”

 

문화재 정리가 안 돼 있던 시절, 그는 최선을 다했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내 역량대로 산거에요.”

 

이같은 기반이 있었기에 신예 향토사가들의 활동이 가능했는지 모른다. 용인 의병사, 독립항쟁사 정리도 그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여전히 향토사 앞에서 열정이 끓어오르는 청춘이다. 요즘도 오토바이를 타고 문화재를 찾아 나선다. 문화재로 지정해야 할 것들이 눈에 띤다.

 

“요즘 향토문화재 지정의 기준이 높다보니 누락되는 게 있어 안타깝죠.”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용인에서 죽을 때까지 즐겁게 일할 평생의 일거리인 향토사”를 위해 요즘도 집필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배운 게 없고 아는 게 없어요.”

 

그러나 율곡 이이같은 과거의 대학자들도 모두가 스스로 터득해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나. 이인영 원장도 스스로 터득해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